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178    업데이트: 26-09-30 10:13

시간 여행

이태수 시집

시간 여행

문학세계사

이 태 수 시인

1947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197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후창』(2026), 『마음의 길』(2025), 『은파』(2025), 『먼 여로』(2024), 『유리벽 안팎』(2023), 『나를 찾아가다』(2022, ), 『담박하게 정갈하게』(2022), 『꿈꾸는 나라로』(2021), 『유리창 이쪽』(2020), 『내가 나에게』(2019), 『거울이 나를 본다』(2018), 『따뜻한 적막』(2016), 『침묵의 결』(2014), 『침묵의 푸른 이랑』(2012), 『회화나무 그늘』(2008),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2004), 『내 마음의 풍란』(1999), 『안동 시편』(1997), 『그의 집은 둥글다』(1995), 『꿈속의 사닥다리』(1993),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1990), 『물속의 푸른 방』(1986), 『우울한 비상의 꿈』(1982), 『그림자의 그늘』(1979). 시선집 『잠깐 꾸는 꿈같이』(2024), 『먼 불빛』(2018). 육필시집 『유등 연지』(2012). 시론집 『예지와 관용』(2024), 『현실과 초월』(2021), 『응시와 관조』(2019), 『성찰과 동경』(2017), 『여성시의 표정』(2016), 『대구 현대시의 지형도』(2016). 미술산문집 『분지의 아틀리에』(1994). 저서 『대구문학사』(공저, 2020), 『가톨릭문화예술』(2011) 등. 한국시인협회상(2021), 상화시인상(2020), 천상병시문학상(2005), 한국가톨릭문학상(2000), 동서문학상(1996), 대구시문화상(1986), 예술가곡대상(2022), 대구미술메세나상(2018), 대구예술대상(2008) 등을 수상했으며, 매일신문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대구한의대 국문과 겸임교수, 대구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시인의 말

스물다섯 번째 시집을 낸다.
가듯 말 듯 가는 길을 가기는 간다.
마음과 달리 어디 닿을지 모르지만
꿈꾸면서 나서는 먼 길이다.
2026년 가을
이태수

차례

Ⅰ
오늘 여기
빈손
유리벽 앞에서
솔숲길
저물녘의 솔숲
산
무상無常
홀로움
시간의 회전의자
요즘은 홀로
고독의 초상
강물이 강을 떠나듯
흘러가고 따라가고
물에 뜬 달과 별
어느 날 강가에서
마음의 그늘
마음속에 때로는
먼 수평선
무명無明의 여로
눈과 귀가 있어도
Ⅱ
겨울 창가에 앉아
강설降雪 교향악
창밖에 내리는 눈
고목 앞에서
봄 몸살과 멧새
뜨락의 봄 잔치
봄비를 맞으며
지는 꽃잎을 보며
꽃비
노신사
부활 꽃불
장미, 장밋빛
이른 아침에
배롱꽃 필 무렵
가뭄과 가문비나무
게릴라성 폭우
난세亂世, 난타
트라우마
폭염, 나무수국
늦더위 별곡
Ⅲ
깊은 밤, 달빛
달빛 소나티네 1
달빛 소나티네 2
달빛 소나티네 3
미리내
해후邂逅
강물에 뜨는 별
향수, 실향
고향마을 앞에서
고향마을
꽃무릇, 그 처녀
너와 나
주객 양치상
두 예술가
명수
그 사람 보고 싶네
뻐꾸기에게
는개, 꿈
추억, 어린 시절
추억, 강가에서
Ⅳ
염소와 양 떼
향일성向日性 우울증
꿈속의 빌런
불신의 늪
대인 기피증
거리두기
세태, 각단
별 하나 뜬다
미명微明
주어진 길
만나manna
칠포 해파랑길
모래밭에서
쓴소리 친구
오랜 친구
버릇 타령
오늘 쓰는 시는
마지막 새날같이
❘해설❘ 박진임(문학평론가)

Ⅰ

오늘 여기

앞을 바라보기 전에 뒤가 돌아보인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이 길이라서
지난 길에 더 마음이 가기 때문인 것 같다
 
