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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평론

<계간문예 2025 겨울호-82>
아트코리아 | 조회 749
<계간문예 2025 겨울호-82>
 
 

작가특집
이태수
 
신작시 함월산含月山 외 4편
대표시 이슬방울 외 4편
나의 인생 나의 문학 실존, 현실, 초월, 관조
작가연보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19e81903.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35pixel, 세로 300pixel]
 
 
신작시 이태수
 
함월산含月山 외 4편

 
산은 달을 품고 나는 달빛을 품는다
이른 저녁 함월산을 내려오면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흔들리는 한 잎의
나뭇잎같이 달빛을 끌어당겨 품는다
산이 그윽하게 품어 안은 달은
어둠살에 묻히고 있는 나무와 풀들,
그 그늘들까지 은밀하게 다독이면서
무명無明을 흔들어 깨우는 걸까
산이 왜 달을 품는지도 알 것 같다
 
오후 느지막이 함월산을 오를 때는
나도 달을 품어보고 싶었으나
달을 품고 있는 산이 나를 품을 뿐
먼먼 옛적 기파랑*도 스쳐 지나갔다
그가 꿈꾸던 아름다운 세상이
달빛 너머로 보일 듯 말 듯도 했다
산이 품어 안은 달이 나무와 풀들,
내 마음도 일깨우는 것 같아
달빛을 품으며 느릿느릿 하산한다

*신라 때의 화랑
 
 
 
 
속‧달항아리
 
 
어둠이 밀리어오는 저녁 무렵에
남쪽 앞산 위에 보름달이 떠오릅니다
내 마음엔 달항아리가 뜹니다
 
창가에 앉아 달빛을 그러안고 있으면
빈 항아리 같은 마음이 환해집니다
 
비워두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보름간 달이 차오르는 동안에는
마음을 비워내려고 안간힘 썼습니다
 
비우면 차도 밀어내고 비워냈습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은 흔들렸지만
흔들리며 중심을 잡았습니다
 
기다려왔던 보름달이 내려다보면서
기다린 만큼 환한 빛을 비추어줍니다
 
차오르는 마음의 항아리 비우며
오랜 세월 달항아리를 동경했습니다
그 항아리를 그러안아 봅니다
 


 
달 판타지아

 
물결 잔잔한 호수에 달이 뜹니다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고
이태백이 따려던 그 달을 봅니다
술잔을 기울이다가 문득
조금 덜 찬 달에 마음이 다가갑니다
 
술잔을 한차례 비우면서
절반 남은 술병에 눈길이 닿아서
아껴 마시려 마음먹습니다
 
호수에 뜬 달이 아름다워 그렇고
이태백이 떠올라서도 그러합니다
 
혼자서 유유자적 노닐자니
먼 데 떠난 술친구가 그립습니다
그의 얼굴도 어른댑니다

풍류를 즐기던 시절이 눈에 선합니다
가버린 날들이 아쉬워서
술병을 비우고 나서도 우두커니
호숫가에 앉아있는 나를
이태백이 지켜보는 듯도 합니다
 
 
 
 
초승달, 그믐달
 
 
새로운 시작을 말해주는 초승달은
왜 해가 지고 난 이른 저녁
서쪽 하늘에 뜨는지요
 
해 뜨기 전의 새벽녘
동쪽 하늘에 뜨는 그믐달은
왜 끝내기를 의미하는 것일는지요
 
마무리 잘해야 빛을 받을 수 있고
새 출발은 빛을 못 받을 때
해야 한다는 뜻인지요
 
해 진 뒤 서쪽 하늘과
동쪽 하늘을 번갈아 보면서
끝내기와 시작에 대해 새겨봅니다
 
 
 
 
첫눈을 기다리며
 
 
가을이 가면 눈을 기다립니다
침묵이 잉태하다가 내려오는
눈은 신성한 말들을 거느리고 옵니다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기보다
하늘을 받들어 안고 내립니다
 
세상을 희디희게 감싸 안으며
지울 건 죄다 지우는가 하면
말하지 않는 말에 귀를 열게 합니다
눈은 창밖에만 내리지 않고
내 마음 빈 곳에도 내립니다

창가에서 첫눈을 기다립니다
가는 길이 외지고 고달파도
풍진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려 합니다
새롭게 채워질 신성한 말을
그러안으려 마음 추스릅니다


 
 
대표시 이태수
 
이슬방울 외 4편
 
 
 
 
풀잎에 맺혀 글썽이는 이슬방울
위에 뛰어내리는 햇살
위에 포개어지는 새소리, 위에
아득한 허공
 
그 아래 구겨지는 구름 몇 조각
아래 몸을 비트는 소나무들
아래 무덤덤 앉아 있는 바위, 아래
자꾸만 작아지는 나
 
허공에 떠도는 구름과
소나무 가지에 매달리는 새소리,
햇살들이 곤두박질하는 바위 위 풀잎에
내가 글썽이며 맺혀 있는 이슬방울


 
 
그 무엇, 또는 물에 대하여
 

<1>
허공이 우주를 끌어안고 있듯이
그 무엇이 나를 떠받들고 있다.
무거운 땅덩어리가 허공에 달려 있듯이
내가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매달려 있다.
허공은 부드럽고, 그 무엇은 모양도 없지만
완강하게 나를 부둥켜안고 있다.

우주가 모양도 없는 저 허공 안에 있듯이
나는 안 보이는 그 무엇 안에 들어 있다.
허공은 비어 있으므로 이 땅을 들어 올리듯이
그 무엇이 나를 일으켜 앉히거나 세운다.
그 무엇은 안 보이고 허공은 비어 있으므로
나를 이토록 깊숙이 품어 앓게 한다.

<2>
물이 마침내 쇠를 삭게 하고, 물방울이
한결같이 떨어져 돌을 뚫듯이, 나는 물이 되고
물방울이 되어 돌을 뚫고 쇠를 녹이리.
낮고 부드럽게 비어 있는 그 무엇이
마음을 가득 채우듯이, 비어 있지만
뭔가 가득 채워져 있는 허공이
나를 흔들어 눈뜨게 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듯이,
일어나 바라보면 아득한 세상, 아득하므로
걷고 또 걷게 하는 세상이 눈물겨워
쇠를 녹이고 돌을 뚫으리. 나는 물방울이 되고
물이 되어 천천히, 오래오래
부드럽게, 낮게, 비워지고, 또 비워져서.
 
 
 

달항아리

 
잠이 달아난 늦가을 밤입니다
어두운 마음에 순백 달항아리 하나
데려와 앉혔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영상으로 본 적이 있는
둥글고 커다란 그 항아리를
마음의 한가운데 앉혀놓고 싶습니다
 
마침 창 너머 보름달 둥그렇게 뜨고
귀뚜라미 합창이 한창이며
별들은 내려올 듯이 반짝입니다
그런데 왜 가슴엔 낙엽 지고
마음은 정처 잃은 채 어두워질까요
요즘 세상 탓이기만 할는지요
 
언제부턴가 순백 달항아리를
마음속에 끌어당기면서 동경했습니다
세상은 발을 허공에 뜨게 하지만
허공에 떠서 환하게 어둠 밝히는
둥글고 커다란 보름달 같은 항아리의
우아한 기품을 꿈꿔왔습니다

 
 

지나가고 떠나가고


지나간다. 바람이 지나가고
자동차들이 지나간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하루가 지나간다. 봄, 여름,
가을도 지나가고

또 한해가 지나간다.
꿈 많던 시절이 지나가고
안 돌아올 것들이 줄줄이 지나간다.
물같이, 쏜살처럼, 떼 지어 지나간다.

떠나간다. 나뭇잎들이 나무를 떠나고
물고기들이 물을 떠난다.
사람들이 사람을 떠나고
강물이 강을 떠난다. 미련들이 미련을 떠나고

구름들이 하늘을 떠난다.
너도 기어이 나를 떠나고
못 돌아올 것들이 영영 떠나간다.
허공 깊숙이, 아득히, 죄다 떠나간다.

비우고 지우고 내려놓는다.
나의 이 낮은 감사의 기도는
마침내 환하다.
적막 속에 따뜻한 불꽃으로 타오른다.

