글 수: 8    업데이트: 22-08-31 12:00

작가노트

매화로 꽃 피다(백천 대구은행전)-시천서문 _ 김동원 시인
아트코리아 | 조회 226
한글, 매화로 피다
 
김동원 시인
 
 
의경(意境)
 
천지는 화경(畫境)이다. 수묵은 태고 무법(太古無法)이다. 모든 사물의 근본은 하나이지만 저마다 생긴 모양이 다르듯, 화법(畫法)은 어느 한 곳으로 귀일하나 그에 이르는 붓질은 천만 갈래다. 먹빛은 “모든 존재의 소멸인 동시에 다시 온갖 존재의 출발점이 된다.”(오주석)있는 색은 있는 색이 아니요, 없는 색은 없는 색이 아닌 세계가 수묵이다. 의경(意境) 은 화가와 사물이 한 몸 되어 새롭게 태어난 심미(審美) 의식이다. 실제의 객관적 대상을 예술가의 스킬을 통해 예술정신으로 승화된 격조미다. 해와 달은 운행 그 자체가 구상과 추상의 오브제이다. 화가는 붓을 들고 천지에 나와 ‘한 번 그음’으로써, 자신의 법을 만든다. 일찍이 백천은 ‘하늘이 그에게 준 소명을 받들어, 점(點)을 찍고 선(線)을 치다 죽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그에게 수묵은 법고(法古)에서 창신(創新)에 이르는 고행의 길이다. 하여, 수(水/陰)는 먹(墨/陽)을 받아들여, 삼라만상의 놀라운 형상으로 발묵한다.
 
붓은 몸이다. 시대마다 다르게 쓰이는 법구(法具)다. 붓은 당대의 심안(心眼)이다. 현실을 뚫는 정신이다. 하여, 붓질은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 백천의 붓은 정격을 치고 나온 파격이다. 대상과 주체는 알레고리적이자 상징이다. 그에게 화(畵)는 해체이자 질문이며, 전시대의 반역이자 전복(顚覆)이다. 매전시회마다 백천이 보여준 놀라운 안목과 물성의 처리 방식, 압축과 대담한 생략, 장대한 스케일 등은 그의 예술의 요체이다. 대상을 겹쳐 바르는 한지의 적묵법을 취해, 윤곽의 생동성과 디테일을 화폭에 새긴다. 적묵(積墨)과 초묵(焦墨), 묵선과 여백의 미학적 공간 분할은 또 다른 미학의 세계로 이끈다.
 
하여, 백천의 수묵은 모방을 거부하는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사이에 존재한다. 한지(韓紙) 위의 펼쳐진 매화도의 고격(古格)은 현대적 감각이다. 형식은 법고(法鼓)의 아름다움을 취하고, 내용은 창신(昌新)을 추구한다. 이렇듯 백천 화풍은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든다. ‘무엇이 현대 수묵인가?’에 대한 질문과 답을 독창적 디자인으로 제시한다. 기존 사군자의 패러다임을 단숨에 뒤엎는다. 하여, 백천은 고정된 예술의 실체를 거부하며, 파묵(破墨)을 통해 창조로 직진한다. 아직 열리지 않은 혼돈의 미학을 깨뜨려, 파천황(破天荒)의 먹빛을 꿈꾼다. 대상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현대 수묵의 조형미를 추구한다. 서도(書道)로 연마한 그간의 필력(筆力)은, 백천 수묵의 농담과 선(線)의 예리를 중후하고 고졸하게 입힌다.
 
한글 문자추상(文字抽象)
 
이번 백천 서상언의「한글, 매화로 피다」전(展)의 중요한 특징은, 지금껏 매화도에서 시도된 바 없는, 한글 자모(子母)의 붉은 화점(花點)이 천하 구경거리다. 화가는 자음과 모음을 번갈아 매화의 꽃점을 찍음으로서, 한글 문자추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이런 기상천외한 발상은, 법고의 아름다움과 창신의 새로움과 합치돼, 심플한 미감(美感)을 불러일으킨다. 표음 문자인 한글은 천지인 삼재(三才)를 점획의 근본으로 삼는다. 보이는 사물의 원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담는다. 한글 자음 14자와 모음 10자의 직선과 곡선 미학은 초성과 중성 획의 무궁무진한 운용의 묘를 낳았다. 이응과 히읗의 곡선미는 문자추상의 절경을 이룬다. 한글 운필의 방향은 고정된 틀이 없다. 가로쓰기와 세로쓰기, 왼쪽과 오른쪽, 오른쪽과 왼쪽, 모든 필획은 공간 활용이 가능하다.
 