가기는 가지만 어디로 가는지
언제까지 갈 수 있을는지도 모르는 데다
뒤돌아볼 때 내가 잘 보이기도 해서 그럴까
 
나를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오리무중
어디에 가서 찾게 될지 막막하고
가다 되돌아온 적도 다반사 아니던가
 
그러니 앞을 내다보기보다 먼저 되돌아보고
가보아도 역시 거기가 거기일 뿐 아니라
어디에 이를지도 모르는지라
 
오늘을 첫날이자 마지막 날같이 맞으면서
지금이 최선의 때가 되기를 기대하므로
오늘 여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겨진다

빈손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는
강가에 앉아 숨 크게 들이켜본다
 
여기의 이 순간이 꿈결과도 같다
마음대로 햇볕을 쬐고 공기 마시며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
여기까지 흘러온 날들도 꿈만 같다
 
이 꿈결은 자연의 품속인 것을
안 보이는 바람이 일깨우는 걸까
흔들어 깨워주는 것도 같다
자연의 베풂을 새삼 느끼는 지금
여기까지 오게 해준 게 무얼까
 
그냥 받기만 하는 햇빛, 공기와 물,
안 보이게 흐르는 바람,
끝없이 거듭되는 이 자연의 숨결과
그 바이없는 품속 덕분 아니던가
 
빈손으로 왔다 가는 이 여로에서
빈손을 새삼 들여다본다

유리벽 앞에서

유리창은 투명하나 견고한 벽 같다
나는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는 나를 일깨우려 해도
나는 바라보기만 했던 걸까
 
봄엔 나무에 돋아나는 새잎을 바라보고
지금은 지고 있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가까스로 자연의 순리를 떠올려보게 된다
나무는 늘 제자리에 선 채 나를 보며
느낌이 어떠했을지 짐작해 보게도 한다
 
나무는 언제나 자연의 순리를 따르지만
유리창 이쪽의 나는 순리를 거스르고
제자리걸음이나 뒷걸음질을 한 게 아닌지
앞으로만 가는 시간에 끌리어 가듯이
창밖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지 않았는지
 
창 저쪽 나무는 마냥 묵묵히
지금도 들여다보고 있겠지만
머잖아 나도 온전하게
이 벽을 넘는 날이 오기는 할 건지

솔숲길

마음이 아픈 날 솔숲길을 걷습니다
 
소나무도 바람도 무심한 듯한데
 
솔잎 스치는 바람이 마음 보듬는지요
 
아무도 보이지 않는 솔바람 길
 
안 보이는 바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때로는 나와 보조를 맞추면서
 
안 보이지만 부드러운 손길로
 
품어온 솔향을 안겨 주기 때문인지요
 
솔바람이 아픈 마음 데려가는지
 
모를 일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되돌아보면 아픔마저 한갓되어
 
안겨드는 솔향에 마음 실어 봅니다

저물녘의 솔숲

온달이 떠오르고 작은 별들은 더불어
또는 따로 반짝이며 다가오는 것일까
 
산발치의 솔숲은 한량없는 품속 같다
 
달빛과 별빛을 끌어당겨 은밀히 쟁인
솔향을 그윽하게 뿜고 있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속에 들어 있다
저물녘 솔숲에서 달과 별을 바라보면
그 빛과 솔향이 나를 품는 듯도 하다

산

아침에 집을 나서자마자
가려던 길이 바뀐다
 
사람들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불현듯 산이 나를 불러들인다
 
산자락에는 풀꽃들
산골을 밝히는 멧새들 소리
계곡물은 간밤의 악몽을 씻어준다
뜬구름 하나 소나무 가지에
걸린 듯 멈춰 있다
 
산길 따라 걷다가 멈춰 서서
산의 품에 지그시 안겨 본다
 
산이 나를 불러들여
푸근히 품어주는 것 같다

무상無常

산중에 들면 내가 잘 보인다
그리도 찾아 헤매던 내가
풀숲 그늘의 작은 풀잎 하나다
 
소나무 숲속 인적도 없는
오솔길 건너편에서 흔들리는
풀잎을 나무들이 지켜본다
하늘은 먼 데서 내려다보고
멧새들이 가끔 지저귄다
 
내가 풀잎으로 흔들리는 동안
뜬구름이 바라보다 가고
바람은 무심하게 오고 간다

홀로움

―황동규 선생님께
 
시작이 있을 뿐 끝이 없는 것이
꿈인 것 같습니다
저물녘에 꾸는 꿈도 환해집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길은 먼 듯합니다
 