 
 
 
낮은 꿈
 
 
★잠깐 꾸는 꿈같이
 
담담해지고 싶다
 
말은 담박하게 삭이고
물 흐르듯이 걸어가고 싶다
 
지나가는 건 지나가게 두고
떠나가는 것들은 그냥 떠나보내고
 
이 괴로움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두 팔로 오롯이 그러안으며
 
모두 다독여 앉혀놓고 싶다
이슬처럼, 물방울처럼
 
잠깐 꾸는 꿈같이
 
 
★꽃 한 송이
 
마음 비운 자리에 꽃 한 송이 핀다
 
저 생명의 절정인 꽃,
 
비워서 차오르는 저 절정의 찰나를
 
처음이듯, 마지막이듯
 
깊이, 더 깊이 끌어당겨 그러안는다
 
이 찰나가 영원이듯,
 
영원이 바로 이 찰나이듯, 피어나는
 
절정의 꽃 한 송이
 
마음 내려놓은 자리에 그 꽃이 핀다
 
 
★풀잎 하나

깊은 산골짜기 밀림에 깃들면
 
찰나와 영원이 하나같다
 
지나간 시간도 다가오는 시간도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만 같다
 
울창한 나무 그늘에서 흔들리는
 
나는 조그만 풀잎 하나
 
꿈꾸다 꿈속에 든 풀잎 하나
 
 
 
 
 
 
 
나의 인생 나의 문학
 
실존, 현실, 초월, 관조

 
 
이 태 수
 
 
아버지, 그리움 속 멀고 가까운 이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상실과 좌절, 그리움의 정서가 는개처럼 밀려온다. 철이 들어서도 그렇게 젖어서 방황하고 갈등하던 날들까지 마치 낡은 흑백 필름의 영상처럼 흐리면서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고향(의성)과 그 시절의 내 모습이 예 그대로 선연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일찍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가 먼먼 그리움 속에 언제나 그대로 계시고, 아버지를 여윈 가슴의 상처들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기 때일 것이다.
20대로 접어들면서 우여곡절 끝에 대구로 이사했지만 살아갈 길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시골의 가산을 하나둘 처분하면서 어렵게 살아야 했고, 오래지 않아 그마저 바닥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늘 고향을 가슴에 보듬어 안고 사셨다. 등지고 떠나온 고향을 되돌아보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런 나를 어머니는 가끔 꾸짖으셨다. 나도 자식들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신 뒤에야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가 있는 고향이 사뭇 바뀐 모습으로 다가오곤 한다.
아버지는 인자하고 다정다감하셨으며, 풍류를 즐기시는 선비의 후예였다. 가부장적인 부권을 놓지 않으면서도 인정과 눈물이 많으셨고, 현대판 선비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그리운 대상이다. 일제 강점기 때의 젊은 시절에 한동안 일본에서 사셨다는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익히셨으면서도 현대적 지성과 감성을 지니셨으며 중국 등으로도 국경을 넘나들며 망국의 한을 방랑으로 보내셨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가정을 꾸리시면서도 시골 생활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시골 마을에 살고, 아버지는 대처(대구와 의성읍)에서 운수업을 하셨다. 몇 살 때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고향을 떠나기 싫어하시는 어머니의 성화와 아버지의 건강 악화 때문이었다. 농촌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농사일은 익숙하지 않았으며 자주 앓아눕곤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대구에서 병원 입원 생활을 하셨다.
그런 생활이 3년 가까이 이어졌으며, 어느 눈보라 치던 날 아버지는 영영 눈감으신 채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학예회 연극 연습(나는 극중의 주인공이었다)을 하다가 전갈을 받고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와 관 위에 쓰러져 실신했다.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았다. 마흔둘의 아버지는 그렇게 먼 세상으로 떠나셨다.
 
