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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熙,郭思의 林泉高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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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훈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23/09/20 | 조회 0
 군자가 산수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 취지가 어디에 있는가? 산림과 정원에 거처하면서 자신의 천품을 수양하는 것은 누구든지 언제나 그렇게 거처하고자 하는 바이고, 샘물과 바위에서 노래하며 자유로이 거니는 것은 누구든지 언제나 그처럼 즐기고 싶은 바일 것이다. 세상을 피해 물고기를 잡고 땔나무하며 한가하게 사는 것은 누구든지 언제나 취미에 맞는 바이고, 원숭이 울고 두루미 나는 광경은 누구든지 언제나 친하고 싶어하는 바이다. 속세의 풍진사에 구속받는 것은 인정상 누구든지 언제나 싫어하는 바이고, 안개 피어오르고 구름 감도는 절경 속에서의 신선이나 성인, 이것은 인정상 누구든지 언제나 동경하는 바이나 그들을 만나볼 수는 없는 형편이다. 다만 태평성시에 임금과 부모마음의 은덕을 두텁게 입는 처지면서도, 실로 자기 한 몸만 깨끗이 하고자 한다면, 사람의 행동이 나아가는 곳에 대한 절조와 도의가 관계되어서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이어늘, 어찌 어진 사람으로서 세속의 범속과 사귀지 않고 멀리하는 이세절속(離世絶俗)의 행동이라 하겠으며, 반드시 옛날 기영(箕穎)과 근본된 성품을 같이 하면서 하황공(夏黃公), 기리계(綺里季) 등과 같은 빛나는 명성을 갖는다고 하겠는가? 백구(白駒)의 시와 자지(紫芝)의 노래 같은 것은 모두 당시의 불안한 세상에서 부득이 멀리 은둔한 인사들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임천(林泉)을 사랑하는 뜻과 구름과 안개를 벗삼으려는 것은 꿈속에서도 그리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눈과 귀가 보고 듣고 싶은 것이 단절되어 있는 형편이므로 지금 훌륭한 솜씨를 가진 화가를 얻어 그 산수 자연을 울연(鬱然)하게 그려낸다면 대청이나 방에서 내려가지 않고도 앉아서 샘물과 바위와 계곡의 풍광을 한껏 즐길 수 있으며, 원숭이 소리와 새 울음이 흡사 귀에 들리는 듯하고 산빛 물빛이 어른거려 시야를 황홀하게 빼앗을 것이니, 이 어찌 남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고 자신의 마음을 완전하게 사로잡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세상사람이 산을 그리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근본 뜻이다. 만약 이러한 취지를 주로 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을 그리는 데 임한다면 어찌 신기(神氣)로 관찰하는 것을 어지럽히며 맑은 풍취를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산수를 그리는 데는 법식이 있으니 펴서 벌려 대작을 만들더라도 남아도는 곳이 없어야 하고, 축소해서 조그마한 경치를 만들더라도 (짜임새는) 작지 않아야 한다. 산수를 보는 데도 법식이 있으니, 임천의 마음 (즉 자연과 일체가 된 마음)으로 임한다면 가치가 높아질 것이요, 교만하고 사치한 눈 (즉 자연을 희롱하는 눈)으로 임한다면 가치는 떨어질 것이다.
 산수는 큰 물체(大物)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볼 경우 반드시 멀리서 그것을 보아야 비로소 하나의 대형 병풍같이 둘려쳐져 있는 산천의 형세와 (거기서 떠오르는) 기상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녀(士女) 인물화와 같이 극히 작은 그림은 손바닥이나 책상 위에 한번 펼치면 알게 되고, 한번 보면 의미를 다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이 모두 그림의 법이다.