선생님 따라 바닷가에 왔습니다
빈 뻘을 바라보며
안 보이는 물새 소리도 듣습니다
저녁 안개 걷히고
작은 강물이 흘러들고 있습니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아납니다
별이 말을 걸어오고
끝이 따로 없는 풍경 속에 들어
선생님의 홀로움에
슬며시 다가가 끼어들어 봅니다

시간의 회전의자

―김주연 선생님께
 
회전의자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면
왜 그런지 먼 것들이 가까이,
가까운 것들이 멀어 보입니다
선생님의 그 회전의자 같아서일까요
그뿐만도 아닙니다
아득한 옛날들이 가깝게 다가오는데
이즘 날들은 물러나 버립니다
선생님 모습도 한가지입니다
오래 뵈옵지 못했기 때문일는지요
 
간밤엔 카페 플라츠*에 갔었습니다
꿈속이긴 했지만 그 카페에서
뵈온 선생님은 옛 모습으로
옛날의 저를 반가이 맞아주시더군요
반세기 전이었지요
처음 뵙던 때의 기억이 안 잊힙니다
아마도 그 시절의 선생님이
깊이깊이 새겨진 탓이겠지요
저도 회전의자에 앉아 돌아봅니다
*김주연 선생님의 용인 단골 카페

요즘은 홀로

요즘은 홀로 있으면 편안하다
내가 나를 불러와서 만나고
오지 않을 때는 찾아 나서기도 한다
 
홀로 왔다 홀로 가야 할 세상이라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으면
좀체 오지 않던 나도 나를 찾아온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외롭거나
외로워 사람들을 찾아가던
지난 시절은 멀어져가기 때문일까
 
두려워하던 고독이 이젠 위무하듯이
나를 그윽하게 그러안는다
푸근히 그 품에 들기도 한다

고독의 초상

거울 앞에 앉거나 설 때가 잦아지며
마음이 한결 푸근해지는 것 같다
 
지금의 나와 나를 보는 내가 마주하는데
지난날 나와 다가오는 날의 내가
은근슬쩍 끼어들기 때문에 그런 건지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그 속의 나는 나를 본다)
 
거울 속의 나는 시공도 아랑곳없는지
가거나 올 나를 두루 데리고 와서
지금의 나와 어우러지게 부추기기도 한다
 
나는 외롭기보다 고독한 것 같고
고독한데도 마음은 되레 푸근해진다

강물이 강을 떠나듯

강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강물이 흘러들어 떠나간다
나는 언제나 이 자리에 있고 싶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고 싶은 나도
강물이 흘러와서 가버리듯
가지 않으려 해도 가고 있다
 
가고 싶은 곳이 아닌 데로만
가는 듯해 멈춰 서고 싶다
강가의 소나무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 없는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같은 자리에 선 채 간다고
와서 가지 않을 수는 없다고

흘러가고 따라가고

개울에 발을 담그고 멍때리듯이 앉아
 
물살의 느낌을 지그시 받아들인다
 
나를 스쳐 가는 물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흘러간다
 
소슬바람도 옷자락 흔들며 지나가고
 
하늘엔 구름이 떠서 흘러간다
 
구름 따라 물길 따라
 
나도 아래로 먼 데로 가고 있는지
 
개울에 발을 담근 채 넌지시 바라본다

물에 뜬 달과 별

산길 걷다가 귀가하는 저물 무렵
산발치의 못물에 뜬 온달을 바라본다
달은 차면 기울게 마련인데
물 위에 내려온 별들이 마치 식솔 같다
열흘 전에는 빛나는 별들이
초승 좀 넘긴 달을 길손 맞듯 하더니
사뭇 대조적인 모습들로 비친다
 
