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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7

[이태수 칼럼] 이육사의 '청포도' / 경북신문 / 2023.07.19
아트코리아 | 조회 329
이육사의 ‘청포도’
 
이 태 수 <시인>
 
 
  소년 시절에는 시의 의미망을 제대로 모르면서도 이육사의 ‘청포도’와 ‘광야’, 박목월의 ’청노루’와 ‘나그네’, 조지훈의 ‘낙화’와 ‘승무’, 김춘수의 ‘꽃’과 ‘꽃을 위한 서시’ 등을 외우고 다니던 기억이 선연하다. 문학도 시절부터는 황동규의 지적인 서정시들에 새로운 매력을 느꼈으며, 등단 이후 지금까지도 그를 자주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가까이 따르는 선배 시인이다.
  해마다 칠월에는 일찍부터 애송했던 시 가운데 이육사의 ‘청포도’가 맨 먼저 떠오르곤 한다. 그 시대(1930년대)에 어떻게 그처럼 아름다운 모국어를 빼어나게 구사하고, 비단결 같은 이미지들을 교직하면서 완성도 높은 시를 빚었을까 하는 경이감과 서정의 옷을 입은 올곧은 민족의식의 깊이에 젖게 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육사(1904~1944)는 일제 암흑기를 뜨겁게 살면서 강렬한 저항정신에 불을 지폈던 애국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민족적 의지가 장엄하게 떠올라 있으며, 그의 문학은 그의 생애를, 그의 생애는 다시 그의 문학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특히 ‘청포도’는 향토색 짙은 서정으로 우리 고유의 정서와 광복에 대한 열망을 아름답게 떠올린다.
  ‘청포도’에 등장하는 ‘흰 돛단배’나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은 잃어버린 조국을 찾아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는 지사들의 표징이다. 그런가 하면, ‘하이얀 모시 수건’과 같은 표현에서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에 천착하는 빼어난 감성을 내비쳐 보이고 있다.
  감각적 언어 구사와 조용한 분위기로 마음을 청정하게 가라앉혀 주기도 하는 이 시는 또한 ‘청포도’ ‘청포’ ‘흰 돛’ ‘푸른 바다’ ‘은쟁반’ ‘하이얀 모시 수건’ 등에서 나타나듯이 색깔을 떠올리는 어휘들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어 시적 묘미를 증폭시킨다. 이 같은 어휘들은 신선한 이미지를 빚고 있으며, 오랜 세월에도 시간의 침식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것 같다.
  이 시에서 ‘내 고장’은 공간적 요소이며, ‘칠월’은 시간적 요소다. 다시 말해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계절을 떠올리고 있으며, 거기에 놓여 있는 ‘청포도’는 특정한 사물을 가리킨다. ‘내 고장/칠월/청포도’에서는 ‘시간-공간-사물’을 축으로 여러 가지 의미와 이미지를 낳고 있으며, ‘전설’과 ‘하늘’, ‘주저리주저리’와 ‘알알이’는 절묘한 대구다.
  ‘내 고장 칠월’로 시작된 ‘청포도’는 ‘전설’의 끝없는 시간과 ‘하늘’의 무한한 공간 속에 무르녹게 되는데, 반복어인 ‘주저리주저리’의 연속성과 끝없이 펼쳐진 둥근 모양의 하늘을 압축한 듯한 ‘알알이’의 공간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어 먼 바다에서 어렴풋한 약속을 한 ‘청포’ 입은 그 손님이 찾아옴으로써 이 시의 화자가 바라보는 계절이 익어가는 것으로 전개되고, ‘하늘’과 ‘전설’이 청포도 속으로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알알이 들어와 박히는 것처럼 ‘청포 입은 손님’이 ‘나’(화자)에게로 오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이 시는 전체의 기조색이 청색이며, 백색과 대응하면서 역시 절묘한 이미지와 의미망을 빚는다. ‘하늘’ ‘바다’ ‘전설’ 등이 청색이며, 손님의 옷(청포) 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 청색은 ‘흰 돛’이나 ‘은쟁반’ ‘모시 수건’ 같은 백색과 대비되면서 시적 묘미를 한껏 증폭시켜주고 있다.
  나아가 ‘상상의 포도’가 ‘따먹는 포도’로 패러다임이 바뀌면서는 ‘나’와 ‘손님’이 하나의 신체성을 획득한 ‘우리’로서 일체화되는 분위기를 연출힌다. 이 얼마나 정치하고 아름다운 서정시인가. 당대를 너무나 준열하게 살았던 그가 어떻게 이같이 빼어난 언어 감각을 구사할 수 있었는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하면서 이 시를 읽으면 수평과 수직, 하강과 상승 이미지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는 점도 선연하게 느낄 수 있다.
  안동에는 그가 태어난 지 100주년, 작고한 지 60주년 때 고향 마을에 육사문학기념관 건립을 비롯해 생가가 복원되고, 시비를 다시 세우는 등 기념사업들이 빛을 보기도 했다. 이 기념사업 때 추진위원으로 참여했으며, 뒤이어 TBC 대구방송이 제정한 이육사시문학상의 기본 틀을 만드는 일을 하고 운영위원과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기억도 새삼스럽다.
  올해 칠월은 장마와 폭우로 엄청난 재앙을 안겨줘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 그 옛날 이육사가 염원했던 ‘푸른 하늘’과 ‘청포 입은 손님’이 이 삭막한 시대에도 새 희망의 전언으로 찾아들고 알알이 들어와 박히면 얼마나 좋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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