나는 성주이씨 25세이며 문렬공 후손으로 태어났다. 문렬공은 고려조의 정당문학으로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로 시작되는 시조로 널리 알려진 이조년(2세) 할아버지이시다. 대제학을 지낸 그의 손자 이인민(4세) 할아버지,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로 시작되는 시조로도 널리 알려진 그의 맏아들 문경공 이직(5세) 할아버지(조선조 영의정)의 후손(그 이후 선조들에 대해서는 생략)이다.
나는 장남으로 위로는 누님이 둘이었다. 오래 기다리다 태어나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 사람들의 사랑도 듬뿍 받으며 자랐던 것 같다. 총기가 남다르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아버지가 한문을 가르쳐주시던 기억도 선연하다. 자주 칭찬도 하셨다. 애국가(당시의 곡은 지금과 달랐던 것으로 기억됨)를 가르치시고 공부할 때 먼저 부르게 하는가 하면, 나들이를 가실 때는 자주 어린 나를 앞장세우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어떤 때는 아버지가 차를 몰고 오셔서 아이들을 태워주고 나를 운전석 옆에 앉혀 기어 넣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던, 그래서 다른 아이들에게 자랑스럽던 기억들, 함께 붓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던 기억들 역시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잊히지 않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가세가 기울고 점점 더 어려워지는 가계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년 시절에는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꿈을 자주 꾸곤 했다. 지금도 아버지만 생각하면 슬픔과 아픔이 물밀 듯해 감상에 빠지곤 한다. 아버지는 여전히 어린 눈과 가슴에 비친 그대로 변함없이 먼먼 그리움의 대상으로 살아계신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뒤의 절망감과 좌절감, 상실감의 그루터기에서, 또한 선조들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으로, 시심이 싹트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니 멋대로 살아라’의 깊은 울림
방황을 거듭하던 옛날을 되돌아보면 마음이 어둡고 무겁다. 중고등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니기 어려웠다. 중고등학교에 간신히 진학할 수 있었으나 고학이었다. 장학금을 받으며 중학교에 다니고(줄곧 전 학년 1등) 나서 대구의 가장 이름난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이런 정황들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부터 갈등으로 방황했으며, 대학 진학은 엄두도 낼 수 없어 좌절감에 빠지곤 했다.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달 동안 방황하다가 대구로 가출했다. 친구의 소개로 가정교사 자리를 구해 그 집에 머물며,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도 다시 했다. 하지만 신경쇠약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더 버티기 어려워 몇 달 만에 낙향해야 했다. 그 시절 내게 한 가닥 ‘희망’을 안겨준 분이 있다. 당시 대구대학(영남대학교 전신) 철학과 학생(장학생)이던 김광수 선생이었다. 그분은 여러 가지 조언으로 용기를 북돋워 주었으며, 우여곡절 끝에 김광수 선생이 다녔던 대학의 철학과에 진학해 아르바이트 등으로 어렵게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사춘기 무렵부터 문학의 길로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대학 재학 때부터 본격적으로 문학 열병을 앓았다. 다른 대학 학생들과도 함께 어울리는 문학동인 <삼대>에 가담했으며, 당시 경북대 교수로 대구대학에도 출강하시는 김춘수 선생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대학에서 공모하는 ‘천마문학상’에 시를 투고해 당선되고, 매일신문과 대구일보에 시가 실리기도 했다.
이종후 교수님은 김춘수 선생이 중학교(경기중) 바로 한 해 후배라며 소개해 주시고, 철학적 바탕을 다져 그 길을 걸어보라고도 하셨다. 김춘수 선생께는 ‘현대시론’ 등의 강의를 들었으며, 그 인연으로 늘 문학의 스승으로 따랐다. 이종후 교수님의 “니 멋대로 살아라”고 하신 말씀은 특히 잊히지 않는다. 나는 어쩌면 그 말씀, 그 깊은 울림 덕분으로 좌절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한 뒤 군 복무(ROTC 장교)를 하고 돌아와 매일신문사에 입사하게 돼 찾아갔을 때도 이종후 교수님은 짧게 문학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 꿈을 버렸느냐는 뜻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바로 시의 길을 걷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교수님의 음덕이 아닐 수 없다. 교수님의 가르침이 언제나 마음속 깊이 자리매김하고 있었으므로 여태 길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신문사 생활을 34년 만에 접고, 대학에 출강(퇴임 전에는 8년 넘게 겸임교수)하기도 했지만 얼마 뒤부터 ‘전업 시인’으로 살고 있다. 197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스물세 권의 시집과 세 권의 시선집, 여섯 권의 시론집 외에도 저서들이 몇 권 있으며, 몇 차례의 문학상과 예술상도 받았다. 젊은 시절에는 하루에 한 번 이상 만나던 날로 몇 년이나 될 정도로 늘 따스한 마음을 주시던 김춘수 선생, 각별한 제자로 가까이 아껴주시던 신동집 선생, 일찍이 내가 이종후 교수님 제자가 되고 우울한 방황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김광수 선생께도 늘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현대문학》 추천 등단 전후
대학 재학 시절에는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고 싶은 목마름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 문은 좀체 열리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에 두 차례 응모했으나 그 꿈을 이루어지지 않았다. 졸업을 앞둔 1970년에는 군에 입대하면 3년 가까이 공백기가 될 것이라는 강박감을 남몰래 누르며 두어 군데 투고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일간지(매일신문) 신춘문예(시 부문)에 마지막 후보(시 「겨울 목탄화」)에 올랐으나 다른 사람의 작품이 뽑혔다.(세월이 좀 흐른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심사위원인 김춘수 선생은 내 작품을 밀고, 신동집 선생은 다른 사람의 작품을 밀었으나 신동집 선생의 주장대로 내 작품은 언어의 공전이 다소 심하고 난해하다는 이유로 낙방한 모양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1971년 3월, ROTC 장교로 군에 입대했다. 군 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습작했다. 전역 무렵에는 시가 100여 편 가까이 모일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군복을 벗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감정 노출이 심하거나 현학적인 작품들이 대부분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출발하기로 마음먹고 미련 없이 노트째 폐기해 버렸다.
1973년 여름, 육군 중위로 전역한 뒤 한동안 방황했다. 가장 쉽게 자리를 얻을 수 있는 교편생활을 할 것인가, 서울로 가서 자리를 잡을 것인가, 한동안 고민하다가 한 달 예정으로 한 후배(소설가 김원일 선생의 동생으로 뒷날 시인으로 활동했으나 요절했음)와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진로에 대한 생각 때문에 보름 만에 대구로 돌아왔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누군가 신문사 기자 시험에 응시해보자고 제의해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기분으로 매일신문 수습기자 공채에 응시했다. 경쟁률이 높았는데도 신문의 ‘사고’를 보니 1차 시험 합격자 발표 명단 맨 앞자리에 내 이름이 나와 있었다. 얼떨결에 면접을 거쳐 기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수습기자 기간은 여섯 달이었으나 두 달 만에 다른 동기들과는 달리 부서(문화부) 배치가 됐다. 문화부의 일손이 모자라고, 적성을 고려한 조치였던 것 같다.
문학과 미술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틈이 나는 대로 문학에 뜻을 둔 지기들과 어울리면서 대학 시절의 연장선상에서 시에 대한 꿈을 다시 키울 수 있었다. 이 무렵 김춘수 선생은 《현대문학》과 《현대시학》의 추천위원으로 위촉되셨다며, 작품을 준비해 보라고 하셨다. 신문사 일이 바쁜 데다 마음에 드는 시가 잘 쓰이지 않아 고민하던 중 1973년도 저물었다.
대학 동기이자 ROTC 동기인 박해수(2015년 작고)가 어느 날 자기 작품을 함께 읽어보자고 전화했다. 퇴근 후 나도 습작한 작품을 10여 편 가지고 약속 장소로 갔다. 그날 두 사람은 한 차례 술자리를 가진 뒤 다른 곳으로 옮겨가다가 길에서 신동집 선생과 마주쳤다. 선생은 우리를 반기며 한 주점으로 함께 가자고 하셨다. 요즘 시를 열심히 쓰느냐고 물으면서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다고도 하셨다. 박해수가 주저 없이 둘 다 지금 작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버렸다. 민망스러웠지만 피할 수 없이 습작품들을 넘기게 됐다. 그날 신동집 선생은 우리 둘의 작품들을 귀가해 읽어보겠다며 가져가셨다.
두어 달 뒤, 김춘수 선생의 전화를 받고 한 다실도 나갔다. 선생은 단단히 화가 나신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자네, 내가 한 말을 잊었나? 내가 자네를 등단시키겠다고 했는데, 아무런 상의도 없이 신동집 교수의 추천을 받다니……” 그때까지 나는 《현대문학》을 보지 못했으므로,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됐다. 신동집 선생께 추천을 부탁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추천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밖의 일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용서를 빌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신동집 선생의 넉 달만의 완료 추천으로 등단하게 됐지만, 그에 앞서 또 다른 일도 있었다. 한 문예지(《월간문학》) 편집장으로부터 시가 뽑혔다는 전화가 왔다. 난감했다. 《현대문학》 초회 추천 이전에 투고한 작품이 신인상에 뽑히게 된 것 같지만, 당시는 한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그 사실을 밝히고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무렵에는 신춘문예가 아니면 반드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이기도 했다.
그해 11월 넉 달이라는 단기간에 추천이 완료돼 등단했지만, 신춘문예 응모 때 당선시키려 한 분이 아니라 낙선시킨 분께 뜻밖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사실도 잊히지 않는 에피소드로 남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 후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던 그 두 분의 사랑을 받으며 남들보다는 비교적 순탄한 문학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김춘수 선생과의 에피소드는 또 하나 있다. 내가 근무하는 신문사 앞 외국 서적 전문 서점에 자주 들르셔서 이따금 신문사로 전화하시고, 불러내곤 하셨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즐겨 찾으시는 다실이나 양식당에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춘수 선생은 친구인 박해수가 김동리 선생이 경영(발행인)하는 《한국문학》 신인상에 첫 시 당선자로 뽑혔다고 책을 가지고 있으니 다방으로 나와 보라고 하셨다. 마침 퇴근 무렵이라 급히 달려갔다. 당선자의 주소가 적혀 있지 않아 ‘본인의 연락을 바란다.’는 ‘알림’도 실려 있었다. 당시 김춘수 선생께는 기증본으로 《한국문학》이 보내왔으며, 강의를 들은 적이 있고 문학 지망생인 박해수를 기억하고 계셨기 때문에 내게 미리 알려 주신 것이다.
그날 바로 박해수가 근무하는 학교(내가 소개해서 왜관 순심중고에 근무)로 전화를 했더니, 놀리지 말라고 했다. 퇴근해서 신문사 인근 주막으로 온 박해수는 하도 낙방을 많이 해 투고하면서 주소를 적지 않았다고 했다. 당선작 중의 하나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바다에 누워」이며, 뒷날 내가 박동규 교수께 소개하고 부탁해 심상사를 통해 이 제목의 첫 시집을 내게 되기도 했다.
갓 등단한 무렵의 박목월 선생에 대한 기억도 잊을 수 없다. 1970년대 초반, 문단에 갓 나와 신문사(매일신문) 문화부의 새내기 기자로 일하던 때였다. 박목월 선생의 문학 강연을 요약해서 신문에 싣기 위해서였다. 시에 대해 속삭이듯 들려주시던 모습은 마치 초기 시에 등장하는 바로 그 청노루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짧은 헤어스타일, 악수를 청하시던 손의 감촉도 잊히지 않는다.
그 뒤 1974년 가을, 선생이 회장을 맡고 있는 한국시인협회의 경주 세미나에 참석해 예정된 행사가 끝나고 이승훈 선생 등 몇몇 선배 시인들과 술을 마시다 보니 서너 사람만 남게 됐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등을 두드리시며 “이젠 그만 마셔라.”라고 타이르시던 모습도 잊히지 않는다. 그다음 날 이른 아침, 선생님을 따라 팔우정 해장국집에 가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 시인들 가운데 박목월 선생의 시를 좋아했으며, 지사 풍의 조지훈 선생은 시인으로서의 롤모델이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갓 등단한 내게 “이 군, 좋은 시 많이 쓰기 바라네.”라고 하시던 박목월 선생의 그 따스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남아 있는 듯하다.