 (산수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확실한 논의로서, 산수에는 한번 지나가볼 만한 것, 멀리 바라볼 만한 것, 자유로이 노닐어볼 만한 것, 그곳에서 살아볼 만한 것 등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림은 무릇 이러한 ‘여러’ 경계의 표현이 가능함에 이르러야 모두 묘품(妙品)의 경지에 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번 지나가볼 만한 것과 멀리 바라볼 만한 것은 그곳에서 살아볼 만한 것과 자유로이 노닐어볼 만한 것이 어떤 것(즉 산수풍취)을 얻게 됨만 못하다. 왜냐하면 지금의 산천 지형을 보면 비록 수백 리를 점거한 지역 가운데에서도 자유로이 노닐어 볼 만하고 그곳에서 살아볼 만한 곳은 10 중에 3, 4 도 되지 못하므로, 반드시 거기에서 살아볼 만하고 자유로이 노닐어볼 만한 품격을 가진 것을 취하는 것은 군자가 임천을 갈망하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곳을 아름다운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가는 마땅히 이러한 뜻으로 제작해야 할 것이며, 감상자는 또한 마땅히 이러한 뜻으로 그것을 궁구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만이 그 (산수 연구의) 본뜻을 잃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림에도 관상법이 있다. 예로 이성의 자손이 번성하고 잘 되었는데, 그가 그린 산기슭과 지면이 모두 혼후하고 넓고 크며, 위로는 빼어나고 아래로는 풍만함이 후손이 번영하는 상(相)과 합치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단지 관상을 일컫는 것뿐만 아니라 이치도 당연히 이와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림을 배우는 것은 글씨를 배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가령 지금 종요와 왕희지, 우세남, 유공권 중 어느 한 서법을 취해서 오랫동안 익히면 반드시 그와 방불한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도량이 큰 대인이나 사고가 명석한 달인 선비쯤 되면 한 서가에만 얽매이지 않고 반드시 여러 대가의 서법을 겸해서 취하고 아울러 열람하며, 널리 의논하고 두루 생각함으로써 자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한 후에 비로소 터득하였다고 생각한다. 지금 옛날 제와 노 (지금의 산동성) 지방의 선비들은 오로지 이성만 모방하고, 관섬 (지금의 섬서성) 지방의 선비들은 오로지 범관만 모방하고 있다. 자기 혼자 배우는 것도 오히려 답습이라고 생각하거늘, 하물며 제.노와 관.섬은 그 둘레가 수천 리나 되는데 수많은 주와 현의 사람들이 사람마다 그렇게 제작한다면 되겠는가! 한 사람의 법만 배우는 것을 옛부터 병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창의성 없이) 일률적으로 나옴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말을 즐겨 듣지 않는 사람을 탓할 수는 없으나 그것을 듣지 않는 사람은 진부한 필적에 연유해서 (그러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사람의 이목은 새것을 좋아하고 묵은 것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은 감정이다. 내가 위에서 대인이나 달인 선비쯤 되면 한 예술가에만 얽매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유자후는 문장을 짓는 데 대해 잘 논술한 바 있는데, 나는 그것이 문장에 그치지 않고 만사에도 요결이 있어 모두 이 (유자후가 논술한 바)와 같이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그림에 있어서랴!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하면, 무릇 한 폭의 풍경을 그리는 데는 크고 작은 것, 많고 적은 것을 막론하고 반드시 주의를 집중하여 정신을 통일해야만 한다. 주의가 집중되지 않으면 정신이 통일되지 않는다. 또 반드시 정신이 함께 작용하여 그것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정신이 함께 작용하여 그것을 이루지 않으면 사고가 익어가는 것이 명쾌하게 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반드시 엄격하고 진중하게 하면서 삼가하도록 해야 한다. 엄격하지 못하면 구도하는 생각이 깊게 되지 못한다. 또 반드시 각별히 신중하고 주밀하게 해야 한다. 각별하지 않으면 풍경이 완전하게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태만기가 쌓여 있는데도 억지로 작품을 만든다면 그 붓 자취가 연약하여서 명쾌하게 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의를 집중하지 않은 병폐이다. 