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수 칼럼]
자작시 ‘이슬방울’에 대해
어떤 분이 시 ‘이슬방울’에 대한 풀이를 해달라고 해서 이 지면을 통해 화답해 보려고 한다. 시는 쓰기까지는 시인의 몫이지만, 발표된 이후에는 독자의 몫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의도로 쓰였든 읽는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여도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쓴 사람의 의도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그 시는 더욱 바람직한 공감대를 얻게 되기도 한다.
나는 한동안 내 마음이 만들어낸 작지만 아름다운 세계를 시적으로 형상화해보려고 다각적인 시도를 했으며, 빈번하게 작지만 맑고 깨끗한 이슬방울이나 물방울 등을 끌어들여 마음을 투영하는 시를 빚었던 것 같다.
거의 동시에 썼던 시 ‘낮에 꾸는 꿈’에서는 서정적 자아가 한없이 작고 낮아진 상태에서 물방울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 둥글고 빈 곳에서 투명해지는 말들을 만나는 세계를 떠올리면서 그 신성한 언어를 노래한 바도 있다.
‘이슬방울’은 꿈꾸는 바 신성한 언어의 발견이 삶의 비애와 마주치는 아픔을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그려보려 했으며, 그런 마음의 그림 그리기의 한 본보기라고도 할 수 있다.
풀잎에 맺혀 글썽이는 이슬방울
위에 뛰어내리는 햇살
위에 포개어지는 새소리, 위에
아득한 허공.
그 아래 구겨지는 구름 몇 조각
아래 몸을 비트는 소나무들
아래 무덤덤 앉아 있는 바위, 아래
자꾸만 작아지는 나.
허공에 떠도는 구름과
소나무 가지에 매달리는 새소리,
햇살이 곤두박질하는 바위 위 풀잎에
내가 글썽이며 맺혀 있는 이슬방울.
—자작시 ‘이슬방울’ 전문
맺혀서 글썽이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이슬방울은 최상의 상태를 스스로 만들고 있으면서도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다. 그래서 새벽빛을 머금고 있는 이슬은 종교적인 성스러움과 생의 덧없음이라는 상징성을 동시에 부여받게 되기도 한다.
자연의 사물들이 상호 조응하는 세계 안에서 글썽이며 맺혀 있는 이슬방울은 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의 그 ‘둥글음’의 다른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슬방울과 ‘내’가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지만 실제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할 따름이라 비애가 커질 수밖에 없다.
‘이슬방울’의 첫 연에서 그린 것처럼 이슬방울은 그 위에 햇살이 뛰어내리고 새소리가 포개어지며, 위에는 또 아득한 허공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슬방울―햇살―새소리―허공’이라는 사물과 그 무엇들이 ‘상승’의 체계를 이루며, 이들은 깊은 함수관계를 가진다. 그 관계 속에서 이슬방울은 어쩌면 하잘것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다음 연에서는 그 허공 아래 구겨지는 구름 조각이 있고, 몸을 비트는 소나무들과 무덤덤 앉아 있는 바위가 있으며, 그 아래 작아지기만 하는 ‘나’가 자리잡는다. ‘구름 몇 조각-나무들-바위―나’는 ‘하강’의 질서를 만들면서 역시 상호 깊은 함수관계를 유지한다.
나아가 이 두 가지의 사물의 수직적인 연계는 마지막 연에서 다시 ‘허공―구름’, ‘소나무―새소리’, ‘햇살―바위’, ‘나―이슬방울’의 수평적인 접속으로 완성된다. 문학평론가 이광호의 지적대로 ‘여기에는 자연 만물들의 상생적인 관계가 응축’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궁극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건 맑고 투명하지만 작게 맺혀 글썽이는 이슬방울이며, 그와 같은(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나’다.
이 시에서는 마지막 행, “내가 글썽이며 맺혀 있는 이슬방울”에서의 ‘나’와 ‘이슬방울’은 하나가 되며, 그런 상태를 꿈꾼다. 이 순간에 ‘이슬’은 이 시의 대상이 아니라, 진정한 주체로 변용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슬방울은 소멸 앞에 놓인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이 시에서는 그 같은 아름다움의 절정과 그 순간이 품고 있는 비애를 아프게 노래하려 했다. 그것이 설령 이 세상에서 가장 지고지순하다고 하더라도, 절정의 순간은 바로 소멸 앞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찬연한 순간을 깊이 끌어안으면서도 그 유한성을 아프게 일깨우려 한 것이 이 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