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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평론

문학전문지 《서정과 현실》 2025년 하반기호
아트코리아 | 조회 223

 문학전문지 《서정과 현실》 2025년 하반기호
 
선연한 인간의 무늬를 새겨가는 한 생애
⎯이태수 시인의 시세계
 
박진임(문학평론가)
 
조선시대 정도전의 『삼봉집 권3』, 『도은문집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난다. “해와 달과 별은 하늘의 무늬이고, 산과 내와 풀과 나무는 땅의 무늬이며,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은 인간의 무늬이다.” 정도전의 말을 빌어 설명하자면 시인은 인간의 무늬를 그리고 새기는 탁월한 존재이리라. 가장 선명한 무늬가 또렷이 떠오를 때까지 그 역사役事를 멈추지 않는다.
시, 서, 예, 악이 사라지고 없다면 사람 사는 곳은 해도 달도 뜨지 않는 암흑의 하늘 아래, 산도 내도 풀도 없는 사막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 모래바람 속을 줄지어 걸어가는 쌍봉낙타들처럼 터벅터벅 걷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시를 짓고 글을 쓰며 노래하고 춤추고, 그러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사와 분별을 지키는 곳, 그곳 하늘에는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달이 뜨면 별들도 돋아나와 달을 호위한다. 그 하늘 아래에서 산은 솟아 의젓하며 그 품에 어진 나무들을 거느리고 나무의 덕은 다시 풀이 무성히 자라날 수 있게 돕는다.
이태수 시인은 하늘과 땅의 무늬를 유심히 살피며 시를 써서 인간의 무늬를 그리고 새겨왔다. 그러는 사이 수 없는 해와 달이 뜨고 지고, 산과 내가 서로 얼려 노래하고, 풀과 나무는 싱그러운 쉼터를 마련해주었을 터이다. ‘하늘과 땅의 무늬를 닮은 인간의 무늬를 그리며 한 생을 보내는 시인’이라고 이태수 시인을 이름 지어 본다.
그의 텍스트들은 조선시대 도자기를 닮아있다. 조촐하고 소박한 텍스트의 무늬들은 조선백자가 고려자기 비취 청자의 빛을 떠나 백색으로 변화해가는 과정들을 보여주는 듯하다. 처음엔 푸른 기를 띠고 있다가 조금씩 노르스름한 기운 머금은 백색을 보이다가 결국은 청아한 달항아리의 순백색에 이르기까지, 미묘한 색감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백하고 순수하며 금빛 은빛 장식 무늬를 지니지 않았다는 점이 고려와 조선 도자의 공통된 성격이듯 이태수 시세계에 번쩍이는 빛을 지닌 무늬는 없다.
독 안에서 차츰 익어가는 감처럼, 처음엔 푸르고 싱그럽다가, 순수의 떫은 맛도 머금었다가, 그예 말랑말랑하고 유순하게 익은 양을 찾아볼 수 있다. 하늘의 무늬와 땅의 무늬를 그러안고 독 안에 홀로 앉아 세월과 함께 결을 삭혀온 여정을 살펴보자.
 
담담해지고 싶다
 
말은 담박하게 삭이고
물 흐르듯이 걸어가고 싶다
 
지나가는 건 지나가게 두고
떠나가는 것들은 그냥 떠나보내고
 
이 괴로움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두 팔로 오롯이 그러안으며
 
모두 다독여 앉혀놓고 싶다
이슬처럼, 물방울처럼
 
잠깐 꾸는 꿈같이
—「잠깐 꾸는 꿈같이」 전문
 
삶이 잠깐 꾸는 꿈같이 덧없는 것임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채, 이태수 시인은 미리 고독의 의미를 명상하면서 자신의 항아리 안에 스스로를 담아둔 모습을 보여준다. 삶이란 잠깐 꾸는 꿈같이 덧없다고 노래하면서 햇살에 이슬이 사라지듯 가볍게 사는 삶을 기린다. 「나는 나와 논다」에서는 텍스트의 제목이 압축하여 제시하듯, 홀로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가는 자세로 한 생을 살아온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시인의 모습이 외롭게 보이지 않는 것은 새와 나무가 그 호젓한 풍경 속에 더불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둥근 달과 구름이 밤이면 나타나서 벗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나와 더불어 논다
잘 안 보이면 만날 때까지 찾아서 논다
언제나 내가 홀로 오지는 않는다
앞뜰의 작은 새들과 더불어 오고
새들이 지저귀는 나무들도 데리고 온다
나는 나무와 놀고 새와 논다
 
