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수 칼럼❘
긍정적인 사고부터 먼저
이 태 수<시인>
“공포라는 감정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걸까. 그 무엇이 우리를 긴장시키고, 두렵게 하는 것일까.” 셰익스피어 원작의 오페라 ‘리어왕’에 나오는 주인공이 내뱉는 독백 한 토막이지만, 사실 우리는 어쩌면 날이 갈수록 ‘두려움의 문화’에 익숙해지고, 그런 의식 자체가 체질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오래전의 그림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공포 분위기를 극대화해서 미술사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핏빛 하늘, 유령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배경, 동그랗게 뜬 눈과 홀쭉한 뺨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인간, 외마디 비명이 들리는 듯한 분위기...
노르웨이 출신 화가 뭉크(1863~1944)는 평생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주제로 강렬한 색채와 극단적이고 과장된 표현 방법을 구사했던 화가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절규’는 19세기 말 상징주의 결정판이자 20세기 표현주의 화풍에 큰바람을 일으켰다. ‘현대인의 정신적 고뇌’, ‘생의 공포’, ‘산업화에 대한 비판’, ‘인간 내면의 절망적 심리상태’라는 다양한 평가를 낳기도 했다.
독일의 일간지 ‘빌트’는 언젠가 “기존의 이러한 해석은 매우 잘못이며, 작품 탄생에 얽힌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보도한 바 있다. 1983년 8월 27일 인도네시아의 섬 크라카타우에서 대규모 화산 폭발로 인한 해일 때문에 3만6천여 명이나 사망했으며, 마그마와 화산암이 뭉크가 살고 있던 노르웨이에서도 관찰돼 그 참상을 10년 뒤 화폭에 옮겼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뭉크의 ‘절규’가 당시의 자연재해를 형상화한 그림이라 하더라도, 공포감의 표현임에는 틀림이 없다. 표현주의 화풍에 바람을 일으킨 현대인의 정신적 고뇌나 내면 심리, 사회에 대한 비판의 표현이 아닐지라도 작가가 체험한 공포감의 산물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공포의 문화는 멀어졌으면 하는 마음 새삼 간절해진다. 그 문화는 끊임없이 근거 없는 불신과 적대감을 조장하고 파국을 재촉하는 ‘무서운 흉기’에 다름 아니다. 어떤 유형이든 공포감은 물론 남을 저주하는 분위기도 반드시 극복돼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서에 따르면 인간의 저주는 카인에서 비롯됐다. 이브의 아들인 그는 항상 경쟁 관계였던 동생 아벨을 저주한 나머지 죽이고 만다. 그때 여호와는 카인을 낙원에서 추방하면서 “너는 저주를 받으며 이 땅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땅은 네 동생의 피를 빨아먹었으니.”라고 했다. 역사의 기록에도 저주를 통해 행복을 얻은 사람은 없다. ‘저주’라는 운명의 쇠사슬에 얽혀 결국 스스로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새겨봐야 한다.
별다른 이유 없이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화풀이 범죄 등 ‘카인’식 저주를 넘어서는 범죄들도 이따금 발생하고 있어 우리 사회를 불안하게 한다. ‘묻지 마’식 범죄는 현실의 어려움을 자기 탓보다는 사회나 타인의 몫으로 떠넘기는 데서 비롯되게 마련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는 구성원 사이의 갈등을 키울 뿐 아니라 불특정인을 향한 막연한 분노의 표출에 따르는 ‘묻지 마 범죄’를 비켜서기 어렵게 한다. 한 사람의 순간적인 분풀이 심리나 적대감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끼치는 재앙의 넓이와 깊이는 가공할 정도로 확대되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공포나 저주의 심리에서 벗어나 겸허하게 ‘내 탓’부터 들여다보는 마음가짐이 요구되고 있다. 윤리‧도덕의식 회복과 나눔과 베풂의 정신, 올바른 가치관의 확립이 이를 받쳐주어야만 한다. 특히 올바른 가치관은 긍정적인 사고에서부터 출발이 돼야 한다.
물이 반 잔 남았을 때 ‘반 잔밖에 남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과 ‘아직도 반 잔이나 남았다.’고 하는 생각의 차이는 매우 크다. 행복과 불행은 바로 그런 시각과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되며, 어떤 연습을 하느냐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행복을 찾아 헤매다 돌아와 보니 바로 그 자리에 있더라는 칼 뷔세의 시 ‘산 너머 저쪽’이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들이 미래에의 희망을 품게 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도층부터 달라지고,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들이 나눔과 베풂의 정신, 상대적 박탈감과 증오심을 함께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에 입각한 윤리와 도덕의 확립, 사회 보장제도의 정비도 그 관건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