비면 채워지고 차면 비워내는 달의
한결같은 운행은 무엇을 시사하는 걸까
역할이 때때로 다른 별빛도
순리에 따르라는 전범을 보여주는 걸까
사람의 도리도 저와 같지 않을는지
차면 비워내야 다시 차오르는데
자꾸 채우려고만 하고 있지나 않은지
 
순리를 거스르지는 않는지
달과 별들을 바라보면서 돌아보게 된다
어두울수록 빛나는 모습도
우리에게 무얼 가르친다고 봐야 할지
자성해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어느 날 강가에서

강가에 앉아 눈 감고 있으면
걸어온 길이 물길을 거스르듯 다가옵니다
그 길을 한참 거슬러 오르다 보면
오랜 옛날로 되돌아가는 발길이
머무르는 곳도 더러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잃어버린 그 풍경 속에 깃들어
그리웠던 사람들과 기껍게 만나고
더 가다가는 다른 세상으로 떠난
친구도 만나서 회포를 풉니다
 
눈을 감아도 흘러가는 강물은
계속 아래로 가는 소리를 냅니다
귀 기울여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거슬러 오르던 발길이 다시 되돌려집니다
 
시간도 강물도 흘러가고 있듯
나도 그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한동안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보면
강가의 나무들이 나를 내려다보는 듯하고
강물은 아래로만 흘러갑니다

마음의 그늘

빛을 받은 만큼 되쏘는 달처럼
마음도 그럴 줄 알았었는데
그늘에 속절없이 묻히어버린다
 
바탕이 캄캄해질수록
영롱한 별들을 올려다보면
부럽기 이를 데 없다
달빛도 거의 마찬가지다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을
떠올려보면 속수무책
어둡고 무거워지는 마음을
어찌해야 좋을 건지
 
바람에 흔들려도 중심 잡지만
그늘에 묻혀버리는 마음은
빛을 되비추지 못해 안타깝다

마음속에 때로는

마음속에 때로는
 
고삐가 풀린 망아지를 들이고 싶어진다
 
가듯 말 듯 되돌아오고 마는 나그넷길에
 
천방지축 튀기도 하는 동력장치 하나쯤
 
달고 싶어서이다

먼 수평선

먼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본다
파도가 끝없이 밀리어오는
바위섬의 해송 그늘에 앉아 바라보면
가물가물 떠가던 배도 보이지 않는다
바다도 둥글기 때문이리라
 
가까이 느끼는 날숨은 거칠어 보이나
들숨은 넓고 깊으며 그윽한 포용력을
지녔다는 걸 알 듯도 하다
수평선에도 어둠살이 내리면
먼바다는 이불을 끌어당기듯
저녁노을과 별들이 수놓는
하늘 자락을 천천히 뒤집어쓰는 걸까
해송 아래 그대로 눌러앉아 바라본다
 
파도는 끝없이 밀려오지만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있던 수평선은
둥글게 어우러지기라도 하는 것 같이
아래위가 흐려지는 듯하다
그 광경이 나를 붙잡고 있다

무명無明의 여로

먼 하늘에 띄우는 풍등 하나
 
마음자리에는 누름돌도 하나
 
보이다 말다 하는 불빛 하나

눈과 귀가 있어도

눈과 귀가 있어도 더러는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안 본 척
 
코와 입이 있어도 되도록
말을 삭이고, 냄새나도 안 그런 듯
 
무덤덤 마음 내려놓는다
 
말이 흉기로 되돌아오지 않게 하고
어떤 냄새에도 안 흔들리며
가급적 덜 보고 덜 들으려고 한다
비우고 지우며 살려고 한다

Ⅱ

겨울 창가에 앉아

어제는 맑은 날이었으나
오늘은 눈보라 사납지만 받아들인다
주어진 길로 그냥 가기로 한다
 
눈보라 치지 않은 겨울이 있었던가
그런 한겨울이 없는 봄이 있었던가
 
앙상한 나무들은 흔들리면서도
머지않아 새잎을 돋우어 낼 태세다
온몸으로 중심을 잡는다
 
더욱 사나워지는 눈보라
그 틈 사이로 어제도 내일도 보인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다시 온다
 
