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8    업데이트: 21-07-26 12:31

강문숙의 즐거운 글쓰기

[강문숙의 즐거운 글쓰기] 처음 시를 쓰려고 하는 후배에게
아트코리아 | 조회 480
어느새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간신히 묻어두었던 사람이 그리워질 무렵, 또는 살면서 문득 무언가 표현하고 싶은데 가슴이 답답할 뿐 홀로 아득해지는 그 무렵… 그대는 ‘시’라는 아름답고도 고통스럽게 빛나는 별에게 손을 내밀고 있군요.

시의 정신이 아직도 진행형인 백석 시인은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흰 바람벽이 있어’ 중) 라고 썼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깊은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목마름의 실체가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내가 참 좋아하는 천양희 시인은 ‘저에게 시란 짐이면서 힘이고 괴로움이면서 기쁨입니다. 시를 쓸 때는 시가 짐처럼 느껴져서 굉장히 괴롭지만 한 편의 좋은 시를 얻었을 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삶’이라는 명사를 ‘살다’로 쓰게 한 것이 시였고 내 우울을 가장 오래 완성해 준 것도 시였습니다. 그래서 내 시는 삶에 대한 응시이자 발견이며 길 찾기입니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지요.

늘 그렇지만 문제는 ‘어떤 시를 쓰느냐’입니다.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삶에 대한 경의를 표하지 않는 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창작의 방법은 어떤 문제적인 개성을 가질 때 생명력을 얻습니다. 개성이 지시하는 것은 갈등이나 체험을 통해서인데, 경험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체험은 자기만의 경험이지요. 

또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눈은 관찰자가 되어야 하고 발은 나그네가 되어야 합니다. 가슴은 뜨거운 열정과 고요한 냉정을 아니, 고요한 열정과 뜨거운 냉정을 가지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고요.

이미 그대의 삶을 살아온 시간만 보아도 수많은 관찰자와 나그네의 궤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시처럼 살고 시인처럼 생각’하는 자각 없이 그냥 무덤덤한 성정으로서의 시간이었기에 그저 그렇게 지나간 것일 뿐입니다. ’

그러나 절대로 없어진 것이 아니지요. 지문처럼 내 기억의 바퀴를 따라 숨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쯤 그것을 끄집어내는 글을 쓰려고 한다면 지문을 찍을 때 손에 묻히는 잉크처럼 마음의 그림을 새기기 위해 영혼의 색깔을 찾아 나만의 어법으로 말해야 합니다.

언젠가 ‘자아 정체성’을 찾는 일이 바로 시 쓰는 일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겠지요. 끊임없는 습작만이 선명하게 지문이 찍혀 나오고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도 알게 되는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하죠.

세상 모든 선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종교도, 학문도, 과학도 인간을 배제하고서는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참 이기적인 동물인가요?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자신이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갈등하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그 지극함이 좋거든요. 그런 삶 속에서 이끌어낸 질문을 언어의 미학으로 답하는 것이 문학이라는 걸 현명한 그대는 이미 눈치챘으리라 믿습니다. 

시인·전 대구시영재교육원 문학예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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