또 만일 혼미한 기운이 쌓여 있는 데도 그것에 따라 부침하면서 그리면 그 모양이 어둡고 혼잡되어서 상쾌하게 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정신이 함께 이룩하지 못한 폐단이다. 또 가벼운 마음으로 희롱하듯이 그린 것은 그 외형부터 생략되거나 탈락되는 결함이 생겨 원만하게 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바로 엄격하고 진중하지 못한 폐단이다. 또 방만한 마음으로 소홀히 그린 것은 그 형체가 거칠고 정제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신중히 하지 못한 폐단이다. 그러므로 명쾌하지 못한 그림은 분해(分解,즉 區分)법을 잃은 작품이며, 상쾌하게 되지 못한 그림은 소쇄(瀟쇄,즉 淸潔)법을 잃은 작품이며, 원만하게 되지 못한 그림은 체재법(體재法)을 잃은 작품이며, 정제되지 못한 그림은 긴만(緊慢,즉 伸縮)법을 잃은 작품이다. 이러한 것들이 작가의 가장 큰 병폐이다. 그러나 알아들을 만한 사람에게나 더불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思)는 일상적으로 아버님께서 한두 점의 그림을 그리시는 것을 보았다. 어느 때는 그리시다가 내버려 두고 돌아보지도 않으시고 열흘이나 이십 일이 지나도 거들떠보지 않으신 적도 있었다. 두 번 세 번 깊이 생각해 보니, 이것은 뜻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뜻이 하고 싶지 않는 것이 어찌 이른바 태만기가 아니겠는가! 또 매번 흥을 타고 득의로 제작하면 만사를 모두 잊어버리셨다. 그러다가도 다른 일에 이르러 화의(畵意)가 어지러워 바깥사물에 흔들리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또한 버려두고 돌아보지 않으셨다. 그러나 내버려두고 돌아보지 않는 것이 어찌 이른바 혼미한 기운이 아니겠는가? 무릇 아버님이붓을 잡으시는 날이면 반드시 밝은 창가 깨끗한 책상에 좌우로 향을 피워놓으시고, 정제된 붓과 좋은 먹을 준비하시고, 손을 씻고 벼루를 닦으심이 마치 대단히 귀한 손님을 맞는 듯하셨다. 그리고 반드시 정신이 한가롭고 화의가 확정된 연후에야 그림을 그리셨으니, 어찌 이른바 감히 가벼운 마음으로 희롱하듯이 그린 것이라 하겠는가! 자신이 그것을 경영하셨는가 하면 또 그것에 통달하시고, 이미 그것에 보탰으면서도 또 그것을 윤색하셨다. 한 번하셔도 좋은데, 또 그것을 다시 하시고, 다시 하셔서 되었는데도 또 다시 하셨다. 매번 한 점의 그림을 그리실 떄마다 반드시 시작과 끝을 중복하심이 마치 엄중하게 적을 경계하듯 하신 다음에야 그림 그리기를 마치셨으니, 이것을 어찌 감히 이른바 방만한 마음으로 소홀히 그리신 것이라고 하겠는가! 세상일이란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예를 들면 모름지기 이와 같이 한 후에야 이룩함이 있을 것이다. 아버님은 나를 향해 매번 이와 같은 것에 관해 간곡하게 상세히 논급하셨으니, 어찌 내가 세상 다하는 날까지 받들어 수양하여 나아가는 도리로 삼을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꽃 그리기를 공부하는 사람은 한 그루의 꽃을 깊은 구덩이 속에 놓고 그 위에서 그것을 (부감법으로) 내려다보면 꽃의 사면을 (입체를 평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나무 그리기를 공부하는 사람은 대나무 한 가지를 가져다가 달밤에 하얀 벽에 그 그림자를 비추어 보면 대나무의 참다운 형태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하니 산수 그리는 것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무엇이 이와 다르겠는가! 대체로 몸소 산천에 나아가 산천의 참모습을 취한다면 산수가 지니고 있는 뜻과 법도(즉 경향성)가 보일 것이다. 실제 산수의 계곡은 멀리서 바라보고 그 형세를 취하고, 가까이 보아서 그 질(實)을 취해야 할 것이다. 실제 산수의 구름기운은 네 계절이 같지 않다. 봄에는 수증기가 위로 오르게 보이고, 여름에는 자욱하고 왕성하게, 가을에는 성글고 얇게, 겨울에는 어두컴컴하고 담담해 보인다. 그림에서는 그 대체적인 형상을 나타내되, 새겨놓은 듯이 명확한 형태를 그리지 않아야 구름기운의 모습이 생동하게 된다. 실제 산수의 안개 낀 모양도 네 계절이 같지 않다.봄 산은 담담하고 예쁘면서 미소 짓는 듯하고, 여름 산은 무르녹게 푸르러 흠씬 젖은 듯하며, 가을 산은 해맑고 깨끗해서 단장한 듯하고, 겨울 산은 참담하여 잠자는 듯하다. 그림에서 그 큰 뜻을 나타내고 각획한 것 같은 필적을 보이지 않으면, 안개 낀 경치의 형상은 바로 되는 것이다. 또 실제 산수의 비바람은 멀리 바라보면 알 수 있으나 가까이에서는 잘 보아 익혔더라도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일어나고 그치는 형세를 다 구명해낼 수는 없다. 또 실제 산수의 흐리고 갬도 멀리서 바라보면 다 알게 되지만, 가까이에서는 좁은 시야 안의 물상에만 사로잡혀 명암과, 나타났다 숨었다 하는 자취를 분명히 파악할 수 없다.
