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6    업데이트: 24-04-18 09:30

칼럼-7

[이태수 칼럼] 지금이 가장 값진 시간 / 경북신문 / 2023. 6. 20
아트코리아 | 조회 373
<이태수 칼럼>
지금이 가장 값진 시간
——경북신문 2023. 6. 20
 

  누군가 ‘시(詩)도 나이를 먹는다’고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최근 등단 50년을 맞으면서 발간한 스무 번째 시집 ‘유리벽 안팎’의 시들을 되짚어보듯이 들여다보면 ‘희수(喜壽)’가 다가오는 나이의 무늬와 결이 오롯이 떠올라 있다.
  ‘앞만 보고 가던 시절도 있었으나/이젠 서둘러 가고 싶은 곳도 없다/가야 할 곳도 거기가 거기만 같다’(‘황혼 무렵’)라든가 ‘떠나갔다 돌아오는 건 맞이하고/ 떠나면 안 돌아오는 것도 떠나보낸다’(‘오늘’)는 구절들이 자연스럽게 쓰이던 때가 되돌아 보인다.
  무상감 때문이기도 하고 자연(우주 질서)의 순리에 따르려는 순응의 마음자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현실 초월’이 시의 기본 명제이며 한결같은 화두(話頭)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턴가 채우려 하기보다 비우고 내려놓고 지우려 해온 마음도 가까이 다가온다.
  심지어 이따금 풍진세상의 현실을 괴로워하고 아파하다가도 ‘세상살이 새옹지마라고 슬퍼하다가/상선약수라는 말을 떠올린다//저무는 강을 느긋하게 바라보면서/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저무는 강가에서’)라고 써 놓은 구절도 새삼 들여다보게 된다.
  그렇다고 하루하루를 무작정 내려놓듯이 살려고 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반대의 심경을 애써 통어헸는지 모른다.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느슨함 속의 팽팽함’, 또는 ‘관조와 응시의 길항(拮抗)’과 같은 시각이 서로 맞물리는 상태였다고나 할까. 나아가서 ‘마치 오늘이 첫날이듯이/그보다 마지막 날이듯이/(중략)/난생의 첫발을 내딛듯이/막지막 발을 재겨딛듯이//이 찰나를 끌어안아 영원을 품듯이’(‘영원을 품듯이’)라는 구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찰나’와 ‘영원’을 하나로 아우르려 했다.
  시 ‘꽃 한 송이’는 그런 심경을 쉬운 구문으로 진솔하게 담아낸 경우다. 아홉 행의 짧은 시지만, 한 행이 한 연을 이루게 구성한 것은 행(연)과 행(연) 사이의 여백과 완만한 호흡을 통해 ‘말 없는 말(침묵)’의 공간을 넓혀보려 하고, 비움으로써 차오르는 절정의 찰나를 영원으로 승화시키려 하지 않았던가.
 
  마음 비운 자리에 꽃 한 송이 핀다//저 생명의 절정인 꽃,//비워서 차오르는 저 절정의 찰나를//처음이듯, 마지막이듯//깊이, 더 깊이 끌어당겨 그러안는다//이 찰나가 영원이듯,//영원이 바로 이 찰나이듯, 피어나는//절정의 꽃 한 송이//마음 내려놓은 자리에 그 꽃이 핀다(‘꽃 한 송이’ 전문)
 
  이 시집의 해설에서 조창환 시인은 “이 시에서는 비움과 갖춤을 함께 지닌 영성적 정신의 깊이가 느껴지고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미학적 관찰의 섬세함이 느껴진다. 시인이 바라보는 꽃 한 송이는 생명의 절정이면서 그 절정의 찰나를 영원으로 승화시키는 절대적 아름다움의 환희가 있다”라고 풀이했다.
  그는 또한 이어서 다음과 같이 과분하게 평했다. “‘비워서 차오르는’ 꽃, ‘이 찰나가 영원이듯/영원이 바로 이 찰나이듯’ 피어나는 절정의 꽃 한 송이에 대한 찬탄과 경외의 언어는 이 시에 종교적이며 영성적인 색채를 더한다. 찰나에 영원이 담겨있고 영원이 찰나에 스며있는 상태, 비움으로 꽃 피워진 그득한 충만의 상태, 생명의 절정이면서 아름다움의 절정인 상태가 이 시 ‘꽃 한 송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평생 세 가지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고 한다.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이며,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고, 가장 값진 시간이 언제인가에 대한 질문이 그것이다. 톨스토이는 바로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하고,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중요하며,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값진 시간이라고 했다. 동감이다.
  나의 시 쓰기는 더 나은 삶을 향한 꿈꾸기이며, 스스로 던지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다. 요즘은 톨스토이의 삶의 자세를 소중한 귀감(龜鑑)으로 받들며 살아가려 한다. 그가 말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하며 값진 시간도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다. 특히 지금 이 순간(찰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듯, 더 나은 삶 꿈꾸기로서의 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 비우고 내려놓으며 비의(泌義)처럼 차오르는 영원을 품어 안으려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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