황혼 무렵에 술 생각이 나면
홀로 술잔을 기울일 때도 없지 않지만
술상을 떠났던 지기 몇몇이 오고
이태백이 달을 따서 오기도 한다
아득히 가버린 지난날들이 되돌아와서
술잔을 연신 기울이게 한다
 
그런 기억들과 한참 놀다가
가려 하면 가는 대로 놓아주기도 한다
홀로 왔다 홀로 가야 하는 길에
생각의 고삐 느슨하게 풀어놓고
둥근 달에 구름 가듯 가는 듯 마는 듯
나는 요즘 나와 더불어 논다
—「나는 나와 논다」 전문

이태수 시인의 텍스트에는 자연만이 아니라 인물도 더러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은 현실 속의 존재가 아니라 기억 속의 사람들이다. 이태백도 다시 만나고 오래전 함께 하던 벗들도 기억의 이름으로 재회한다. 이를테면 그의 텍스트에서 인물은 일종의 그림자이거나, 아니면 산수화의 원경에 해당하는 존재이다. 이태수 시인은 자연 속에 깃들여 살아가는 미덕을 노래하면서, 새가 노래하고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풍경을 자주 보여준다. 그 모습은 평화롭기만 하다.
밤이면 달이 뜨고 구름이 달을 가로질러 흐르고, 그 달과 구름 사이에서 이태백의 모습을 찾아 그와 내면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노라면 시선詩仙의 세계를 보는 듯도 하다. 어쩌면 이태수 시인은 시적 언어를 도구로 삼아 여덟 폭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를 꾸민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맑게 갠 산시 풍경 山市晴嵐
안개 낀 사찰의 저녁 종소리 煙寺暮鍾
어촌에 지는 저녁 노을 漁村落照
먼 포구에서 돌아오는 배 遠浦歸帆
소상강에 내리는 밤비 瀟湘夜雨
모래밭에 내려 앉는 기러기 平沙落雁
동정호의 가을달 洞庭秋月
겨울 강에 내리는 저녁 눈 江天暮雪
 