또 산속의 인물은 길이 있다는 표시이고, 산의 누각과 도관(道觀)은 뛰어난 경치라는 표시이며, 숲의 나무를 분명하게 하거나 가리우게 배치한 것은 원근을 구분함이요, 산의 계곡을 끊었다 이었다 한 것은 지세의 깊고 얕음을 구분한 것이다.
물에 나루터와 다리가 마련됨은 인간의 생활사를 나타내는 데 족하고, 물에 고깃배와 낚싯대가 보임은 인간의 의도를 나타내기에 족하다.
큰 산은 당당하게 뭇 산의 주인이 된다. 그러므로 주위에 산등성이와 언덕, 숲과 골짜기 등을 순차적으로 분포함으로써 원근과 대소의 수령이 된다. 그 형상은 마치 천자가 빛나게 남쪽으로 향하고 있고 모든 제후들이 조회하기에 분주하지만 조금도 (천자가) 거만하거나 (제후가) 배반하는 듯한 기세가 없는 것과 같다. 커다란 소나무는 꿋꿋하게 뭇 나무들의 지표가 된다. 그러므로 주위에는 온갖 덩굴과 초목들을 차례로 분포함으로써 이끌리고 의탁하는 자들의 장수가 된다. 그 기세는 마치 군자가 뜻대로 때를 만나 모든 소인들을 불러 일을 시키지만 (군자가) 세력을 믿고 능멸하거나 (소인이) 걱정하며 낙망하는 듯한 태도가 없는 것과 같다.
산은 가까이에서 보면 이러이러하고, 멀리 몇 리쯤 떨어져서 보면 또 이러이러하고, 멀리 십여 리쯤 떨어져 보면 또 그 정도로 이러이러하다. 거리가 멀어질 때마다 달라지므로 이른바 ‘산의 모양은 걸음걸음에 따라 옮겨진다’고 한다. 또 산의 정면은 이러이러하고, 측면 또한 이러이러하고, 뒷면 또한 이러이러하여서 볼 때마다 달라지므로 이른바 ‘산의 모양은 한면한면씩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산은 하나이면서 수십 수백의 형상을 겸하고 있으니, 이 점을 터득하지 않고서야 다 알 수가 있겠는가! 또 산은 봄 여름에 보면 이러이러하고, 가을 겨울에 보면 또 이러이러하니, 이른바 ‘사철의 경치가 같지 않다’고 한다. 또 산은 아침에 보면 이러이러하고, 저녁에 보면 또 이러이러하며, 흐린 때나 개인 때에 보면 또 이러이러하니, 이른바 ‘아침 저녁의 변하는 모습이 같지 않다’고 한다. 이와 같이 되면 산은 하나이면서 수십 수백의 산의 뜻과 모습을 겸한 셈이니, 이를 터득하지 못하면 궁구하지 못하는 것이구나! 봄 산은 안개와 구름이 끊이지 않고 감돌아 사람의 마음이 즐겁고, 여름 산은 좋은 나무들이 번성하여 그늘이 짙으므로 사람의 마음이 넓고 편안해지며, 가을 산은 해맑으나 낙엽이 흔들리고 떨어져 사람의 마음이 엄숙한 느낌을 갖게 되고, 겨울 산은 어둡고도 흐리고 눈비바람에 흙비로 (길과 골짜기가) 막혀 있어 사람의 마음이 적적해진다. 이러한 그림은 사람으로 하려금 산의 그러한 뜻이 생기게 하여 진짜로 이러한 산중에 자기가 있는 듯이 느끼게 되나니, 이러한 것이 그림의 ‘경치 밖의 뜻(景外意)’ 이다. 또 푸른 안개와 하얀 길을 보면 그곳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나고, 넓은 냇가에 석양이 비치는 것을 보면 실제로 바라보고 있는 듯이 여겨지며, 초세(超世)의 뜻이 있어 유거하는 사람과 산의 자연을 순유하는 나그네를 보면 거기에서 그들과 더불어 살고 싶고 암석에 의해 난 문이나 샘물과 돌들을 보면 거기서 마냥 놀고 싶은 생각이 난다. 이러한 그림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마음을 일으켜 마치 장차 실제로 그곳에 나아간 듯하게 되나니, 이러한 그림이 ‘의미 밖의 묘(意外妙)’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중국의 동쪽과 남쪽에 있는 산 중에 기이하고 빼어난 것이 많은 것은 천지자연이 동쪽과 남쪽만을 위해서 사사로이 (특별히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동쪽과 남쪽은 지세가 극히 낮아서 모든 물이 돌아와 모이는 곳으로 씻기면서 처음 노출되어 나온 곳이기 때문에 그 지반이 얇고 그 물은 얕으며, 그 산은 대개가 기이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높은 암벽이 많아 산세가 창공 밖으로 험준하게 쑥 솟아 있고, 천 길이나 되는 폭포가 안개와 구름 밖으로 날아 떨어지는 것이 마치 저 서북지방에 있는 화산 (의 폭포)과 같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천 길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화산과 같은 것은 드물다. 비록 험하거나 삐죽한 봉우리가 둥그스름하게 큰 산이 간혹 있다 해도 역시 지상에서 나온 것이 많고 땅 속에서 솟아나온 것은 아니다.
