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수 칼럼❘
“아직도 시 써요?”
경북신문 2025. 5. 14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아직도 시 써요?”라고 묻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시 쓰는 일밖에 별로 하는 일이 없다고 대답하고 나면 기분이 묘해지곤 한다. 시만 써서는 현실적으로 살기 힘든 건 어제오늘이 아닌 데다 생업을 그만두게 된 지도 오래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업 시인으로 살아가려고 마음먹은 이후 오로지 이 외길을 걷고 있는 건 사실이다.
시가 ‘따뜻한 빵(밥)’은 되어주지 않는다. 전업 작가로 입신한 경우는 더러 있지만 시만 쓰면서 살았거나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태백이나 두보 같은 동양의 시성으로부터 서양의 현대 시인 엘리엇이나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시인들이 시업 이외의 생업을 병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문사에서 34년간 일했고, 그 마지막 10년 조금 넘게 대학 겸임교수를 지내고 강사 노릇도 했다.
다만 생업도 시 쓰는 일과 비교적 연관성이 있는 일들만 택했던 것 같다. 언제나 시를 가치관의 중심에 두면서도 그 생업에 게을리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문사 일을 마감하면서는 아침부터 출근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작정했고, 권유가 더러 있어도 마음을 바꾼 적이 없고, 문학과 연관성이 없는 일은 일절 하지 않으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외로운 길을 자초한 셈이나 후회한 적은 없다. 경제적으로 다소 어렵고 외로우며 쓸쓸한 길일지라도 잊고 있었거나 거리가 떨어져 있는 나를 찾아 나서고 그런 나와 더욱 가까이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만 줄곧 해왔다.
설상가상 지난날과도 달리 시의 현실적 입지가 약화되고 밀려나는 현상도 날로 가속화되는 형편이다. 시가 커뮤니케이션의 기능도 어느 정도 했지만, 전자매체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산되면서는 가상 현실이 현실의 영역으로 확대되고 상상의 시공을 위축시키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추세다. 이 때문에 시적 상상력의 자장이 줄어든 반면 확대된 현실의 온갖 폭력이 시의 언어를 유린하는 지경이다.
이제 시는 어쩌면 상대방을 전제로 하지 않고 메시지 전달을 기대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절대적 고백’에 접근하는 언술 행위가 돼가는 느낌마저 없지 않다. 게다가 요즘은 시를 읽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어도 시를 쓰는 사람(특히 노년층)이 늘어나는 기현상이 빚어지고 있기도 하다. 나이가 들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은 마음의 빈자리에 ‘절대적 고백’의 공간을 만들고 싶어 하는 탓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숙명과도 같이 숫자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살아야 한다. 생년월일이 결정되고 주민등록번호가 생기며 주소의 번지와 우편번호, 학번, 전화번호, 은행 계좌번호, 자동차 등록번호 등 수많은 번호와 더불어 살아간다. 그런가 하면, 월급이나 연봉이 얼마라는 숫자(액수)에 얽매여 숫자로 계량된 시간을 보내는 등 숫자놀이를 하며 숫자에 매여 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문학(시)은 숫자의 정확성과 실리와는 거리가 멀다. 허황해 보일 수도 있는 문자의 상징성에 무게가 실린다. 일차 생산과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생활인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다. 더구나 이제는 효용성과 직결되는 큰 소리로 말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해야 할 정도다. 그런데도 왜 이 낮은 목소리가 오랜 역사를 두고 인간들이 간직해온 특유의 언술 방식으로 여전히 연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이 이 삭막한 시대에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보다 조그마하고 보잘것없어 보일 수도 있는 풀꽃이 어쩌면 우리의 본래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까. “자세히 보아야/예쁘다//오래 보아야/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세 연에다 단 다섯 행의 이 짧은 시는 풀꽃의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극대화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행 “너도 그렇다”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결정적인 마력을 발산한다.
뜬금없을지 모르나 사람도 시도 풀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보잘것없지만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그 진가가 보일 수 있다. 시의 그런 진가와 함께 ‘참나’를 찾아 나서고, 사람들에게 그런 눈을 뜨게도 해주는 일이 주어져, 어쩌면 스스로 ‘시마’에 사로잡혀서, 이 길을 멈추지 않고 나서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