스물여덟 작품의 매화도가 모두 나름의 의미를 갖고 태어났지만, 특히 대작「한글, 매화로 피다」(140×300cm. 한지. 먹. 혼합재료) 앞에 서면 황홀경에 빠진다. 그 스펙터클한 구도에서부터 압도된다. 구불구불 뒤틀린 노매(老梅)의 풍상은, 매화를 그리는 다섯 가지 묘법인 화매오요(畵梅五要)가 다 들었다. 봉황이 춤추고, 학이 앉은 듯, 아리따운 한글 자모의 꽃점이 가지마다 피어 기가 막힌다. 왼쪽 하단의 수백 년 묵은 밑둥과 초묵의 몰골(沒骨) 번짐은 탐매선경(探梅仙境)이 따로 없다. 등걸의 휘굽어 뻗은, 저 능숙한 먹짓의 신령스런 필력을 보라. 화폭을 양분한 구도의 멋과 여백미 또한 절묘하다. 오른쪽 곡선을 그리며 뻗어 내린 절매(折梅)의 마들가리는, 의경(意境)의 진면목이 돌올하다. 화폭마다 작게 그려 넣은 Fish(물고기)의 이니셜과 붉은 낙관 역시 멋을 더한다.
 
한글은 가획(加劃) 원리(예→ㄱ+ㅡ=ㅋ)를 근본으로 삼는다. 기본 자음인 5개로 나머지 자음 문자를 모두 만든다.(예→ㄱ(ㄲ, ㅋ), ㄴ(ㄷ, ㄹ, ㄸ, ㅌ), ㅁ(ㅂ, ㅃ, ㅍ), ㅅ(ㅈ, ㅆ, ㅉ, ㅊ), ㅇ(ㅎ)). 모음 역시 우주를 상징하는 둥근 점인 ‘·’(天)과 땅을 상징하는 ‘ㅡ’(地),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 우뚝 서 있는 ‘ㅣ’(人)의 천지인을 모델(예→ㅣ+·=ㅏ) 로, 모든 모음을 만든다. 세계 문자 역사상 한글처럼 과학적인 글자는 없다고 한다. 백천의 한글 문자추상은 이런 사상적 원리를 바탕으로 작품화되었다. 작품「한글, 매화로 피다(ㅎ)」(47×72cm. 한지. 먹. 혼합재료) 은 수묵화의 놀라운 현대적 이미지의 구도를 갖는다. 상하좌우 여백미를 주면서 공간 분할한 ‘ㅎ’(히읗)의 배치는 황금분할이다. ‘ㅇ(이응)’ 속에 부감법으로 그려 넣은 곡선미와 한글 자모의 꽃점 처리 역시 곱다. 예술의 현대성은 언제나 우리의 내부에 꿈틀거린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 과거이자, 동시에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 화가 백천은 수 천 년 내림하는 법고 위에, ‘오늘, 지금’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먹칠한다. 예술 작품은 기존 작법을 무너뜨릴 때 ‘미완성의 완성’이 된다. 수묵의 묘는 여백미와 선(線)의 기운생동에 있다. 파격의 예술은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과정에 비견된다.

이번 백천 서상언의「한글, 매화로 피다」에서 특별히 주목할 작품으로, 작품「한글, 매화로 피다(o)1」(47×72cm. 한지. 먹. 혼합재료) 을 꼽지 않을 수 없다. 화폭 중앙에 ‘ㅇ(이응)’을 두고, 그 원 속에 한 줄기 쭉 뻗은 매화를 심은 뜻은, 묵매도야 말로 천하제일경임을 표상하는 듯하다. 한편, ‘ㅇ(이응)’은 모든 모음의 초성에 모셔져, 어미인 땅을 상징함과 동시에 불교의 공(空) 사상을 내포한다. 하여, 백천은 “ㅇ(이응)이야말로, 직선과 곡선의 수묵 미학”을 품은 한글 추상의 묘처임을 갈파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ㅇ(이응)은 우주를 먹여 살리는 화엄의 상징이자 원융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함께 전시한「한글, 매화로 피다(o)2,3」(47×72cm. 한지. 먹. 혼합재료) 두 작품 역시, 하늘 위에서 내려보는 부감의 시선과 땅 아래에서 올려다본 고원법을 통해 멋진 구도를 낳았다. 그렇다. 화가 백천의 이번「한글, 매화로 피다」전(展)은, 현대 수묵화의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그가 보여준 파격과 심미안은 실로 대단하다. 대담한 스케일과 구성, 지칠 줄 모르는 아이디어는, 한지 초묵의 신비로운 흑색의 세계로 이끈다. 이제 백천의 예술은 바야흐로, 그림이 시가 되는 화중유시(畵中有詩)의 경계에 서 있다. 바라 건데,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 가되 근본을 잃지 않는, 동양 예술의 최고봉인 허정(虛靜)의 경지에 닿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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