서쪽 . 북쪽의 산은 대개가 걷잡을 수 없이 둥그스름하게 크나,  천지 자연이 서쪽 .  북쪽만을 위해 치우치게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다. 서쪽 . 북쪽의 땅은 지세가 극히 높아 수원(水源)이 발생하는 곳으로 묏부리와 언덕이 울퉁불퉁하게 묻혀 있다. 따라서 그 지형은 두텁고 그 물도 깊으며, 그 산은 대개 크고 작은 언덕들이 엎드려 덮치면서 천 리 밖까지 끊이지 않고 연이어 뻗어 있고, 작은 언덕은 정점이 있으면서 비스듬히 잇달아 있는데, 사방의 평야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숭산의 서쪽 봉우리인 소실(少室) 같이 깎아지른 듯이 높이 빼어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숭산의 소실 같은 부류는 드물다. 비록 깎아지른 듯 높이 빼어난 것이 있다 해도, 역시 대개가 땅에서 솟아나온 것이지 시상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숭산(嵩山)에는 훌륭한 시내가 많고, 화산에는 훌륭한 봉우리가 많으며, 형산(衡山)에는 유별난 산굴(山穴)이 훌륭한 것이 많고, 북쪽에 있는 항산(恒山)에는 열지어 있는 산굴이 훌륭한 것이 많고, 태산(泰山)은 특히 주봉이 좋다. 천태산(天台山), 무이산(武夷山), 여산(廬山), 곽산, 안탕산(雁蕩山), 민산(岷山), 아미산(峨眉山), 무산협곡(巫山峽谷), 천단(天壇), 왕옥산(王屋山), 임려산(林慮山), 무당산(巫堂山) 등은 모두가 천하의 명산 거악으로 세계적인 보물이 나오는 곳이며, 신선들이 은거하는 굴집인데, 참으로 기이하게 불끈 솟아 있는 (즉 위품있게 높이 솟아 있는) 모습은 그 오묘한 아름다움이 이루 다 궁구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신비스러운 조화를 빼앗으려 할 때는 좋아하는 것보다 더 신통한 것이 없고 삼가며 부지런히 하는 것보다 더 전일(專一)한 것이 없으며, 한껏 완유하고 실컷 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렇게 하면 산수의 안팎 모양이 마음속에 뚜렷이 나열되어, 눈에 비단바탕이 보이지 않고 손에 붓과 먹이 잡혀있는지 모르면서 그 산수의 호탕하면서도 넓고 아득하게 아롱아롱한 광경이 이미 자기 그림으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이는 당나라 스님인 회소(懷素)가 밤에 가릉강(嘉陵江)의 물소리를 듣고 초서(草書)가 더욱 아름다워졌고, 장욱(張旭)은 공손대랑(公孫大랑)의 서하검기(西河劍器) 춤을 본 후 필세가 더욱 준수해진 이치와 같은 것이다.
요사이 붓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우선 수양한 바가 확충되지 못하고, 관람한 바가 원숙하지 못하며, 경험한 바가 풍부하지 못하고, 학습한 바가 정수하지 못하면서 그저 종이를 얻어 벽에 걸고 이내 수묵으로 빨리 그려버리는 형편이니, 무엇으로 뽀얗게 피어 오르는 안개 밖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경관을 거두어 담을 수 있겠으며, 계곡과 산꼭대기에서 일어나는 흥취를 상기하며 그릴 수 있겠는가! 뒤에 내가 부질없이 이야기해본다면 그 병통을 열거할 수는 있겠다.