창가에 앉아 바깥 광경을 바라보며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을 듣는다
 
몇 해 전에 아내와 함께 듣던
베네치아에서의 그 새소리도 들린다
눈만 감으면 봄날 속이다

강설降雪 교향악

겨울 산에서 내려다보면
 
눈 내리는 광경이 자연의 교향악이다
 
시시각각 마음이 어디로 가든지
 
그 선율에 따라가게 풀어놓는다
 
하늘의 천사들도 춤추며 뛰어내리는지
 
땅 위의 모든 것들은 황홀한 듯
 
마냥 눈송이를 맞이한다
 
불현듯 프레스토로 분위기가 바뀌어도
 
바람을 탓하지는 않는다
 
높낮이가 각양각색인 지붕들도
 
들판의 논밭, 나무들도 모두 하나같이
 
희디흰 눈 속에 파묻히고 있다
 
솜이불을 끌어당겨 덮으려거나
 
눈송이 교향악에 빠져드는 것 같다
 
마음도 흰 세상에 든다

창밖에 내리는 눈

눈 내리는 날은 창가에 앉아
눈 속에 희디희게 덮이는 풍경을
멍때리듯 바라본다
지우고 싶은 것들을 죄다 그렇게
두고 싶어서일는지
 
지우려야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때들이 적잖으니
 
희디흰 눈송이들이
행여 치유해 줄 천사로 보여선가
괜한 바람이겠지만
눈 내리는 날은 철없는 아이처럼
창밖 눈 풍경에 마음 설렌다

고목 앞에서

새잎 돋아나는 고목에 마음 붙잡힌다
조아리듯 한참 바라보노라니
하늘이 넌지시 내려다보는 것 같다
 
오랜 세월 제자리에만 선 채
비바람과 한파도 받아들이고 삭인
풍모가 성자聖者 같아 보인다
 
때마침 어디서 날아든 멧새 떼인지
빈 가지마다 노래를 끼얹는다
새소리는 마치 그레고리안 성가 같다
 
언젠가 분도수도원 미사에서 듣던
그 성가들을 되새기게 한다
고목 앞에서 두 손 모으고 듣는다

봄 몸살과 멧새

이른 아침 유리창 밖 회화나무 가지에서
멧새 한 마리가 지저귄다
채근하듯 나를 바깥으로 불러내는 걸까
 
어제 그 새인지 모르지만
어제와 같은 시간에 똑같이 지저귄다
며칠째 바깥출입을 못 해
안쓰럽게 여겨서일는지 알 수 없으나
오늘은 꼭 외출하려 한다
 
해마다 봄이 올 무렵에는
거의 예외 없이 지독한 몸살을 앓으면
멧새가 찾아오곤 했었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이르는 것인지 모르겠다
 
창유리 가까이 다가가 내다보고 있으니
멧새가 반기듯 지저귄다
때맞춰 두 마리 멧새가 가세하기도 한다

뜨락의 봄 잔치

봄 아침 뜨락이 유난히 환합니다
붉은 영산홍들이 활짝 피고 난 뒤
철쭉꽃들도 슬그머니 가세합니다
마치 형과 아우, 봄 잔치를 벌이는
친지 모임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 옆엔 보랏빛 수수꽃다리꽃들과
새빨간 튤립꽃들도 끼어들었군요
 
새들도 가만히 있을 리 있겠어요
멧새들이 몰려 와 야단법석입니다
 
꽃들은 노래 세례를 받는 거지요
겨우내 숨죽이던 뜨락의 분위기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들뜨고 있어
하늘의 구름마저 내려올 듯합니다
봄타는 나만 불 보듯 바라봅니다