시인의 집 앞마당이 곧 중국 후난성의 소수瀟水이며 상수湘水인 것이며 그런 까닭에 이태수 시인은 이미 현실을 벗어나 이상향 속에 거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소수와 상수 일대의 산시나 어촌 포구나 모래밭을 대신하여 그 앞마당 나무에 철 따라 새순이 돋고 나무들은 자라 작은 동산을 이루고 그 동산에 녹음이 진해지고 그러다가 다시 단풍 들고 눈 내릴 것이며 사찰의 저녁 종소리를 대신하여 갖은 새들이 서로 다른 노래를 불러 줄 것이다. 동정호 비추던 달은 문득 앞마당 하늘 위를 유유히 스쳐 가고, 옛 기억을 안고 구름조차 거느리리라.
어찌 아니 그러하겠는가? 판소리 흥보가 ‘제비노정기’에서 보듯, 제비도 전라도 경상도 어느 어름, 흥보가 깃들어 사는 마을을 찾아오는 여정에서도 원포귀범遠浦歸帆이며 평사낙안平沙落雁을 고루 누리며 돌아오는데... “전라도는 운경이요 경상도는 함양인데 운경 함양 두 얼품에 그곳에 흥보가 사는지라” 구절을 상기해보자. 제비는 중국의 풍경을 물고 연경을 지나고 두만강을 거치고 평양 만월대를 거치고, 서울 칠패, 팔패, 배다리 위를 날아 결국은 전라도 경상도 산골짝 마을까지 복된 기운을 물어온다.
봄이면 봄마다 그러하였으니 한반도의 모든 존재에게 후난성이 대표하는 이상향의 꿈은 익숙한 것일 터이다. 지극히 고요하고 맑고 아름다운 풍경이 이태수 시인의 텍스트에서도 여덟 폭, 열두 폭으로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태수 시인은 홀로 자연을 벗 삼아 그 안에서 소요하며 기억 속의 옛 벗과 교유하고 옛 시의 정취를 되새긴다.
홀로 홍진을 떠나 고요한 풍경 속, 상상의 고을을 찾아 마음을 다스리노라면 그런 마음의 독 안에서 비로소 자유의 기운이 고이고 그 맑은 기운은 한 송이 꽃처럼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다. 세상은 언제나 가혹한 소식들로 파도치고 있을 터이지만 진정 자유로운 영혼은 그 파도에 휩쓸리지도 않고 삼켜지는 일도 없다. 홑겹 종이로 접은 종이배는 여울물을 따라 흐르다 바위를 만나면 잠시 멈출 뿐이다. 세월 또한 한때는 거대한 파도처럼, 바닷가 절벽에 가 스스로 부딪치며 포말로 깨어지곤 했을 터이다.
그러나 이태수 시인에게 세월이란 그저 저물녘에 선뜻 부는 신선한 바람 같은 것이다. 대적할 일도 없고 휩쓸릴 일도 없는 그런 대상이다. 그러므로 홀로 남아서도 우울에 젖지 않고 그윽한 눈길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혼자 있어도 혼자 같지 않은, 기억이 벗이 되어 여러 겹의 자아를 불러 모으니 진정 외롭고도 충만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연륜과 함께 성숙이 온다면, 단감처럼 무르익은 성숙한 삶이란 고독을 즐기고 고요의 시간을 꽃처럼 받들며 자족하는 삶일 것이다. 「꽃 한 송이」는 세월과 함께 사위어 가는 생명 속에서 오히려 더욱 찬란해지는 영혼을 필사한 텍스트이다.
 
마음 비운 자리에 꽃 한 송이 핀다
 
저 생명의 절정인 꽃,
 
비워서 차오르는 저 절정의 찰나를
 
처음이듯, 마지막이듯
 
깊이, 더 깊이 끌어당겨 그러안는다
 
이 찰나가 영원이듯,
 
영원이 바로 이 찰나이듯, 피어나는
 
절정의 꽃 한 송이
 
마음 내려놓은 자리에 그 꽃이 핀다
—「꽃 한 송이」 전문
 
이 텍스트에서는 이항 대립적이며 모순적인 요소들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함께 스스로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비워서 차오르는,” “처음이듯, 마지막이듯,” “이 찰나가 영원이듯”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비움이 곧 차오름이고 처음이 마지막이며 결국 찰나가 영원이 된다. 그 이항 대립이 해체되어 재구성되는 지점에서 “절정의 꽃”이 피어난다. 마음을 비운 곳에서 피어나는 꽃송이는 완벽한 모든 것을 대변하는 존재로 보인다. 공자 말씀에 “회사후소繪事後素”라 했으니 그림은 흰 바탕 위에 그려야만 한다. 바탕이 희지 않은 곳에서 색깔은 제 빛을 낼 수가 없다.
텅 빈 마음의 공간에 비로소 가장 찬란한 꽃이 제대로 피어날 수 있음은 텅 빈 달항아리가 빈 공간에 놓일 때 비로소 하나의 예술적 오브제(objet)가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속이 텅 빈 달항아리는 비어 있음으로써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그 달항아리에 물이 채워지면 물 항아리요, 쌀이 채워지면 쌀독이 될 것이지만 텅 비어 있을 때에 비로소 달빛으로 그윽해지는 달항아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달항아리는 나무 선반 위에 홀로 두어야 한다. 바람과 공기와 달빛과 벗할 수 있도록. 다른 그릇 사이에 섞어 두면 한 개 그릇에 불과해진다. 홀로 떨어져 앉아 명상에 잠길 때에만 그 항아리는 미술 작품이 된다. 그때 비로소 절정의 꽃에 해당하는 오브제가 된다. 시인의 모습도 그럴 것이다. 홀로 텅 비어서만 절정의 꽃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태수 시인의 신작들은 시인이 견지해온 삶의 자세가 변치 않고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륜이 늘어가면서 철학적 깊이를 더하기도 하고 더욱 승화된 영혼은 가벼운 기체가 되어 공기 중에 떠도는 듯도 하다. 달을 보고 구름을 보며 고독과 기억이 가져다주는 상승의 기운으로 가득 찼던 텍스트는 이제 세월의 흐름을 두고 하강의 기운을 동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목어木魚 울음」에 등장하는 목어는 이전 시편들에서 시인이 강조해오던 비움의 의미가 더욱 심화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해 질 녘 절집에서 퍼져 나오는 목어의 울음에 귀 기울이며 삶에 대해 명상하는 「목어木魚 울음」을 보자.
 