‘수양한 바가 확충되지 못하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근자의 화가가 그린 <인자요산도 仁者樂山圖 (인자가 산을 좋아하는 그림)>가 있는데 한 늙은이가 산봉우리 곁에서 턱을 받치고 쳐다보는 것을 그렸고, <지자요수도 智者樂水圖 (지자가 물을 좋아하는 그림)>는 한 늙은이가 바위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물소리를 듣는 시늉)을 그렸는데, 이것들은 바로 수양한 바가 확충되지 못한 병통이다. 대체로 <인자요산도>는 백낙천(白樂天)의 <초당도草堂圖>처럼 산에서 즐겨사는 뜻이 넘쳐 자족한 듯해야만 하고, <지자요수도>는 왕마힐(즉 왕유)의 <망천도輞川圖> 저럼 수중에서의 즐거움이 마냥 흡족한 듯해야 마땅하거늘, 인자 . 지자가 즐기는 바가 어찌 한 늙은이의 간단한 형상만으로 그것을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또 ‘관람한 바가 원숙하지 못하다’란 무슨 말인가 하면, 근자의 화공들이 산을 그리는 것을 보면 봉우리가 셋이나 다섯에 불과하고, 물을 그린 것은 파도가 세 가닥이나 다섯 가닥에 불과하다. 이것은 관람한 바가 원숙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병통이다. 대체로 산을 그리는 경우 높은 것, 낮은 것, 큰 것, 작은 것들이 앞에서 넘쳐흐르는가 하면 뒤에 자질구레하게 흩어져 있어야 하고, 조회(朝會)에서 머리를 숙여 서로 읍하는 듯하여서 그 형체가 혼연히 상응하게끔 그리면 산이 아름답다는 뜻을 충족하게 될 것이다. 물을 그리는 경우 가지런하게 흐르는 것, 부침하는 것, 파도가 소용돌이치다가 나르며 격동하는 것, 끌리어 길게 펼쳐지는 것 등 그 모양이 완연히 자족한 듯이 그리면 물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풍족하게 될 것이다.
또 ‘경험한 바가 풍부하지 못하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근세의 화가들은 오 . 월에서 태어난 사람은 바로 자기 지방인 동 . 남쪽 지방의 그 홀쭉하게 솟아오른 산을 그리고, 함진 지방에서 사는 사람은 역시 그 지역인 관중(關中: 섬서성의 지명)과 롱(감숙성)의 장엄하고 험준한 모양의 산을 본뜬다. 범관을 배운 사람은 영구 (즉 이성)의 빼어나게 고운 수법이 결여되어 있고, 왕유를 스승으로 삼은 사람은 관동의 풍치있는 골격의 솜씨가 결여되어 있다. 대개 이 같은 종류는 그 허물이 경험한 바가 풍부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또 ‘학습한 바가 정수하지 못하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천리의 산이 모두 기이한 경치가 될 수 없을 것인데, 만리의 강이 어찌 모두 빼어난 경치가 될 수 있겠는가? 태행산은 화북 지방을 가로질러 있을 만큼 크지만 그의 면목이 되는 것은 지맥인 임려산이요, 동쪽에 있는 태산은 제와 노지방 (산동성 전역)을 점유하고 있지만 경치가 빼어난 절경은 용암 부분뿐이다. (그러함에도 要所를 취하지 않고) 그저 개괄적으로 그린다면 지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릇 이러한 종류는 그 허물이 학습한 바가 정수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험준한 것에만 전념하면 소산한 것을 잃기 쉽고, 그윽하고 한가함( 즉 고요한 깊은 골짜기)에만 전념하면 엷은 것(또는 다가오는 것)을 잃기 쉽고, 인물에만 전념하면 속(俗)을 잃기 쉬우며, 누각과 도관에만 전념하면 잡스러운 것에 빠지기 쉬우며, 돌 그리는 데만 전념하면 뼈가 튕겨져 나온 것같이 되고, 흙땅 그리는 데에만 전염하면 살집이 많은 것같이 된다. 붓 자취가 융화되지 못하고 섞여 있는 것을 ‘소(疎)’ 라고 하는데 소하면 진실한 의취가 없게 되고, 먹빛이 젖었으나 윤기가 나지 않는 것을 ‘고(枯)’라고 하는데 고하게 (먹색이 마른 모양이)되면 생동하는 뜻이 없게 된다. 물이 졸졸 흐르지 않으면 그것을 ‘죽은 강’이라 하고, 구름이 자유자재로 유동하지 못하면 그것을 ‘언구름’이라 하며, 산에 명암이 표현되지 않으면 그것을 ‘햇빛과 그림자가 없다(無日影)’고 하고 산에 숨겨져 있는 부분과 드러나 있는 부분이 없는 경우 그것을 ‘안개와 아지랑이가 없다(無煙靄)’고 말한다. 산에 해가 비치는 곳은 밝고, 해가 비치지 않는 곳은 어두운 법이다. 산은 해 때문에 그늘 지는 것이 정상적인 형상인데, 밝고 어두움이 분간되지 않으므로 ‘무일경’ 이라고 한다. 지금 산에 안개와 아지랑이가 낀 곳은 숨겨져 있는 부분이 되고 안개와 구름이 끼지 않은 곳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되는 법이어서, 산은 안개와 아지랑이와 관계가 있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이다. 숨겨져 있는 부분과 드러나 있는 부분이 분간되지 않으므로 ‘안개와 아지랑이가 없다’라고 말한다.