봄비를 맞으며

가늘게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걷는다
 
하루가 다르게 풋풋해지는 풀잎들
영산홍 꽃잎들이 빗소리를 그러안는 듯
상기되는 사이 멧새들이 날아든다
 
들릴 듯 말 듯한 빗소리에 포개어지는
멧새들의 중창이 발길 멈추게 한다
한 쌍의 연인이 지나쳐 가며 멀어진다
 
봄 속으로 서둘러 들고 있는 걸까
연인들 뒤따라 풀숲길을 걸어가다 보니
막 피어오르는 풀꽃들이 반겨준다
 
봄비가 따스하게 마음에도 젖어든다

지는 꽃잎을 보며

시나브로 지는 꽃잎을 바라보니 아련하다
 
가버린 옛날들이 아련하고
 
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꿈결같이
 
다가오다가 아련해진다
 
시나브로 내리는 꽃비를 맞고 있노라면
 
가고 있는 세월의 뒷모습이
 
꽃잎 사이로 아련하게 보이다 말다 한다

꽃비

상실감에 빠져 있다가 꽃비를 맞는다
 
지는 벚꽃들이 마음을 바꿔준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 하는
 
나도 그런 나그네가 아니던가
 
마음 바꾸자 잃어버린 것들이 하나둘
 
꽃잎이 지듯이 미련에서 떠난다
 
꽃비를 맞으면서 먼 하늘을 바라본다

노신사

한 노신사가 벚나무 아래 서서
흩날리는 벚꽃들을 맞아들이고 있다
며칠만 피었다가 지는 꽃들이라서
지는 꽃에 더 애착이 가는 것일까
 
노신사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으니
지는 꽃을 맞이하는 연유를 알 것 같다
꽃이 피기까지는 긴 날들이었지만
며칠 만에 그 꽃들이 다 지고 말지라도
그 과정이 더욱 소중한 탓일 테다
 
지는 꽃들을 맞아들이는 노신사는
오랜 지난날을 되새겨보는가 하면
다가올 날들을 아름답게 마중하려고
꿈길에 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활 꽃불

지난해 산불 난 골짜기를 걷다
잿더미에 핀 참꽃 앞에 발길 멈춘다
꽃잎들이 마치 붉은 불꽃 같다
 
죽을힘을 다해 뿌리로 힘을 모았다가
때를 기다려 새 생명에 불 지피는
잿더미 위의 저 꽃은 참으로 꽃 같다
 
때마침 부활절 이른 아침 한때
모진 고난을 이겨내고 활짝 피어난
참꽃들을 꽃불이듯 들여다본다

장미, 장밋빛

뜨락의 장미꽃들이 지네
꽃들이 피기를 몇 달이나 기다려
달포 가까이 마음에 불 댕겨주던
장미 꽃잎들이 떨어지네
마음속의 붉은 꽃잎들도 지네
 
잊힐 듯 말 듯이 잊히지는 않는
세월 저편의 아득한 옛날
되돌아올 수 없는 옛사람들도
해마다 장미꽃이 필 때는
왜 장밋빛으로 다가오곤 하는지
만나면 헤어질 수밖에 없어도
또다시 만날 수 있더라도
못 오는 옛날을 데려오는 장미는
마음에 불 지폈다 꺼트리곤 하네
그리움에 불 지르다 지네

이른 아침에

이른 아침에 마지막 날을 맞이하듯
뛰어내리는 햇살을 그러안는다
앞뜰에는 나리꽃들이 막 피어나고
멧새 몇 마리 경쾌하게 포물선을 그린다
 
내일을 기대하던 지난날과는 달리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게 된 지도 어제오늘이 아니지만
햇빛이 유난히 눈부신 것 같다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아서 그런지
 
날마다 마지막처럼 살려고 해서 그런지
피어나는 나리꽃도 나는 멧새들도
이 찰나를 절정으로 여기면서
뛰어내리는 햇살을 쟁이는 것 같다

배롱꽃 필 무렵

이른 봄의 꽃들이 지자 그가 떠나고
꽃피는 배롱나무에서 매미들이 운다
그를 애도하는지 그 소리도 붉다
 
그를 떠올려보면 애달프기 그지없다
겨우내 홍매화와 수선화를 기다리고
목련, 개나리, 벚꽃을 그리도 좋아하더니
그 꽃들이 지니 미련마저 지웠을까
병마를 끌어안듯이 하늘 품에 든 걸까
 
그는 왜 이른 봄의 꽃들만 좋아했을까
여름과 가을에 피는 꽃들도 적잖고
겨울에 피는 꽃은 더욱 아름답지 않은지
목숨을 겨우살이같이 부지해야 하고
기생하듯이 살아왔다고 여겼던 건지
 