해 질 녘 절집에서 목어가 웁니다
무명을 흔들어 깨우려 빈 배로 웁니다
늘 그랬듯이 눈을 뜬 채
 
막대기로 두들겨 맞으며 웁니다
저 울음소리는 배 울림으로
무명을 밀어내고 깨우는 소리입니다
언제나 눈 뜨고 깨어나라고
눈 부릅뜨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허공이 무명의 바다라서
목어는 그 바다를 깨우려 나아갑니다
한결같이 제자리에서 나아갑니다
 
세상은 무명의 바다입니다
 
그 바다에 사는 우리는 눈을 뜨고서도
눈 감은 듯 깨어있지 못해
이 무명 속을 떠돌며 헤매고 있습니다
 
목어는 우리를 일깨웁니다
—「목어木魚 울음」 전문
 
“세상은 무명의 바다입니다” 구절에 유의해 읽어본다. 무명의 바다는 파도에 휩쓸리며 이리저리 부대끼는 중생의 모습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은유이며 그런 까닭에 다음 행에 등장하는 목어의 울음이 적절히 돋보일 수 있게 해준다. 육신의 눈을 뜨고서도 그 눈으로 진아眞我를 찾지 못한 채 “눈 감은 듯 깨어있지 못해 이 무명 속을 떠돌며 헤매고 있”는 존재들에게 목어는 온몸으로 울어 깨우침을 전달한다. 제 울음으로 맑은 전언을 실어 나른다. 바닷속을 떠돌면서도 눈 못 뜬 청맹과니 같은 존재들은 절집 처마에 매달린 채로도 맑은 눈을 뜨고 진리를 전파하는 목어와 대조를 이룬다. 세상 속에서 목어 울음에 귀 기울이며 시인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세를 가다듬고 있다. 오래도록 홀로 세월을 견디며 비우고 또 비워서 맑아진 영혼에게만 그 목어의 울음소리가 간절하게 들릴 것이다.
어쩌면 이태수 시인의 삶은 한 편의 시를 품고 또 한 편의 시를 꿈꾸며 강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유유히 흘러온 인생일지도 모를 일이다. 성숙한다는 일은 살아온 시간이 늘어날수록 더욱 신중해지는 일일 터이니 수많은 삶의 사연들은 안으로 삼키고 침묵에 익숙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다. 시인은 집을 나서서 걸어가면서 스쳐 가는 생각들을 스케치한다. 「강물이 흐르듯이」를 보자.
 
집을 나서 걷다 말고 발길 돌린다
어느새 마음 바뀌어 버리다니,
가려던 마음도 따라온다
 
대문 앞에 서니 또 마음이 바뀐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
그런 곳일는지 모르지만
대문도 떠미는 것 같아 돌아선다
 
누군가 내 앞을 지나쳐 걸어간다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고
앞서가는 이가 손짓한다
그래, 새길로 나서는 게 순리겠다
 