산은 큰 물체이다. 그 형상이 솟아 빼어난 듯, 거만한 듯, 조망이 넓직하여 툭 터져 있는 듯,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듯, 다리를 펴고 앉아 있는 듯, 둥그스름하게 큰 듯, 웅장하고 호방한 듯, 정신을 전일하게 한 듯, 엄중한 듯, 눈이 예쁘게 뒤돌아보는 듯, 조회에서 읍하고 있는 듯, 위에 덮개가 있는 듯, 아래에 무엇을 타고 있는 듯, 앞에 의거할 것이 있는 듯, 뒤에 기댈 것이 있는 듯하게 해야 한다. 또 아래로 조감하면서 마치 무엇에 임해서 보는 듯하게 해야 하고, 아래에서 노닐면서 마치 무엇을 지휘하는 듯하게 해야 이것이 곧 산의 대체적인 모습이다.
물은 활동하는 사물(活物)이다. 그 형상이 깊고 고요한 듯, 부드럽고 매끄러운 듯, 넓고 넓은 듯, 빙빙 돌아 흐르는 듯, 살찌고 기름진 듯, 용솟음치며 다가오는 듯, 격렬하게 쏘는 듯, 샘이 많은 듯, 끝없이 멀리 흘러가는 듯하게 해야 하고, 또 폭포는 하늘에서 꽂히는 듯 하고, 급히 흘러 부딪히며 떨어져 땅 속으로 들어가는 듯, 고기 잡고 낚시하는 광경이 평화로운 듯, 초목이 무성해서 이들이들한 듯, 안개와 구름이 끼어 빼어나게 고은 듯, 계곡에 햇빛이 비치어 찬란한 듯하면, 이것이 곧 물이 활동하는 모습이다. 산은 물로써 혈맥을 삼고, 덮혀 있는 초목으로 모발을 삼으며, 안개와 구름으로서 신채(神彩)를 삼는다. 그러므로 산은 물을 얻어야 활기가 있고, 초목을 얻어야 화려하게 되며, 안개와 구름을 얻어야 빼어나게 곱게 된다. 물은 산을 얼굴로 삼고, 정자를 (얼굴에서 제일 비중이 큰) 눈썹과 눈으로 삼고, 고기 잡고 낚시하는 광경을 그 정신(意趣)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물은 산을 얻어야 아름답게 되고, 정자를 얻어야 명쾌하게 되며, 고기 잡고 낚시하는 광경을 얻어야 정신이 넓게 펴져 환하게 된다. 이것이 산과 물을 (회화에서) 포치 (즉 배치)하는 양상이다.
산에는 높은 산도 있고 낮은 산도 있다. 높은 산은 혈맥인 물줄기가 아래에 있고, 그 모양이 마치 어깨와 다리를 한껏 벌리고 있는 듯하며, 산밑 언저리는 장대하고 두텁게 퍼졌으며, 그 주위에는 봉우리들과 산굴, 둥그스름한 형세의 작은 언덕들이 감싸안는 듯이 서로 굽히면서 연결되어 있고, 빛깔이나 경치가 서로 비치고 어울림이 끊임이 없다. 이것이 높은 산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된 높은 산을 일컬어 ‘외롭지 않다’고 말하고, ‘엎드려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낮은 산은 혈맥인 물줄기가 위에 있고, 그 정상은 반쯤 떨어져 나갔으며, 목 줄기에 해당하는 부분이 서로 연이어 있고, 산의 하부가 높고 방대하게 크며, 흙산이 울퉁불퉁하고 곧장 아래로 깊게 박혀 있어, 그 깊고 얕음을 측량하기 어렵다. 이것이 얕은 산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된 낮은 산을 일컬어 ‘지형이 수척하지 않다’고 하고, ‘새어버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높은 산이면서 외로운 것은 그 몸통이 엎드러질 이치가 있고, 낮은 산이면서 지형이 수척한 것은 산의 신기(神氣)가 새어버리는 이치가 있다. 이것이 산수의 이루어진 본새나 됨됨이이다.