‘자유시’ 동인 시절
1976년 첫 동인지를 내면서 출범한 <자유시> 동인은 당시 문예지나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대구, 경북 출신 젊은 시인들로 구성돼 몇몇 동인의 부침을 감내하면서 1980년대 초반까지 활동을 벌였다. <자유시>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기치로 내세우고, 어떤 이념이나 방법론으로 억지스럽게 괄호를 치거나 공통분모를 만들려고 하기보다는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존중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동인지 제3집에서는 “시는 개인에서 출발하며, 시와 모든 예술은 어떠한 시대든 당대 개인의 자유가 인정된 이후에라야 가능하다.”고 다시 천명했으며, 동인지 제6집에서도 동일선상의 머리글을 실음으로써 동인 활동의 성격과 방향을 분명히 했다. 돌이켜보면, 이 무렵 우리는 저마다 다른 빛깔의 개성을 가졌지만, 문학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자유시>를 위해서는 한목소리를 내려는 열정을 함께 불 지피려 했던 것 같다.
낭만적인 감성의 바탕에다 사회나 역사를 향한 눈뜸과 준열한 의식을 드러내기도 했고, 대부분 순수시를 지향하면서도 참여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으며, 두 가지의 극단적인 경향을 변증법적으로 합일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해를 거듭해도 어디까지나 동인 개개인의 자유로운 의지, 자유로운 지향을 존중하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당시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던 계간지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 《세계의 문학》 등이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하나둘 이들 계간지를 통해 발판을 굳히는 성과(나와 이하석은 《문학과 지성》, 이동순과 정호승은 《창작과 비평》, 이기철은 《세계의 문학》)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시> 동인들은 모두 문예지나 일간지의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들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활동으로보다는 ‘자유시’를 통해 문단 깊숙이 진입할 수 있었다고 하는 편이 정직한 표현일는지도 모른다.
<자유시> 동인의 출범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75년 가을 이하석과 내가 만나 동인을 결성하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동인 구성 문제를 놓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몇 차례의 조율을 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문예지나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동세대의 대구, 경북 출신 시인들로 동인을 결성하자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 동인은 문예지 출신인 박정남(현대시학), 박해수(한국문학), 이경록(월간문학), 이기철(현대문학), 이하석(현대시학), 나(현대문학)와 신춘문예 출신인 이동순(동아일보), 정호승(대한일보) 등 8명으로 확정돼 1976년 1월 어느 날 대구에서 동인 모두가 모인 첫 자리를 가지고 동인 명칭을 ‘자유시’로 정했다.
<자유시> 동인지 창간호는 그해 4월에 빛을 보게 됐다. 서예가 이성조 선생의 제자를 담아 조촐하게 펴낸 이 동인지의 서두에는 ‘자유시의 명제’라는 우리의 지향점과 입장을 밝힌 글을 싣고, 작품은 동인들 이름의 ‘가나다’ 역순으로 실었다. 어느 정도 기대했던 대로, 문단의 반응은 좋았다. 정선된 1970년대 시인들의 소집단이라는 인상을 심었으며, 문단의 조명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자유시> 동인에 이어 <반시> 동인이 출범하면서 다소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1973년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이들은 1973년부터 얼마간 <73그룹>을 결성, 사화집을 내다가 중단된 상태)이 재결집해 <반시> 동인을 결성하면서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동순과 정호승을 양보하라는 강력한 제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의 정호승을 ‘반시’에, 대구의 이동순을 ‘자유시’에 참여하도록 타협(나와 김창완 시인)을 보게 됐다. 이런 사정으로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강현국을 받아들이고, 이경록이 원고를 보낸 뒤 지병으로 작고해 1977년에 발간된 동인지 제2집에는 뜻밖에 그의 유작을 싣는 아픔도 겪어야 했으며, 1978년에는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한 서원동이 새 동인으로 영입됐다.
그 이듬해 4월에는 박정남이 개인 사정으로 빠진 채 대구 맥향화랑에서 필자의 주선과 지역 화가들의 적극적인 동참으로 동인 시화전과 시낭송회를 여는 한편 그 수익금의 일부로 동인 4집과 이경록의 유고시집 『이 식물원을 위하여』를 냈다. 하지만 1980년과 그 이듬해엔 동인지 발간이 중단됐고, 1983년 청하출판사에서 동인지 제6집을, 실천문학사에서 『자유시 선집』을 내게 됐다.
이같이 우리는 6권의 동인지와 1권의 선집을 낸 채 개별 활동으로만 아쉽게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유시> 출범 당시와 시를 향한 의욕과 열정에 불을 지피던 그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일말의 아쉬움이 없지 않다. 물론 그때의 동인들이 대부분 지금도 정진하고 있지만, 가는 길이 제각각일 뿐 아니라 ‘동인’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어 더욱 그렇다.
 
첫 시집 출간 무렵
첫 시집을 어느 출판사에서 낼까 하는 문제를 두고 적잖은 고민을 했었다. 출판사 ‘문장사’를 경영하는 시인 오규원 선생이 시집을 내주겠다는 따뜻한 제의를 해 한동안 즐겁게 망설였다. 문장사의 시리즈 중 첫 시집이 되겠지만, 월간 시전문지 《심상》을 발간하는 심상사의 첫 기획 시리즈 시집 발간 제의를 이미 받은 상태였고, 또 다른 한 출판사(고려원)로부터도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망설임 끝에, 박목월 선생 작고 후 시전문지 《심상》을 계승하신 문학평론가 박동규 교수(서울대)께서 직접 전화하신 데다 당시 편집장 이명수 시인이 몇 차례 채근해 마음을 굳히게 됐다. 《심상》은 박목월 선생이 창간해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시전문지로 자리매김했을 때이며, 박동규 교수가 이어받아 펴낸 첫 호의 권두칼럼에 황감하게도 내 시에 대한 이야기로 채운 ‘각별한 인연’도 있었던 터였다.
그 후 한 주일 조금 더 지났을 무렵이었을까, 문학과지성사로부터 ‘문학과지성 시인선’ 기획에 내 시집도 내기로 편집위원들(문학평론가 김병익, 김주연, 김현, 김치수)이 결정했다는 전갈이 왔다.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과지성사는 한해에 네 명의 시인을 선정해 시집을 내는데, 첫해인 1978년에 황동규 선생을 비롯한 4명의 시집을 낸 데 이어 1979년 기획에 내 시집도 예정돼 있다는 것이었다. 《문학과지성》은 등단 초기에 원고(시)를 청탁하고 조명해주기도 했으나 시집을 발간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아무튼 이미 시집 원고를 심상사로 넘겨 죄송하다는 말을 전화로 전할 수밖에 없었다.
1979년 첫 시집 『그림자의 그늘』이 심상사에서 출간된 뒤 《문학과지성》에는 한계전 서울대 교수가, 《창작과비평》에는 시인 정희성 선생이 분에 넘치는 서평을 쓰셨다. 《심상》에는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서울대 교수)이 서평을 하셨다. 특히 일면식도 없는 한계전 교수, 정희성 선생 등의 뜻밖의 과분한 서평들을 읽으면서 감격하던 기억도 선연하다.
하지만 김현 선생은 그 뒤 만난 자리에서 유감의 뜻을 감추지 않으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찍혔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이듬해였던가, 소설가 김원일 선생을 따라가 《문학과지성》 편집동인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김병익 선생(당시 문학과지성사 사장)은 다음 시집을 문학과지성사에서 낼 수 있도록 좋은 시를 쓰라고 격려하셨다. 그런 인연으로 ‘문학과지성 시인선’으로 두 번째 시집부터 열 번째 시집까지 9권(그 이후 열한 번째 시집 『침묵의 결』도 나와 10권)이나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봐도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시를 써야 했기 때문에 정진하지 못하고, 때로는 좋은 시를 못 쓰고 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행운이 늘 가까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실존적 방황과 초월 꿈꾸기
되돌아보면 나의 1970년대는 실존적 방황이랄까, 낭만적 우울 속의 헤맴이랄까, 그런 빛깔과 무늬들로 물들어진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맑고 밝은 시를 쓰지 못하고, 음산하고 공포스런 분위기, 암시적 환기력 등이 시를 뒤덮고 있었던 것 같다. 자아를 잃고 가상으로 떠내려가면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성찰과 소외감이 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 「낮술」, 연작시 「그림자의 그늘」이 특히 그렇지만, 첫 시집 『그림자의 그늘』에 실린 대부분의 시들은, 해설에서 김흥규 선생(고려대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건조하고 황량할 뿐인 일상의 외부 세계와 그 안에서 방황하는 정신의 자화상’들이라 할 수 있다. 연작시 「그림자의 그늘」은 ‘나’의 삶으로부터 유리된 가상(그림자)이 ‘나’를 대신해 삶을 영위하고 ‘나’는 그 그림자의 그늘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그런 상황을 뛰어넘고 싶다는 열망을 역설적으로 환기시키고 있긴 하지만, 대체로 음습한 분위기를 벗지 못했다. 「낮술」을 그해 신인 작품으로는 가장 돋보인다는 문학평론가 홍기삼 선생의 극찬, 한국일보, 독서신문 등의 조명도 잊을 수 없다.
정치적, 사회적 소용돌이가 극심한 가운데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이 드높던 1970년대를 거친 1980년대 초반은 어둡고 우울한 시기였다. 정치, 사회적 혼란뿐 아니라 물질문명의 발달이 야기하는 소외문제, 문명비판적인 시각, 근대화에 되레 더 밀려난 기층민 문제, 현실개혁 의지 등이 문학의 주요 명제와 화두로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한 추이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시기에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시를 쓰는 나로서는 현실에 늘 촉각을 곧추세우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는 어떤 주의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어떤 의식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러 차례 이런 논리의 글을 쓴 적도 있지만, ‘현실 의식의 정서화’나 ‘상황 의식의 정서화’는 시의 지향점이기도 했다.
1982년에 출간된 두 번째 시집 『우울한 비상의 꿈』 뒤표지의 글(표4)에 “꿈에게 퍼덕이는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고 썼듯이, 말을 비천하게 만드는 현실에 좌초되면서도 그 암울한 상황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는가 하면, 밝고 자유로우며 사랑으로 가득 찬 내일을 향한 꿈에 불을 지피곤 했다. 이 시집의 해설에서 김병익 선생은 “좌절당하는 자아와 그 좌절 속에서 끝내 버릴 수 없는 희망 혹은 기다림의 언어 탐구로 나타난다.”고 풀이하고, 그 독자성을 ‘살아 있었음-죽어 있음-살것임’의 대조를 자신의 이미지로 드러낸다고 평했다. 1983년 문학평론가들이 선정한 ‘시 베스트 5’(동아일보)에 김주연 교수(숙명여대), 박철희 교수(서강대) 등의 덕분으로 선정돼 얼떨떨했던 기억도 잊히지 않는 삽화의 하나다.
관념적인 세계의 천착(1970년대), 삐걱거리는 현실에 대한 고통과 그것의 초극을 향한 몸부림(1980년대 초반)을 거친 뒤 다다른 지점은 1986년에 나온 세 번째 시집 『물속의 푸른 방』의 역설적인 세계였다. 비록 현실은 추하고 불순하지만 그 바깥이나 그 깊숙이 어떤 순결하고 명징한 세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 그것이었다. 이 무렵엔 『우울한 비상의 꿈』 시절의 ‘날아오르기의 꿈'을 ‘내려가기의 꿈’, 또는 ‘낮은 꿈’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다 보면 추하고 뒤틀린 현실의 어딘가에, 어떤 깊숙한 곳에, 순결하고 명징한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소산이었으며, ’물속의 푸른 방’은 유토피아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정과리 교수(연세대)는 ‘분열된 자아의 꿈, 혹은 원의 위상학’이라는 해설을 통해 이 시집의 변모의 줄거리는 “본래 복잡하게 얽힌 전체-시인의 감정․앎․열망 등이 혼란스럽게 뒤섞인-를 시인이 의식적으로 재구성한 결과”로 보기도 했다. 이 시집으로 젊은 나이에 대구시문화상(문학 부문)을 수상했다.
“나의 상상력이나 환상은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꿈꾸기에 고리를 달고 있으며, 그 꿈꾸기는 시의 뼈대, 또는 몸집을 만들어준다. 나의 시는 그러므로 꿈꾸기에 다름 아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지만, 꿈꾸기의 반복이 현실 초극의 조그마하지만 완강한 초월에의 오솔길이며 마치 숙명과도 같은 길이였던 것 같다.
 