강가에 당도하자 강물이 일깨운다
낮게 낮게만 내려가라고
그래야 바다에 이른다고
채근하듯이 아래로 흘러가고 있다
 
가는 데가 어딘진 몰라도
낯선 길을 따라가 보려 한다
되돌아올지라도 강물이 흐르듯이
—「강물이 흐르듯이」 전문

강물이라면 산꼭대기에서 발원하여 바위에 부딪히며 굽이굽이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을 경험했을 터이지만 시인은 여전히 “가는 데가 어딘진 몰라도”라고 노래한다. 그러면서도 새길과 낯선 길을 선택하여 걷는다. 그리하여 삶은 언제나 새롭게 낯선 길을 떠나는 일임을 일깨워준다. 익숙한 길은 편하고 안전할 터이지만 삶은 매 순간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깨우친다. 낮게 낮게 내려가야 바다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텅 빈 곳에서 절정의 꽃이 피어난다고 노래했듯, 빈 배로 혼신의 힘을 쏟아 울음 우는 절집 목어의 가르침을 노래했듯, 시인은 한결같이 비우는 일을 강조해왔다. 낮게 내려가는 일도 결국은 비우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우는 일이란 결국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삶의 거추장스러운 모든 소도구들을 버리고, 집착을 버리고, 욕망도 버리고 낮게 낮게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다 보면 결국은 넓은 바다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바다에 이르면 강물은 더 이상 강물로 남지 않는다. 바다에 이르기까지가 강물의 생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이태수 시인은 한결같이 비우고 낮아지는 소박한 삶을 그리는, 일관된 시세계를 구현해온 시인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그러나 그처럼 단순하고도 소박한 삶의 미학을 늘 새로운 관점에서 탐구해온 시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잠깐 꾸는 꿈같이」에 드러나듯 삶의 덧없음을 일찍이 노래하였고 그러면서도 그처럼 짧은 삶이기에 비우고 또 비우며 낮아지고 더 낮아질 때 절정의 꽃을 피울 수 있다고도 노래했다. 집을 나서서 걷는 일도 강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멀리서 울려오는 목어 울음 소리에서 다시 삶을 명상하며 조용하고도 신중한 발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우리 삶을 완성하자고 노래한다.
이태수 시인의 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를 위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까닭 없이 길어진 삶의 시간대 위에서 앞선 시대의 사람들이 걸어가 본 적 없는 길을 오래도록 걸어가야 할 운명에 놓인 것이 현대인들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함께 느끼는 쓸쓸함과 막막함이 이태수 시인의 텍스트 편편에 깃들어 있다. “가는 데가 어딘지 몰라도” 어디론가 가야만 할 것 같아서 “집을 나서 걷다가는 발길 돌”리고 대문까지 돌아갔다가도 딱히 중단할 수도 없이 다시 발길을 떼는 모습은 많은 독자에게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그래서 가다가는 돌아서 보고 돌아섰다가는 그래도 다시 가는 발길들이 그의 텍스트를 가득 채우고 있다. “가는 데가 어딘진 몰라도” 가야만 하는 길, 아니 가야만 한다고 자신을 채근하게 하는 길, 가면서도 거듭 의심하면서, 또 그처럼 의심하는 자신을 단속하면서 가는 길…
소월은 「가는 길」에서 노래한 바 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소월은 그리운 님을 두고 길 떠나는 이의 흔들리는 마음을 길을 품은 풍경 속에 재현하고 있다. 젊은 날의 삶에서 길 가는 일을 재촉하거나 정지하게 하는 것이 님 향한 그리움이었다면 이제 그런 방황의 시간대를 오래 전에 지나온 연륜의 시인은 길 위에서의 새로운 망설임을 그려내고 있다.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은 「풀잎Leaves of grass」에서 자연 속을 거니는 시인 자신의 모습을 노래한 바 있다. 광활한 미국 대륙의 무성한 자연 속, 싱그러운 풀잎과 쾌적한 공기와 왕성한 생명력으로 흐르는 강물에 이끌려 이리저리 소요하는 젊은 미국인의 웅장한 기상을 노래했다.
이태수 시인은 그런 약동하는 젊음의 시간대도 스쳐온 다음, 다시 길을 나선다.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어쩌면 길 가는 일의 유일한 목적이자 이유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태수 시인의 텍스트에 드러난 발길들은 그처럼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발길이다. 그러나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그 발길들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의 모습을 가장 정직하게 그리는 시적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 새로 써 나가야 할 미답의 인생길을 헤쳐 나가는 성숙한 존재들이 천천히 걷고 있다.
강물 흐르듯 무심한 듯 자연스럽게 걷는다. 무수한 경험과 기억들이 많은 것들을 아름답게 반추하게 하지만 동시에 또 지나치게 의미 부여하는 자신을 단속하면서…목적지가 없기에 서두를 까닭도 없고, 중단하지 않을 터이기에 빨리 걸을 이유도 없이, 걷는 것을 위하여 걷는 그런 걸음도 있다. 그런 발걸음의 의미를 얻느라 한 생애를 보낸 것일까. 걷다가 장미를 만나면 소중한 추억을 장미 꽃잎에서 발견하고, 저물 무렵 절간에서 울려 퍼지는 목어의 울음 소리 들으며 무명의 시간대를 반추하고, 그러다 다시금 강물처럼 흐르리라 다짐하며 갈 길을 간다.
시인의 그러한 모습을 예사롭지 않게 여기고 자신과 동일시하는 독자들이 있다. 그런 독자는 시인의 텍스트가 하나의 거울임을 알고 있는 독자이다. 텍스트에 담긴 시인의 모습이 독자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또한 그 텍스트가 반영하는 자신의 모습이 동일한 텍스트를 경험하는 다른 수많은 독자들의 모습과 닮아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다. 미국 시인 빌리 콜린스(Billy Collins)가 한 말이 생각난다. 시를 읽는 것은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며 시가 주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시가 곧 거울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즐거움이라고 그는 언급했다.
 