오랜 세월 병마와 더불어 산 그는
새 생명력이 약동하는 봄을 기다리고
그 절정의 순간만을 붙잡고 싶었을까

가뭄과 가문비나무

가문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가늘게 내리는 빗속에 줄을 지어
 
언덕 아래의 저수지 수위를 높여 주려는지
 
하늘을 뚫어줄 태세 같아 보인다
 
모처럼 기다리던 비를 맞으며 걷고 있지만
 
가문비나무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저수지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멀리 바라보이는 들판에는 몇몇
 
농부들이 일손 놓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가는 비를 맞으니 감질나 그럴까
 
건장마가 열흘째 이어지는 한여름 이 한때
 
가는 비 내리는 언덕을 서성이며
 
하늘 찌를 듯한 가문비나무들을 쳐다본다

게릴라성 폭우

창 너머 새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진다
계수나무 잎사귀들이 흔들리고
바람이 소나기를 예고하는지 창틀도 흔든다
새들도 수상한 바람의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여느 때와는 달리 계수나무에서
다급한 듯 소리를 한층 높이고 있다
 
창밖은 순식간에 캄캄해진다
천둥과 번개, 유리창을 강타하는 비바람,
새들은 간신히라도 어디에 피신했을는지
 
순간, 며칠 전 폭우 재난이 뇌리를 스친다
 
비에 흠씬 젖은 사람들이 몇몇 허둥지둥,
텔레비전엔 ‘외출 자제’라는 자막이 뜬다
요즘은 전쟁도 따로 없다던가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창밖에는 다시 뜨거운 햇빛이 뛰어내리고
계수나무 가지에 새들이 날아와 지저귄다
창가의 나는 우두커니가 될 수밖에,

난세亂世, 난타

강둑길을 걷다 하늘을 쳐다본다
 
강가 마을 산마루에 걸린 매지구름
 
난타 공연이라도 할 태세다
 
미친 여인이 널뛰듯 하는 세상이라
 
구름도 맞장구치려 하는가 보다

트라우마

매지구름이 앞산 마루에 걸터앉는다
 
변덕과 심술 심한 사람이 문득 떠오른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피하기만 하던 그 사람을 생각하는 사이
 
천둥까지 동반한 폭우를 쏟아붓는다
 
피할 겨를조차 없이 그 세례 받으면서도
 
그 사람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오랜 트라우마 때문일까
 
요행히 그 사람 마주친 지는 오래다

폭염, 나무수국

한여름 땡볕에 하얀 나무수국들이 핀다
그 옆에서는 나리꽃들이 허리 구부린 채
반기는 인사를 하는 걸까
몇 잎씩 꽃잎이 지고 있는 나리들은
나무수국의 꽃잎이 부럽고
겨울에도 꽃잎을 매달고 서 있던 자세를
기억에서 경외하듯 데려오기 때문일까
 
올여름은 진즉부터 유난스레 무더워서
견디기 어렵다는 사람들이 많은 데다가
아우성도 진동하고 있다
그런데 올해 나무수국은 왜 이리
탐스럽게 피어나는 걸까
나리 옆에 서서 그런 선현들을 기리듯
허리 구부려 나무수국을 들여다본다