너와 나, ‘그’와 둥긂 지향
1980년대 후반부터는 여전히 하강 이미지를 집요한 초월의 길 찾기의 방법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새로운 꿈의 세계를 구축하려 시도했다. 손상된 본래적 자아가 회복된, 맑고 순수한, 내면의 공간을 꿈꾸는 한편 보다 구체성을 띤 ‘너’와 ‘나’의 문제를 축으로 한 인간관계에 눈을 돌렸다. 신과 인간의 중간 지점에 자리 잡으면서 초월에 다다른 존재로서의 ‘그’를 찾아 나서는 데 무게중심을 두기도 했다. 형이상학적인 명제이기도 한 ‘그’에 대한 추구는 ‘너’와 ‘나’의 문제에 천착한 네 번째 시집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에서 시작됐으며, 다섯 번째 시집 『꿈속의 사닥다리』와 여섯 번째 시집 『그의 집은 둥글다』로 넘어오면서 더욱 본격화됐다.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는 ‘꿈을 뒤집어 꾸기', ‘꿈의 무화’라는 빛깔을 묻히거나 ‘꿈 버리기의 꿈’으로 풀이될 수 있는 마음의 그림들을 담아 보려 했다. 조금은 역설적이지만 그 배경은 역시 꿈과 현실의 괴리감 때문이었다. 이 무렵부터 더욱 ‘내려가기’와 ‘낮은 꿈’ 꾸기에 마음을 주곤 했다. 아마도 그래서 다시 이르게 된 지점이 ‘그’와 ‘너’를 그리워하며, 인간적이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그러면서도 절대자(신)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존재인 ‘그’를 목말라 하고 열망하는 길을 나서게 됐던 것 같다. 이 시집의 해설에서 시인 황동규(서울대 교수) 선생은 “상상력 쇠퇴의 고통을, 거의 태양 상실의 심정으로, 그것도 한두 편이 아니라 연작시 형태로 노래한 작품은 우리 시에서 찾기 힘든 것”이라고 보기도 했다.
시집 『꿈속의 사닥다리』는 상승과 하강 이미지를 교차시키면서 ‘무화된 꿈’을 다시 일으키고, 잃어버린 말과 길 찾기(초월)를 하는 ‘사닥다리 놓기의 꿈’을 통해 끊임없이 가위눌림을 강요당하는 황폐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따스하게 꿈꿀 수 있는 정신적 이상향을 구축하는 데 주로 주어졌다. 이 시집의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김주연(숙명여대 교수) 선생은 “‘그’는 우리 현실에 꼭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결핍되어 있는, 신성에 가까운 어떤 추상적 가치”라며, “시인은 세속적인 현실 속에서 자신도 어차피 더러울 수밖에 없다는, 더러움을 통하여 더러움을 극복하겠다는 저 유마힐식 세계관을 내세우지 않는다. 시인은 ‘유리알같이 맑고 투명한’ 길을 만들어가고자 한다.”고 평했다.
그 이후 ‘둥긂’ 지향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는 시집이 『그의 집은 둥글다』였다. 자서에서 “보다 맑고 아름다운 꿈의 공간으로서의 ‘마음의 집’을 빚고, 그 속에서 살고 싶어 해온 열망의 읊조림들"이라고도 적은 바 있듯이, 둥글고 푸르고 맑은 이데아로서의 ‘그’를 찾아 나서고,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이 그런 둥글음의 세계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기구와 현실 초월에의 의지를 집중적으로 노래하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오생근(서울대 교수) 선생은 이 시집의 해설에서 “이태수에게는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고, 덧없는 삶에 갇혀 있지 않으려는, 끈질기면서도 부드럽게 지속되는 의식이 어떤 그리움이나 기다림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이 분명하고, 그것이 바로 시를 쓰는 마음의 원동력이 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세기말의 연민, 새 세기의 꿈
한때는 유림의 고장으로 불리는 안동이 거느리고 있는 고즈넉한 정서, 그 안켠에 완강하게 자리 매김한 뿌리의식이나 도도한 선비정신과 마주치면서 빚어진 ‘정신의 그림들’을 담아내기도 했다. 이방인으로서의 안동 떠돌기, 잘 안 보이지만 높고 깊게 흐르는 듯한 선비정신 더듬기가 은밀한 밑그림을 이루고 있는 일곱 번째 시집 『안동 시편』의 시들은 뭇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풍경의 내밀한 깊이를 포착해보려 했으며, 내 심상의 발현을 포개어 놓았다고도 할 수 있다.
지난 세기말(1999년)에는 앞의 시집들이 안고 있는 명제들을 복합적으로 아우르면서 초월과 초극 의지를 부드럽지만 완강하게 노래하려 한 여덟 번째 시집 『내 마음의 풍란』을 내놓았다. 각종 재앙과 세기말의 어둠,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조그맣고 따스한 ‘가슴 열기’로 이 세계나 세상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노래한 시들을 주로 담았다.
친숙한 어법과 쉬운 구문으로 낯익은 세계를 그리는 듯한 외양 속에 그 반대로 트인 오솔길을 보여주려 했으며, 안으로 다져 넣은 형이상학적 고뇌, 더 나은 삶에의 추구와 초월 의지를 노래했다고 할 수 있다.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겸허의 미덕이 살아나도록 안간힘을 쓰기도 하고, 안 보이는 기교와 언어 운용의 비의를 각별히 염두에 두기도 했다.
2000년 들어 새 세기를 맞은 기대감은 컸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그 후유증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어려움은 여전했다. 몸담고 있는 신문사의 사정은 아주 심각했다. 구조조정이 계속(1998년부터 사원이 무려 150명 이상 퇴출)되는 가운데 재정적인 어려움은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떠밀려서 대구시인협회 회장을 맡은 1998년에는 편집국을 떠나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1년 만에 다시 편집부국장(수석)으로 자리가 바뀌었으며, 그 이듬해(2000년) 다시 논설위원으로 복귀했다. 신문사 일에 쫒기면서 시에 정진하기 어려렵지만, 논설위원은 비교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자리였다. 문화와 관련된 각종 일에도 여전히 관여하는 한편 당시 대구에서는 유일한 금복문화재단의 이사(1999년부터)를 맡게 되기도 했다.
시집 『내 마음의 풍란』으로는 그 이듬해 전혀 예상하지 않은 제3회 한국가톨릭문학상을 받게 됐다. 소설가 최인호 선생, 시인 신중신 선생에 이은 수상이었다. 상복이 없는 나로서는 뜻밖이었을 뿐 아니라 당시에는 독실한 신자가 아니어서 당황하기도 했다.
2001년부터는 비교적 시간을 내기 쉬운 오후 시간을 이용해 대구한의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2007년까지)로도 일하면서 한국현대문학사, 현대시론, 문학용어론, 창작지도 등을 강의했고,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이념제정위원회 소위원장과 문화행사 기획단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린 2003년까지는 이 행사에 적잖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고, 대학 강의에도 충실하기 위해서는 늘 시간에 쫓기곤 했다. 게다가 2002년부터는 대구가톨릭문인회 회장, 대구가톨릭언론인회 회장을 맡는 등 봉사해야 할 일들도 점점 늘어나 시를 쓸 겨를이 없을 지경이었다.
음악, 미술 등 예술 분야의 일들도 적지 않았다. 대구오페라하우스 개관, 대구시립미술관 건립과 관련해서도 일을 했으며, TBC 대구방송의 육사시문학상 제정에 관여하고 운영위원과 심사위원을 맡았다. 신문사에서는 논설실장을 거쳐 석 달 만에 논설주간으로 발령이 난 뒤부터는 다시 더 바빠져 작심하지 않고는 시를 가까이하기 어려웠다. 2004년부터는 2년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상화문학제(조직위원장)를 비롯한 각종 문학 관련 일에 참여했으며, 신문사에서는 이사로 승급됐다.
2004년에는 아홉 번째 시집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을 간신히 낼 수 있었다. 이 시집으로 천상병시문학상을 받았는데 역시 뜻밖의 일이었지만, 천상병 선생처럼 무구한 세계를 꿈꾼다는 평가 때문에 사양하다가 수락했다. 시집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은 마음이 만들어낸 자연과 그 시원 속에서 ‘이슬방울’이나 ‘얼음꽃’과 같이 조그마하고 투명하며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데 주로 주어졌다. 마음이 나무나 새, 이슬방울 속으로 들어가서 깃들이기도 하고, 그 바깥에서 바라보기도 하는 작은 세계가 주조를 이룬 건 그런 마음자리와 연계돼 있었다고나 할까. 그 무렵에는 그런 꿈꾸기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자서에 “이 느린 걸음으로, 때로는 거슬러 오르면서라도 꿈꿔온 길을 찾고, 이슬방울처럼 글썽이거나 얼음꽃으로 맺혀서라도 둥근 집에 깃들일 수 있을 때까지 가보기로 마음을 일으키기도 한다.”라고 적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김주연(숙명여대 교수) 선생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 마음의 행로는 시작과 끝이 있다기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 마음의 행로는 이성적인 의식을 포함하되, 그것을 또한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기도 했다. 주제에 있어서도 혼탁한 세상살이에서의 ‘일상적인 길’과 그 혼탁한 세상살이 가운데서 꿈꾸어보는 ‘초월적인 길’이 주축이었다. 이 두 길 중 비본질적인 길이라 할 수 있는 ‘일상적인 길’을 벗어나고 뛰어넘어 본질적이고 이상적인 ‘초월의 길’을 추구하는 도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2006년에는 막내 아우(이경수)가 세상을 떠나 마음이 너무 아팠다. 병환 중의 아버지가 이름까지 어린 내가 짓게 했으며, 내가 가장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뛰어나게 잘했다. 경북고를 나와 서울대 영문과 학사, 석사, 박사를 거쳤으며, 문학평론가로 대학 교수를 지낸 영문학자(아내 박령도 서울대 영문학박사 출신 영문학자)였다.
 
