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수 칼럼]
봉암 김정현 시비
경북신문 2026. 7. 21
“비 갠 긴 언덕에 풀빛이 푸른데/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대동강물은 그 언제 다할 것인가/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고려시대의 문인 정지상(鄭知常)의 시 ‘송인(送人)’은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비가 그쳐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려 하는데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포구의 언덕에 난 풀은 비에 씻겨 푸르름만 더하고 있다니 ‘이별 시의 압권’이라는 평가가 나올 만도 하다.
이 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성이지 않은가. 그러나 요즘 세태는 ‘망각의 강’을 살아서 건너기 위해 안달하는 것 같기도 해 삭막하기 그지없다. 사소한 일에도 원수가 돼 돌아서는 사람들의 얘기가 떠도는 게 다반사다.
‘망각의 강’인 ‘레테’에 대해 일찍이 철학자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 강을 인용한 바 있다. 그는 이데아의 세계에 살던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강이 ‘레테’이며, 이 강을 건너면 이데아의 세계에서 살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고 만다고 했다.
자연은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며, 우주는 그 질서와 순리를 두루 포용한다. 그러나 그 자연과 우주 질서 속에 놓인 인간은 보잘것없는 존재다. 이 철리를 깨달은 선현(先賢)들은 자연의 섭리에 겸허하게 순응하면서도 ‘사람의 길’에 대한 무상감을 비켜서지는 않고,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세계에 회귀하고 싶어 하는 소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근래에 향토의 한학자 봉암 김정현(鳳菴 金正顯, 1903~1995)의 한시들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구한말에 태어나 시대와 역사적 변전을 여러 차례 온몸으로 체험했을 그는 일제 강점기엔 독립운동에 동참하기도 했으며, 평생 향리를 지키면서 높고 깊은 이데아를 꿈꾸며 시문을 추구한 ‘올곧은 선비’였던 것 같다.
향리에 묻혀 살았으므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남긴 한시들에 ‘주마간산’ 격으로나마 다가가 보면서는 현대판 선비의 정신세계와 그윽한 시적 경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춘(餞春)’은 그중 향리의 냇가에서 봄을 보내는 소회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자연과 인생을 깊이 성찰하고 있으며, 격조 높은 풍류(風流) 의식이 관류하기도 한다.
“養和風景露天眞(화창한 풍경을 기른 자연의 섭리가 드러나고)/多士登臨共惜春(선비들은 산과 물에서 가는 봄을 아쉬워하네)/經雨磎山明且潔(비가 그친 시내와 산은 밝은 데다 해맑으며)/拂雲楊柳淡還新(구름 떨친 버드나무엔 연한 빛 새로이 도네)/九旬爾亦行過客(아흔 날만 사는 봄은 역시 길 떠나는 나그네)/百歲吾今逆旅人(오랜 세월 살아온 나도 이때를 마중하는 길손)/秉燭茲遊猶有恨(불 밝힐 즈음에는 이 놀이가 오히려 안타깝고)/東君南渡望無津(봄이 남쪽으로 가려는데 나루도 보이지 않네)” ―‘餞春(봄을 보내며)―藏待川邊(장대 냇가에서)’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질서정연한 자연의 순리에 착안하며 화창한 봄을 맞아 자연의 섭리에 감탄하면서도 다시 그 질서를 따라서 가고 있는 봄을 아쉬워한다. 이 감탄과 아쉬움은 자신뿐 아니라 등임(登臨)하는 많은 선비들도 마찬가지라는 인식을 대동한다.
이어 비가 그친 뒤의 시내와 산은 밝고 해맑으며 구름 걷힌 버드나무의 새 생명력에 마음 가져가지만, 아흔 날(석 달)만 머무는 봄이나 오랜 세월 동안 봄을 마중해 온 자신도 ‘여인(旅人)’이나 ‘과객(過客)’에 지나지 않는다는 무상감에 젖는다. 이 무상감은 정신적인 초월 의지를 지향하고 포용한다고도 봐야 하리라.
그다음의 대구(對句)는 이 시의 백미 대목으로 읽힌다. 날이 저물 무렵엔 이 풍류마저 되레 안타까울 뿐 아니라 “봄이 남쪽으로 가려는데 나루도 보이지 않네”라고 노래하고 있듯이 봄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하는 심경을 상징적으로 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셋째 아들인 김극년(金克年) 전 대구은행장의 주선으로 지난달 경북 의성군 봉양면 장대2리 앞의 장대천이 바라보이는 마을 초입에 건립된 ‘봉암 김정현 시비(詩碑)’에는 이 한시가 필자의 한글 번역과 함께 새겨져 있다. 어떤 시각으로 보든지 이 시비는 이 삭막한 시대의 귀감이 될 만한 ‘아름다운 상징’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