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수 칼럼❘
이 시대의 현모양처
이 태 수<시인>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의 팔자는 뒤웅박 팔자’란 속담이 있다. 여자가 지나치게 나서서 떠들면 집안이 잘 안된다는 뜻과 여자는 남편에게 매인 몸으로 그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현모양처(賢母良妻)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삼아온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그만큼 여성의 사회활동을 금기시해 왔다.
현모양처는 ‘현명한 어머니와 어진 아내’를 의미하는 여성의 성별 역할을 핵심적으로 내재한 젠더론이자 여성론이다. 남성이 직업으로 국가 사회에 공헌한다면 여성은 가정 내에서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국가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임무라는 것이 중심 내용이다.
이 가치관은 실질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성별 역할을 정당화시키는 핵심적 기능을 해왔다. 현모양처라는 용어는 문명개화라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도입된 근대적 여성교육론이다. 초기에는 근대적 여성 교육의 수혜를 받은 새로운 여성상의 이미지가 강했으나 점차 현모양처에 전통의 색칠이 가해졌다. 한편에서는 합리적으로 가정을 운영하는 근대적 주부인 동시에, 동양적 부덕을 갖춘 여성으로 여겨지고 있다.
1920년대 초반에 태어났던 시인 김춘수(1922~2006)의 시 ‘강우(降雨)’가 문득 떠오른다. 만년에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양처를 그리워하며 쓴 시이기 때문이다. 이사할 때 요강만 들었다 놓았다 할 정도로 극진한 내조에 힘입어 가정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던 그로서는 아내가 없는 세상에서는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내가 없는 남자는 지붕 없는 집’이란 영국 속담도 있지만, 가정에서는 하숙생 같던 그에게는 아내가 지붕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나는 풀이 죽는다”
—김춘수의 ‘강우’ 부분
하지만 이젠 세태가 달라졌다. 현모양처를 성공한 여성으로 여기거나 남성들이 그런 여성을 원하던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이 무너지고 있다. 과거에는 여성들이 일과 결혼 중 하나를 선택했으며, 대체로 신사임당(申師任堂) 같은 아내상을 떠받드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여성은 물론 남성들도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두 마리 토끼 잡기’식 결혼생활을 선호하는 추세로 ‘슈퍼우먼형’을 이상적인 아내상으로 여길 정도다.
이 같은 가치관의 변화는 무엇보다 가정생활도 경제적인 문제가 최우선이라는 데서 오는 현상이다. 과거에는 우리 사회 분위기가 아내의 덕을 보며 사는 남편을 질시와 멸시의 대상으로까지 생각하는 경향이었으나, 남성들마저 이젠 경제력이 있는 여성을 선호할 정도로 달라졌다. 여권론자의 눈으로 보면 현모양처는 ‘여성이 남성의 종속적인 존재로 보는 데서 나왔다’고 하겠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남녀 구별마저 없어질는지도 모른다.
세계의 흐름이 그렇듯이, 우리나라에서도 날이 갈수록 여성들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이제 여성들이 ‘나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남성을 ‘주무르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사실 정치계, 법조계, 재계, 문단은 물론 스포츠나 군과 경찰에까지 여성들의 진출이 크게 늘어나는가 하면, 무슨 시험이든 여성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앞으로는 육체적인 힘보다 지적 능력이 중요해 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여성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고, 집에서 일할 수 있는 유연한 근무체제로 육아와 일의 병행도 가능해졌다. 게다가 유전공학의 발달로 출산의 개념에 큰 변화를 가져와 신체의 어떤 세포에서든 유전물질을 추출해 난자와의 수정이 가능해져 출산에 남자가 필요 없어질 수도 있으며,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낳을 수도 있는 세상이 됐다.
하지만 여성이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다 완벽하게 해내기는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남성에게 아내의 내조가 필요하듯, 밖에서 일하는 여성도 안정된 가정생활 여건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세상은 남편의 성공을 자신의 성취로 믿고 보람을 찾던 과거의 아내들처럼, 일하는 여성의 남편들도 아내의 성공을 자기 자랑으로 알고 도와주는 시대가 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