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문(편집인)

언론계의 까마득한 선배인 이태수 시인이 몇 달 전 스물세 번째 시집 ‘마음의 길’을 내놨다. 1974년 등단해서 50년간 시인으로 활동했으니 이제는 원로시인이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평가해도 아무런 손색이 없다. 이번 시집까지 어림잡아 2년에 한 권씩 시집을 펴냈으니 일생을 시만 생각하고 살아왔음이 분명하다. 그는 일생을 훌륭한 기자로, 심오한 철학을 지닌 시인으로 살아오면서 선후배, 동료 문인과 언론인에게 칭송을 받아왔다. 시를 쓰면서도 평생 두세 권의 시집을 내기도 힘겨운 판에 스물세 권의 시집을 선보인다는 것은 이태수 시인이 얼마나 시에 진심인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가 청년 시절 바바리코트 깃을 흩날리며 나뭇잎이 떨어지는 경주의 숲에 나타났을 때 소년이었던 나는 그의 존재 자체가 황홀하다고 느꼈다. 타고난 외모도 중후했지만 당시 그는 이미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고 있는 젊은 시인이었고 잘 나가는 언론의 문화부 기자였다. 문학에 뜻을 두고 대부분의 시간을 시와 소설에 매몰돼 생활했던 내게 그는 성공한 문학인의 길을 걷는 전형적인 모델이었다.
그의 시집 ‘마음의 길’을 읽어나가다가 나는 문득 비감에 빠졌다. 그는 일상의 소소한 찰나도 놓치지 않고 깊은 성찰과 시적 상상력을 버무려 반짝반짝 빛나는 시를 만들어낸다. 이 세상의 많은 시인이 하는 일이다. 힘겹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작업이다. 하지만 시인이 밤을 새우며 만들어낸 이 금쪽같은 시들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읽힐까. 그리고 그 시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을까. 시나 소설이 ‘밥’도 되지 못하고 ‘혁명’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시대에 살면서 문학의 위상을 새삼스럽게 짚어본다. 허황하기 짝이 없이 떠도는 웹툰보다도, 귓바퀴에 얹혀 간드러지는 ‘도로또’ 4분의 3박자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시대의 문학은 도대체 어디쯤 있는 것일까.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에서 문학은 이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물신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모든 가치가 경제성장과 물질적 성과에 기대는 현상에 사회의 모든 노력이 일제히 쏠려 있다. 정치인들은 제1성으로 경제를 들먹인다. 경제와 외교, 국방과 민생을 얘기하다가 문화예술을 언급하는 정치인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자괴감이 들지만 이 문제는 우리만 겪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1960년대 영국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비틀즈의 ‘Eleanor Rigby’라는 노래를 들어보면 정답을 찾을 수 있다. 이 노래에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성당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일리노 릭비라는 노부인과 밤을 새워 설교문을 쓰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맥켄지 신부다. ‘Eleanor Rigby picks up the rice/In the church where a wedding has been. 일리노 릭비가 쌀을 줍는다/ 결혼식이 있었던 교회에서.’ 모두가 흥겹고 풍요로운 결혼식을 즐기고 흩어진 후 마당에 흩어져 있는 쌀을 줍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맥켄지 신부는 어떠한가. ‘Father McKenzie writing the words/Of a sermon that no one will hear. 맥켄지 신부가 글을 쓰고 있다/아무도 듣지 않을 설교문을.’ 여기에 한술 더 뜬다. ‘Look at him working, darning his socks/In the night when there's nobody there. 맥켄지 신부는 아무도 없는 밤에 양말을 꿰매고 있다.’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졌지만 정서적으로는 황폐해져 가던 1960년대 영국의 현실을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다. 비틀즈는 이 한곡의 노래에서 ‘돈이나 풍요가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960년대 영국은 산업화와 소비사회가 정점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비틀즈는 자신들의 고정 주제였던 낭만적 사랑 노래 대신 이 심각한 주제를 담은 노래를 만든 것이다. 일리노 릭비는 교회에서 사망했고 그녀의 장례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일리노 릭비 무덤에서 흙 묻은 손을 닦고 나오던 맥켄지 신부의 모습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물질에 휩싸여 살고 있는 이들에게 경고를 날린다. ‘From his hands as he walks from the grave/No one was saved/All the lonely people.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그의 손에서/아무도 구원받지 못했다/외로운 사람들 모두.’
문학으로도, 종교로도 정신적 구원을 받지 못하고 통장과 지갑이 두둑해질 때 위안을 받는 우리에게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다급하게 물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