전업 시인으로 살기와 침묵에 들기
신문사 퇴임과 함께 대구한의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도 그만두고 시인으로만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퇴임 후 5년간은 ‘아침부터 출근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문학과 예술 관계 외의 글은 쓰지 않는다’, ‘현역(권력층)에게는 찾아가거나 먼저 전화하지 않는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후배들의 대접을 받지 않는다’는 것과 이성(여성)에 대한 금기 사항 등이 그것들이었다. 전업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잘했다는 생각이 들며 여태 그 불문율을 어기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대학 출강, 회사의 사외이사, 문화 예술 관련의 각종 위원이나 위원장 자리까지 다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최소한의 수입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고, 그런 자리가 계속 생기기도 했다. 때로는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프로젝트 같은 것을 맡아야 체면을 유지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불문율에 충실하면서도 마음먹은 문학의 길에 전념하기는 쉽지 않았다.
2008년에는 열 번째 시집 『회화나무 그늘』을 냈다. 신문사 퇴임 후 생활 리듬이 달라져 조금은 방황하면서 쓴 작품들이기 때문에 그런 빛깔이나 무늬들이 곳곳에 묻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집 『회화나무 그늘』의 해설을 통해 문학평론가 김선학(동국대 교수) 선생은 “그의 시적 행로가 내면의 어둠에서 자연 속의 그늘로 나오는 과정과 경위를 표출하고 있다. 시인 자신의 자아가 자연에 놓이는 자아로 이행하면서 원숙한 사유의 결정을 드러내고 있어 시적 세계 속으로 읽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강한 흡인력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평했다.
2010년대 들어서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어나 말에 대한 외경심이 한결 커졌다. 성서의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라는 구절이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다.”라고 한 말은 시에 눈뜰 무렵부터 귀감으로 삼아왔지만, 그 뿌리까지 내려가 보고 싶은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모른다.
피카르트의 난해하지만 탁월한 말들에 겸허하게 다가가 보곤 했다. 다가간다기보다 깊이 들여다보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말은 침묵에서 나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지만, 침묵은 언제나 절대적인 말을 잉태한다. 시를 쓰는 일은 그 절대적인 말, 신성한 말 찾아 나서기에 다름 아니며, 침묵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런 말들을 끌어안고 나오기라는 생각도 했다.
2012년에 낸 열한 번째 시집 『침묵의 푸른 이랑』과 2014년에 낸 열두 번째 시집 『침묵의 결』은 ‘침묵’을 중심 화두로 쓴 시를 담고 있다. 침묵에 들기와 떠받들기를 중심으로 ‘비우기’와 ‘지우기’, ‘내려놓기’가 그 화두다. 문학평론가 오생근(서울대 명예교수) 선생은 시집 『침묵의 푸른 이랑』의 해설을 통해 “이태수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넘어선 침묵의 세계를 동경하거나 성스러운 침묵의 언어를 탐구한다.”라며, “‘침묵만이 말의 깊은 메아리를 낳’기 때문에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언어는 언제나 침묵과의 긴장 관계를 잃지 말아야 한다.”라며 ‘침묵의 시학’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했다.
시집 『침묵의 결』은 그 연장선상에서 신과 자연 앞에 자신을 낮추어 세속을 뛰어넘으려는 의도의 소산이었다. 이 시집의 서시는 바로 그런 지향과 추구에 대한 압축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몇 년 동안 ‘침묵’을 중심 화두로 삼은 시를 쓰면서 그 명제에 선택과 집중을 했지만, 앞으로 더 나아간 세계에 이르고 싶다는 열망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 시집에 대해 ‘예술과 자연, 하나 되다’라는 주제로 해설을 쓰신 문학평론가 김주연(숙명여대 명예교수) 선생은 “현대사회에서 고립화, 원자화된 개인들의 소통과 그로 인한 언어의 무력화에 언어철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라고 보시기도 했다.