시는 우리들의 면모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시는 또한 거울들의 방이기도 하여 그 방 안에서 독자는 그 시를 읽은 함께 읽는 동시대의 독자들이 시간 속에서 후진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The poem is a mirror in which we see an aspect of ourselves; it is also a hall of mirrors in which we see images of our fellow readers regressing into time p.12.
 
이태수 시인의 텍스트, 그 거울의 방안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스스로의 모습에 놀라고 있는 우리 시대 무수한 독자들의 얼굴이 보인다. 막연하게 짐작하던 상이 선명하게 등장하여 놀라와하고 두려워하면서 직면하기를 저어했던 표정이 생생하게 드러나서 놀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 거울의 방을 통과해야 한다. 압축 근대화의 시대에 생애의 많은 시간들을 보낸 까닭에 정형화된 삶의 방식에 익숙한 존재가 우리들이기에 과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거듭 자문해야 하기 때문이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묻고 또 물으며 새로운 방식으로 길을 떠나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태수 시인이 “가는 데가 어딘진 몰라도”라고 노래할 때 독자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갈지 몰라도 괜찮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안도한다. “낯선 길을 따라가 보려 한다” 구절에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얻는다. “되돌아올지라도 강물이 흐르듯이”에 이르러서는 위로와 함께 비로소 함께 길 떠날 준비를 한다. 강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흘러보리라 결심한다.
 
 
참고한 글
Billy Collins, 「Poetry, Pleasure, and the Hedonist Reader」, David Citino ed. The Eye of the Poet: Six Views of the Art and Craft of Poetry. Oxford UP, 2002.
 
박진임(문학평론가)
오리건 주립대학교 비교문학과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시카고 대학교 박사후과정 연구원, 스탠포드 대학교 풀브라이트 강의 교수, 남가주 대학교 객원교수를 지냈다. 2004년 『문학사상』으로 평론계에 등단했다. 저서 Narrative of the Vietnam War by Korean and American Writers (2007, Peter Lang: New York), 『비교문학과 텍스트의 국적』(2018: 소명출판), 『두겹의 언어』(2018: 고요아침), 『세이렌의 항해 (2019: 문학수첩), 『탄성의 시학』(2023: 황금알), 『시로부터의 초대』(2023: 문학수첩)등이 있다. 편저 『꽃 그 달변의 유혹: 박재두 시전집』 (2018: 고요아침), 『말 그 눈부신 빛깔: 박재두 산문전집』 (2021: 고요아침) 등이 있다. 현재 평택대학교 국제지역학부 미국학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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