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 출신 원로 시인 24번째 시집 발표
찰나와 영원·비움과 채움 담은 화엄적 시 세계

▲ 이태수 시집 후창
경북 의성 출신 이태수 시인이 스물네 번째 시집 ‘후창’(문학세계사)을 펴냈다.
지난해 시집 ‘마음의 길’ 이후 발표한 작품 가운데 ‘함월산’, ‘달 판타지아’, ‘적멸궁 한 채’, ‘풍경, 늦가을 황혼’, ‘지금 여기 2’, ‘맥문동꽃’ 등 모두 78편을 묶었다.
이번 시집은 삶과 꿈, 찰나와 영원, 비움과 채움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하나의 시적 사유로 엮어낸 것이 특징이다. 시인은 삶을 ‘꿈’, 시를 ‘꿈속의 꿈’으로 바라보며 존재와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명상적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이태수 시의 중심에는 ‘찰나 속의 영원’이라는 인식이 자리한다. 시인은 작은 이슬방울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
“나는 이슬방울 같은 거겠지요 / 풀잎에 맺혔다가 때가 되면 / 기화하거나 흘러내리고 마는 이슬방울.”
시 ‘작은 꿈’에서 풀잎은 하나의 우주가 되고, 이슬방울은 그 우주 위에서 잠시 반짝이는 존재로 형상화된다. 짧은 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지만, 동시에 맑고 투명한 존재의 순간을 상징한다.
문학평론가 박진임은 해설에서 “이태수 시인의 텍스트는 선형적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고 순환하거나 역진하는 시간 구조를 보여준다”고 평한다. 이러한 특징은 ‘오래된 탁상시계’에서 잘 드러난다.
“탁상시계를 보니 가다가 말다가 한다 / 시간은 같은 걸음으로만 가겠지만 / 가다가 말다가 하고 졸다가 깨다가 하니 / 시간이 나의 것이 되는 것도 같다.”
멈추었다 다시 움직이는 시곗바늘은 현실과 몽상 사이를 오가는 화자의 시간 감각을 상징한다.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인간의 내면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의 시간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 또 하나 두드러지는 특징은 ‘경계의 해체’다. 앎과 모름, 있음과 없음, 침묵과 발화 같은 이분법적 구분이 시 속에서 자연스럽게 허물어진다.
대표적으로 ‘지금 여기 2’에서는 찰나와 영원이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을 노래한다.
“지금은 영원 속의 찰나지만 / 이 찰나는 여기의 영원이다.”
이처럼 순간과 영원을 하나로 묶는 사유는 동양적 세계관과도 맞닿아 있다. 특히 ‘빈 항아리’에서는 비워 둠이 곧 충만함으로 이어지는 화엄적 사유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담장 아래서 하늘을 품는 빈 항아리 / 비워 두었으므로 가득 차는 저 화엄.”

▲ 이태수 시인
이태수 시인은 자연을 노래하는 방식에서도 독특한 시적 태도를 보인다. 그는 자연 앞에서 ‘선창’이 아니라 ‘후창’을 선택한다. 자연의 노래를 앞서 부르기보다 그 노래를 따라 부르는 존재로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자연의 노래는 한량이 없으므로 / 후창만 해도 좋은 것일까.”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후창’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거나 해석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노래에 화답하는 존재라는 인식이다.
이태수 시의 또 다른 정서는 기억과 상실의 서정이다. ‘맥문동꽃’에서는 오래된 집터에 핀 꽃을 통해 어린 시절 가족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응달에 오종종 앉아서 / 안 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 그 누이도 아우들마저 / 먼 세상으로 떠나가 버렸다.”
사라진 가족과 시간에 대한 기억은 보랏빛 맥문동꽃 이미지로 환원되며, 개인적 회상을 보편적인 정서로 확장시킨다.
‘적멸궁 한 채’에서는 떠내려가는 단풍잎을 통해 존재의 소멸과 초월을 동시에 노래한다. 단풍잎 하나가 물 위에서 흘러가는 장면은 시인의 삶과 그림자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읽힌다.
1947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이태수 시인은 197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마음의 길’, ‘은파’, ‘먼 여로’, ‘유리벽 안팎’, ‘나를 찾아가다’ 등 20여 권의 시집을 펴냈으며, 시선집 ‘잠깐 꾸는 꿈같이’, ‘먼 불빛’ 등도 출간했다. 또한 시론집 ‘예지와 관용’, ‘현실과 초월’, ‘응시와 관조’ 등을 통해 시론 작업도 꾸준히 이어왔다.
한국시인협회상, 상화시인상, 천상병시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매일신문 논설주간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대구한의대 겸임교수 등을 지냈다.
이번 시집 ‘후창’은 자연과 존재, 시간에 대한 오랜 사유를 담은 결과물이다. 선창보다 후창을 선택한 시인의 태도는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겸허한 시선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출처 : 경북일보(https://www.kyongbuk.co.kr) 곽성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