그윽한 적막, 역설적 자기성찰
2016년에 낸 열세 번째 시집 『따뜻한 적막』에서는 ‘적막’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마음의 그림들을 진솔하게 담았다. 자연과 어우러진 심상 풍경들을 겸허하고 신성한 언어로 감싸 안고, 적막한 현실 너머의 따스한 풍경에 다가가거나 그 풍경들을 끌어당겨 깊이 그러안는 형이상학적인 꿈에 무게를 실어 보려 했다. 해설을 통해 문학평론가 김인환(고려대 명예교수) 선생은 “시인은 침묵과 적막 속에서 근거 자체에 대한 믿음을 확인한다. 궁극적 근거를 굳게 믿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적막은 따뜻한 적막이다.”라고 했다.
『따뜻한 적막』에서와 같이 기본명제(중심 화두)가 ‘초월에의 꿈’인 열네 번째 시집 『거울이 나를 본다』는 완만한 역설의 자기성찰로 자연과 내면을 넘나들면서 빚어지는 심상 풍경들을 떠올리는 한편, 때로는 파토스와 에토스들을 비켜서지 않고 진솔하게 내비치는 빛깔을 띠고 있는 점도 조금 다르다. 여전히 나의 삶은 초월에의 꿈꾸기이며, 시는 그 기록이자 자아실현의 길 찾기라 할 수 있다.
이 시집의 표현 기법도 앞의 시집 『따뜻한 적막』과 마찬가지로 실내악이나 교향악처럼 처음과 끝이 같은 ‘A-B-A’ 형식이 거의 예외 없이 도입돼 있으며, 역시 같은 맥락의 회화적(시각적) 효과를 얻기 위해 시의 행과 연의 앞뒤 흐름이 대칭구조를 이루도록 구성하고, 형태미를 더 강화하기도 했다. 이 같은 시도는 술과 술잔의 함수관계가 그렇듯이, 형식이 내용의 맛과 분위기를 한결 돋우어 주리라는 생각 때문이며, 시의 특성을 온건하면서도 완강하게 유지하면서 더욱 단정하고 정결한 문체를 지향하고 선호하는 개인적인 취향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같은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열네 권의 시집을 낸 뒤 잇달아 2018년 봄에 발간한 시선집 『먼 불빛』(문학세계사)에는 등단 작품을 포함해 열네 권의 시집에 실린 시들 가운데 100편을 자선해서 담았다. 열다섯 번째 시집 『내가 나에게』는 『거울이 나를 본다』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을 들여다본 자아 성찰에 무게중심이 주어져 있으며, 기본명제이자 중심화두는 역시 더 나은 삶을 향한 초월에의 꿈꾸기였다. 외부 세계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경우도 없지 않으나, 궁극적으로는 외부 세계를 통해서도 자신으로 귀결되는 말 건넴이자 응답들이었다. 상화시인상을 받게 한 이 시집의 구문의 형식은 『따뜻한 적막』과 『거울이 나를 본다』에서보다 더 음악에서 따오거나 대칭구조 등 회화(시각)적 효과를 끌어들였다.
근래에는 외로움이나 쓸쓸함, 허무와 무명마저도 따뜻하게 끌어안아 착색해보려는 시도를 거듭하고 있지만, 지난 이태가 넘는 동안은 코로나 팬데믹 시대였고, 그 이후에도 그런 아픔과 무거움에서 자유롭지 않아 시에도 그 그림자들이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다.
『유리창 이쪽』, 『꿈꾸는 나라로』, 『담박하게 정갈하게』라는 시집 제목들이 어느 정도 암시하고 있듯이, 이 세 시집에는 근래의 제 미음의 그림들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열여섯 번째 시집 『유리창 이쪽』은 내적 성찰을 바탕으로 자아와 세계의 조화를 꿈꾸고, 삶의 이상적 경지를 추구하며 초월에 다다르는 길과 우주의 신성성에 다가가 보려는 자기성찰에 무게중심이 주어져 있다. 이 시집으로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열일곱 번째 시집 『꿈꾸는 나라로』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아픔과 정신적 방황, 영혼의 상처와 소외감, 비판과 용서, 관용과 초월 의지 등에 천착하면서 삭막한 현실을 벗어나 참된 자아를 찾으려는 열망과 초월 의지에 불을 지피고 새롭게 투사하며 껴안는 꿈의 현상학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해마다 시집을 내기 때문에 시집을 너무 자주 낸다고, 시를 그렇게 쓰면 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으나 지난 2022년에는 두 권의 신작 시집을 내기도 했다. 역시 ‘실존, 현실, 초월’이 기본 명제인 열여덟 번째 시집 『담박하게 정갈하게』와 열아홉 번째 시집 『나를 찾아가다』가 그것이다. 이 시집들은 거친 세태 속의 ‘길-흐름-비움’, ‘상처-자연-꿈’, ‘지상적 그리움-영적 그리움-구원’이라는 의미망을 구축하면서 담박하고 정갈하게 존재론적 구원의 길을 추구해 보려 했다. 이 지향은 이성에서 영성으로, 지상적 삶에서 천상적 가치로 자아를 투영하며,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려는 빛깔도 띠고 있다.
2023년에 펴낸 스무 번째 시집 『유리벽 안팎』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유리창은 투명하지만 안과 밖을 연결해 주면서도 단절시키는 벽이 되기도 하나, 그런 와중에도 내가 놓여 있는 현실과 이상적인 세계의 화해를 꿈꾼 산물이었다. 해설을 통해 시인 조창환(아주대 명예교수) 선생은 “명상과 관조, 정화와 화해를 읊고 있는 그의 시는 자아의 내적 성찰을 바탕으로 멀리 있는 다른 세상을 향한 꿈을 펼쳐 보이는 지성적 관조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라고 풀이했다.
 
비움과 낮춤, 관조와 관용
등단 50주년을 맞은 2024년에는 스물한 번째 시집 『먼 여로』, 두 번째 시선집 『잠깐 꾸는 꿈같이』, 여섯 번째 시론집 『예지와 관용』을 펴냈다. 『먼 여로』에 대해서는 문학평론가 이숭원(서울여대 명예교수) 선생이 해설에서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통합하여 현재로 내재화하는 욕망, 끝없는 길 찾음과 길 걸음의 순환적 반복, 그것을 위한 환각의 창조, 이것이 그의 최근 시 쓰기의 동력이다.”라고 평했다. 이상 세계를 꿈꾸고 추구하는 머나먼 여정을 여러 빛깔과 무늬로 그려 담은 시집이다.
올해(2025년)도 스물두 번째 시집 『은파』와 스물세 번째 시집 『마음의 길』을 잇달아 냈다. 『은파』를 통해서는 자연을 통해 순수를 포착하는 존재 탐구로 섭생과 그 순리에 따르며 침묵의 언어 천착에 무게를 실으려 했다. 간결하고 담백하며 정결하고 고상한 시경(詩境)을 지향하면서 윤슬과 은파로 상징되는 심미적 경지를 추구하고, 그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탐색의 길을 나서기도 했다. 이 시집의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이숭원(서울여대 명예교수) 선생은 “이 무심한 침묵의 언어는 번잡한 삶에서 우리를 이끌어 올리는 정화의 힘을 행사한다.”라며, “이러한 서정의 윤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마음의 길』은 ‘나’(현실적 자아)가 낮은 자세로 ‘나’(본질적 자아)를 찾아가는 마음의 여정을 다각적으로 떠올려 보이려는 데 무게를 실었다. 그 방법론은 비우고 내려놓고 지움으로써 새롭게 차오르고 높아지고 깊어질 수 있다는 심화된 ‘비움의 철학’과 ‘참나(眞我)’ 찾아 나서기가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해설을 통해 문학평론가 홍용희(경희사이버대 교수) 선생은 “현실 초월을 기본명제로 끊임없이 삶의 근원과 그 의미를 지성적 사유와 감성적 상상으로 모색하고 추구해온 그는 이 시집을 통해 현실적 자아를 비우고 내려놓으면서 내면의 본질적 자아에 도달하는 경지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또한 “이번 시집은 ‘내가 나를 찾아’가는 비움의 여정이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라고도 했다.
이 두 시집은 오랜 세월 추구해온 ‘실존-현실-초월’이라는 명제에 하늘과 자연의 순리에 따르려는 ‘관조’와 ‘관용’의 미덕으로 포개보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나에게 근본적으로 시는 더 나은 삶, 온전하고 따뜻한 세계를 향한 꿈꾸기에 다름 아니다. 이즈음은 어떤 감정이든 담박하게 변용시켜 끌어안으며, 자연과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고 그 신비와 비의에 다가가 보려 한다. 순수와 본래성이 손상되지 않은 꿈의 세계는 그러므로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다. 자기성찰을 통한 참된 자아 회복과 그 실현은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숙제를 풀기 위해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보려 한다.
 
 
 
 
 
이태수 작가연보
 
 
1947년
경북 의성에서 부 이인현(성주이씨), 모 장월이(순천장씨)의 장남으로 태어남.
 
1958년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에서 3년 동안 병원 입원 생활하던 아버지 타계. 그 이후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중‧고등학교를 장학생, 아르바이트 등으로 고학.
 
1966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와 노동일을 하는 등 주경야독. 이조년, 이직의 후손이라는 긍지가 컸던 이 시절에는 박목월, 조지훈, 황동규 등의 시에 이끌리고 카뮈, 사르트르 등의 문학작품을 탐독했으며 하이데거, 니체, 야스퍼스 등의 실존철 학에 다가가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했음. 당시 철학도인 김광수의 권유로 철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심.
 