바위란 천지의 뼈에 해당한다. 뼈인 바위는 단단하고 깊이 묻히어 얕게 드러나지 않는 것을 귀히 여긴다. 물이란 천지의 피에 해당한다. 피인 물은 두루 흐르되 엉기거나 막히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산에는 안개와 구름이 없다면 마치 봄에 화초가 없는 것과 같다.
산에 구름이 없다면 빼어나지 못하고, 물이 없다면 아름답지 않으며, 도로가 없다면 활기가 없고, 나무와 숲이 없다면 생기가 없다, 또 심원(深遠)이 없으면 얕게 보이며, 평원(平遠)이 없으면 가깝게 보이며, 고원(高遠)이 없으면 낮게 보인다.
산을 그리는 데에는 삼원법(三遠法)이 있다. 산 아래에서 산마루를 쳐다보는 것을 고원이라 하고, 산 앞에서 산 뒤를 넘겨다 보는 것을 심원이라 하며,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것을 평원이라고 한다 고원의 색은 맑고 밝으며, 심원의 색은 무겁고 흐리며, 평원의 색은 밝은 것도 있고 흐린 것도 있다. 또 고원의 형세는 우뚝하게 솟아있고, 심원의 뜻은 겹겹으로 쌓인 것이며, 평원의 뜻은 융화되어 있으면서 아득히 넓은 것이다. 삼원에 인물이 있는 경우 고원의 인물은 명료하고, 심원의 인물은 작고 자질구레하며, 평원의 인물은 해맑게 그려야 한다. 명료한 것은 (아래쪽에서 쳐다보는 것이므로) 짧지 않게 해야 하고, 작고 자질구레한 것은 길지 않게 해야 하며, 해맑은 것은 크지 않게 해야 한다. 이것이 삼원법이다.
산을 그리는 데도 3대 법이 있으니, 산은 나무보다 크고, 나무는 사람보다 커야 한다. 그러나 산은 수십 리가 안 되는데 나무의 크기와 같게 보이면 산이 크지 않은 것이 되고, 나무가 수십 백 보가 안 되는 데 사람의 크기와 같게 보이면 크지 않은 나무가 된다. 나무를 사람에게 비교하는 방법으로는 우선 그 잎을 이용하고, 사람을 큰 나무에 비교하는 방법으로는 우선 그 머리를 이용한다. 즉 나뭇잎 몇 개는 사람 머리의 면적과 필적하므로 사람의 머리는 나뭇잎 몇 개로부터 그리면 될 것이다. 그러한 즉 사람, 나무, 산의 대소는 이렇게 하면 모두가 정도에 맞을 것이다. 이것이 삼대법(三大法)이다.
산을 높게 그리려 할 경우 그것을 생긴 대로 전부 노출시키면 높아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안개나 아지랑이로 그 중턱을 가려 놓으면 높아 보인다. 또 물을 멀리 보이도록 그리려 할 경우 그것 그대로 전부 그리면 멀게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가리우고 비추이는 것이 있어서 그 물결을 잘라 놓으면 멀게 보인다. 대체로 산이 생긴 대로 전부 노출되면 빼어나게 뛰어난 높이가 없을 뿐더러 아울러 그저 방앗공이만 그린 것과 무엇이 다르겠으며, 물이 있는 그대로 전부 그린다면 굽이쳐 꺾어 돌면서 흐르는 먼 맛이 없을 뿐더러 아울러 그저 지렁이를 그린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비단 바탕의 정면에 시내와 산, 나무와 숲을 이리저리 꺾어 돌리면서 그 경개(景槪)를 배포하여 가도 그 상세함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눈이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려는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또 그 곁에 평원으로 뾰족하게 높이 솟은 산과 고개가 중첩하여 아득하게 구비구비 연이어 가도 그 멀게 표현한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눈이 널리 바라보고자 하는 욕구를 다 궁구해 주기 때문이다. 멀리 있는 산은 주름이 없고, 멀리 있는 물은 물결이 없으며, 멀리 있는 사람은 눈이 없다, 실제로 없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 같을 따름이다
[출처] 산수훈|작성자 진성수
 
2023/09/20 0 3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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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0 0 1 회화의 요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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