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5    업데이트: 26-03-16 10:12

칼럼-8

❘이태수 칼럼❘ 경주 시인 이근식
아트코리아 | 조회 115
❘이태수 칼럼❘
경주 시인 이근식
경북신문 2026. 3. 17
 

오랜만에 봄맞이하듯이 느긋하게 국도 따라 경주로 가는 길에 건천 금척리 어귀의 한길 가 이근식 시비(詩碑) 앞에 주차하고 한동안 지난날들을 되새겼다. 나보다 열아홉 해나 연상이지만 문단 등단(1974년 그는 ‘현대시학’, 나는 ‘현대문학’) 동기인 대학 후배라고 각별히 따뜻하게 친절을 베풀던 모습이 선연하고, 현대판 선비 같은 면모가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경주(건천 금척)에서 태어나서 생애의 대부분을 고향 마을에 거주하면서 활동한 토박이 시인 이근식(1928~2017)은 근화여중‧고 교편생활을 했으며, 한국문인협회 경주지부장, 한국예총 경주지부장 등을 지냈고, 1994년 경주문예대학을 창설해 2013년까지 이끌었던 경주 사랑의 화신과도 같은 분이었다.
‘보리까끄라기 선생’이라는 별칭이 시사하듯이 성격이 깔끔하고 깐깐했던 그는 인품은 물론 시도 ‘정결하고 준엄한’ 선비 의식과 마주치게 한다. 여백의 묘미가 깃든 문인화(文人畵)를 연상케 하는 그의 시편들은 군더더기가 없고 화려한 채색보다는 담담하고 간결한 수묵 빛이 번지는 듯한 느낌이다.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서도 ‘지금, 여기’를 뜨겁게 노래하기보다는 지난날의 역사적 현실에 눈을 뜨면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의식을 보여 주는 까닭은 인간성 상실과 비인간화로 치닫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의 다른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격렬한 몸짓을 보이지도 않았다. 언제나 단정하고 차분한 목소리와 자세는 우리의 전형적인 선비를 떠올려보게 하는가 하면, 물질문명의 발달이 데려온 인간성 상실 이전의 상태를 그리워하면서 자연과의 진화나 자연 회귀를 꿈꾸는 공간으로 이끈다.
이 때문에 그의 시들은 현대적인 감수성과 방법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현대회화보다는 이미 과거의 형식이 되어버린 전통 문인화를 연상케 하고, 그 같은 기법과 정신 속에 오늘의 현실을 몸담음으로써 조선조의 선비가 오늘의 현실에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을 안기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의 감수성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낡았다는 말은 아니다. 문인화를 연상케 하는 기법이나 정신을 차용하고 있을 뿐이지 구사되고 있는 언어는 물론 감수성이나 시각이 참신하고,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점이 그의 시를 독특하게 보이게 하고, 오히려 돋보이기도 한다.
 
‘우사정 대청에 오르면/매미소리 바람소리가/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힌다./오늘의 어두운 골목을/눈이 시린 거리를 휩쓸고 가는/맑은 바람이 인다./어지럽던 한말/풍운의 한 세기를 휘어잡고/일어서는 이조 선비/대숲에 이는 서늘한 기원이/수묵 빛으로 녹아 흐르고/처마 끝에 날아 앉아/지저귀는 새 소리/먼 날의 꿈도 풀어내면서/마침내 정결한 물소리로 가라앉는다.’
―시 ‘우사정(又思亭)에서’ 전문
 
그의 시적 특성이나 정신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시 중의 한 편인 이 시에는 역사의식과 선비 의식이 관류한다. “어지럽던 한말/풍운의 한 세기를 휘어잡고/일어서는 이조(조선조) 선비”를 “오늘의 어두운 골목”에서 떠올리면서 “맑은 바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숲에 이는 서늘한 기운이/수묵 빛으로 녹아 흐르고” 마침내 “먼 날의 꿈”이 “정결한 물소리로 가라앉는” 인식과 마주치고 있기도 하다.
이 같은 인식은 그의 다른 시 ‘만취정 가는 길’에서는 인간(선비) 존재의 유한성을 재인식하는 변주로 나타난다. 이 시에서는 “잡초 속에 누워 흐르는 물은 / 이조 이야기를 도란거리고”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으며, “구름처럼 가던/나귀 탄 선비”도 어쩔 수 없이 ‘바람’이었고 ‘물’이었다는 ‘허무’와 무상감(無常感)도 표출해 보인다.
이근식 시인은 경북문화상, 예총예술문화상, 경북문학상, 경주시문화상, 윤동주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시집 ‘모량부의 여울’,‘비 내리는 밤’, ‘경칩이 지난 하늘 아래서’, ‘꽃눈으로 마감하고 싶은 새벽’, ‘백두산 가는 길’, ‘노자(老子)의 물’, ‘여든의 아침 비’와 ‘고희 기념 문집’, ‘구림 이근식 시선집’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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