1967년
대구대(현 영남대) 철학과 입학. 대학 재학 시절 제1회 천마문학상(영남대)을 수상했으며 박해수, 김대학 등과 대구지역 대학생 문학동아리 <삼대> 동인으로 활동. 은사인 철학 교수 이종후, 시인 김춘수, 문학평론가 박철희의 지도와 독려가 큰 힘이 됨. 일간 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해 최종 후보에도 몇 차례 올랐으나 낙선. 대학 졸업을 앞두고 대구와 경주에서 개인 시화전 개최.
 
1971년
영남대 철학과 졸업. 육군 소위로 군에 입대(ROTC 9기).
 
1973년
육군 중위로 전역. 매일신문 수습기자로 입사(공채 17기).
 
1974년
매일신문 문화부 기자. 《현대문학》 시 추천(3편씩 2회) 완료로 등단.
 
1976년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창립 동인은 박정남, 박해수, 이경록, 이기철, 이동순, 이태수, 이하석, 정호승이었으며, 동인지를 6집까지 내는 동안 이경록이 타계했고, 정호승, 박정남이 빠지고 강현국, 서원동이 참여).
 
1979년
첫 시집 『그림자의 그늘』(심상사) 출간(문학과지성 시인선 기획에 선정된 줄 모르고 심상사에 원고를 넘긴 후 통보받음).
 
1982년
두 번째 시집 『우울한 비상의 꿈」』(문학과지성사) 출간.
동아일보의 연말 특집 ‘문화계 인물-시인 5’에 이성복, 김광규 등과 함께 선정(문학평론가들 추천).
 
1986년
매일신문 문화부 차장. 세 번째 시집 『물속의 푸른 방』(문학과지성사) 출간. 대구시문화상(문학부문) 수상.
 
1987년
대구대 대학원 국문과 수료. 《대구문화》 편집위원(~1997).
 
1990년
매일신문 문화부장. 네 번째 시집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문학과지성사) 출간. 대구시 문화진흥위원(~1999). 대구시립예술단 자문위원(~1996).
 
1991년
대구시문화상 심사위원.

1992년
매일미술대전, 매일서예대전 운영위원. 대구예술가곡회 창립 주도.
 
1993년
다섯 번째 시집 『꿈속의 사닥다리』(문학과지성사) 출간. 신라미술대전 운영위원.
 
1994년
미술산문집 『분지의 아틀리에』(나눔문화) 출간. 대구예술가곡회 회장(~1999). 영남대 국문과 출강.
 
1995년
여섯 번째 시집 『그의 집은 둥글다』(문학과지성사) 출간.
 
1996년
매일신문 부국장대우 문화부장. 매일신문 북부지역본부장(~1997). 동서문학상 수상.
 
1997년
매일신문 논설위원(~1998). 일곱 번째 시집 『안동 시편』(문학과지성사) 출간. 대구시립극단 자문위원(~2000). 대구시문화상 심사위원, 대구시립예술단 심사위원. 달구벌축제 자문위원.
 
1998년
매일신문 편집부국장(~1999). 대구시인협회 회장(~2000).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자문위원(~2006).
 
1999년
매일신문 논설위원(~2003). 여덟 번째 시집 『내 마음의 풍란』(문학과지성사) 출간. 금복문화재단 이사‧심사위원(~현).
 
2000년
제3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 석암연구소 이사(~현). 대구시문화상 심사위원, 대구시립오페라단 심사위원. 영남판소리연구회 부이사장(~2019).
 
2001년
대구한의대 국문과 겸임교수(~2008).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이념제정위원회 소위원장, 문화행사(개막식, 폐막식. 선수촌 행사 등) 기획단장(~2003).
 
2002년
대구가톨릭문인회 회장(~2005). 백운예술상 운영위원(~2004). 한국문인협회 기획위원.
 
2003년
대구가톨릭언론인회 회장(~2007). 대구아트엑스포 자문위원. 대구시문화상 심사위원.
 
2004년
매일신문 논설실장 거쳐 논설주간(~2007). 아홉 번째 시집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문학과지성사) 출간. 대통령 표창(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공로). 이육사시문학상 운영위원‧심사위원(~2015).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2006).
 
2005년
제3회 천상병시문학상 수상. 대구오페라하우스 운영자문위원(~2010).
 
2006년
매일신문 이사 승진(직책 논설주간).

2007년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출강. 한국문인협회 ‘문단 하나 바로세우기’위원. 대구시립미술관 개관추진위원회 위원, 홍보․마케팅분과위원장, 집행위원(~2010). (주)삼한C1 고문(~2008).
 
2008년
열 번째 시집 『회화나무 그늘』(문학과지성사) 출간. 대구예술대상 수상. 수성폭염축제 추진위원장(~2009).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이념제정위원회 위원장. 대구시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2010). 대구시교육청 교육발전협의회 행정‧재정분과위원장(~2010). 대구도시개발공사 사외이사(~2011). 한국여기회 운영위원‧편집위원장(~2011). 대구시장 표창(대구 오페라 성장 발전 공로).
 
2009년
대구대 국문과 출강(~2010). 경일대 국문과 출강(~2010). 대구현대미술전 운영위원장. 천주교대구대교구 100년사 편찬위원(~2011).
 
2010년
이상화문학제 조직위원장(~2022). 대구문학관 건립 공동추진위원장. 수성페스티벌 추진위원장(~2015). 수성문화재단 이사 선임 심사위원장. 대구문화재단 문예기금 심사위원.
 
2011년
『천주교대구대교구 100년 가톨릭문화예술』 출간. 수성아트피아 관장공모 심사위원장. 대구독서포럼 고문(~현). 이때부터 명예직 외의 일은 하지 않고 전업 시인으로 활동.
 
2012년
열한 번째 시집 『침묵의 푸른 이랑』(민음사) 출간. 육필시집 『유등 연지』(지식을 만드는 지식) 출간. 한국여기회 편집위원장(~2016). 대구문학관 건립 추진 자문위원, 콘텐츠구축사업 기획위원. 《수성문화》 편집위원장(~2018).
 
2014년
열두 번째 시집 『침묵의 결』)(문학과지성사) 출간.
 
2016년
열세 번째 시집 『따뜻한 적막』(문학세계사) 출간. 첫 시론집 『대구 현대시의 지형도』(만인사) 출간. 두 번째 시론집 『여성시의 표정』(도서출판 그루) 출간. 수성못 페스티벌 추진위원장(~2023년).
 
2017년
세 번째 시론집 『성찰과 동경』(도서출판 그루) 출간.
 
2018년
열네 번째 시집 『거울이 나를 본다』(문학세계사) 출간. 시선집 『먼 불빛』(문학세계사) 출간. 대구미술메세나상 수상. 『대구문학사』 편찬‧집필위원, 책임편집(~2020).
 
2019년
열다섯 번째 시집 『내가 나에게』(문학세계사) 출간. 네 번째 시론집 『응시와 관조』(도서출판 그루) 출간. 경주문예대학원장(~2023). 수성빛예술제 추진위원장(~2023).
 
2020년
열여섯 번째 시집 『유리창 이쪽』(문학세계사) 출간. 상화시인상 수상. 『대구문학사』(공저, 대구문인협회) 출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위원.
 
2021년
열일곱 번째 시집 『꿈꾸는 나라로』(문학세계사) 출간. 다섯 번째 시론집 『현실과 초월』(도서출판 그루) 출간.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2022년
열여덟 번째 시집 『담박하게 정갈하게』(문학세계사) 출간. 열아홉 번째 시집 『나를 찾아가다』(문학세계사) 출간. 예술가곡대상 수상. 상화문학제 고문(~현).
 
2023년
스무 번째 시집 『유리벽 안팎』(문학세계사) 출간.
 
2024년
스물한 번째 시집 『먼 여로』(문학세계사) 출간. 시선집 2 『잠깐 꾸는 꿈같이』(도서출판 그루) 출간. 여섯 번째 시론집 『예지와 관용』(도서출판 그루) 출간. 대구디카시인협회 고문(~현). 대구경북예술가곡협회 고문(~현).
 
2025년
스물두 번째 시집 『은파』(문학세계사) 출간. 스물세 번째 시집 『마음의 길』(문학세계사) 출간. 제1회 계명신동집시문학상(계명대 제정) 심사위원장.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심사위원장. 대구예술제 특별기획 이태수 시인전(반세기 활동 되돌아보다) 개최. 한국예총 회장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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