늦더위 별곡

늦더위도 한풀 꺾이는지
 
나리들이 허리 굽히며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다
 
남은 꽃잎을 다 떨구려 하는 것도
 
그 예절에 들어 있는 걸까
 
나리들과 더불어 나도
 
늦더위 배웅하러 나설까

Ⅲ

깊은 밤, 달빛

잠이 오지 않는 여름 깊은 밤
 
유리창 너머 환한 달빛
어둠 속에서 내가 나를 찾아 헤매다
 
마음은 슬며시 창밖으로 끌리어나간다
 
내가 찾고 있던 나도 따라나서는 건지
 
마음이 한결 환해지는 것만 같다
 
요즘 유난히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돌고 헤매면서 목말라하기도 했지만
 
깊은 밤의 달빛이 구세주라도 된 걸까
 
대문 밀고 나서서 달빛 따라 걷는다
 
그토록 애를 태우면서
 
내가 찾던 내가 앞장서 간다

달빛 소나티네 1

눈 감고 옛날로 거슬러 오르면
여름 초저녁 옛집마당이 떠오릅니다
 
온 가족이 멍석에 둘러앉아
어머니가 손수 만든 국수를 먹을 때
비단결처럼 내리던 달빛
달 모양의 멍석 위에서, 같은 모양의
두레상에 둥그렇게 앉아
달빛 섞어 먹던 손칼국수의 그 맛도
세월 저 너머서 다가옵니다
 
그 옛날은 아득하게 가고 말았지만
그때 그 달빛은 한결같습니다
 
오늘따라 그 옛집마당 여름 초저녁
우리를 그러안듯 내리던 달빛,
둥근 멍석 두레상에 둘러앉아
손칼국수를 먹던 옛 가족이 그립습니다
창가에 앉아 달빛 끌어당기며
가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때로 눈을 감고 거슬러 오릅니다

달빛 소나티네 2

날 저문 뒤 달빛을 따라나섭니다
 
어두워질수록 환하게 내려오는 달빛은
 
안 가본 길을 열어줄 것 같아서입니다
 
날이 환할 때는 안 보이던 길이
 
따라가다 보면 열릴지도 모릅니다
 
그 길은 간 적이 있었던 길이거나
 
간 적 없어도 보이는 길이 아니라
 
꿈속에서만 보이다 말던 길이며
 
간절하게 꿈꾸어오던 길이기도 합니다
 
달빛이 품은 신비는 비의 그 자체여서
 
그 속 깊이 들어가고 싶어집니다

달빛 소나티네 3

달빛이 별빛을 다독이고 있는지요
벽오동 커다란 잎사귀에 내리는 달빛은
별빛들을 그러안아 품는 것 같아요
 
별이 된 아우들도 다독이고 있는지
벽오동 잎사귀에 내리는 달빛은
어린 아우들 다독이던 어머니의
그 마음 같고 그 손길 같아 보여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밤은
오동잎 위의 달빛과 별빛이 먼 옛날의
그 한때를 데려오는 것만 같아요

미리내

밤하늘의 미리내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은
먼 옛날 고향 마을 냇가에 가 있다
동네 조무래기들과
자갈밭에 멍석 깔고 누워 바라보던
별들과 한여름 밤의 꿈이
아득한 세월 너머의 나를 부른 걸까
 
옛날은 가고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그때 지기들도 하나같이
만날 수 없어 이다지 그리워지는지
이 마음을 이 밤엔
그때의 그 꿈들이 데려다주는 걸까
미리내를 바라보노라면
그 시절로 되돌아가 머무는 것 같다

해후邂逅

간밤 꿈에서 만난 사람을 길에서 만났다
 
간절하면 꿈에 보이고 만나게도 되는지
 
우연이 필연을 품어 안고
 
필연은 우연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일까
 
오랜 세월 그리도 만나보고 싶어 하던
 
사람을 우연히 만나다니…
 
만나자 헤어질 수밖에 없는 해후였지만
 
이 길에서 또 만나게 되기를 꿈꾸어본다

강물에 뜨는 별

그 사람 보고 싶은 해 질 녘엔
강가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난날들이
별들처럼 먼 하늘에 모여 앉거나
강물 소리에 실리어 가기도 한다
 
그 사람이 떠나가고 난 뒤에는
기댈 언덕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그 시절이 못 돌아와서 그럴까
 
날이 갈수록 그 사람이 그리운 건
자기 본위의 상실감 때문일는지도
생각해 보지만 매한가지이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는 없어
강물에 뜨는 별을 품어 안는다

향수, 실향

고향 가는 길에는 차창에
 
아득한 옛 풍경들만 어른거린다
 
그 시절은 오랜 세월 속에 묻혀버리고
 
고향 가는 길은 추억만 데려오는 탓일까
 
가도 만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옛집은 허물어지고 잡초만 무성한데도
 
왜 또 나도 몰래 찾아 나서는지
 
회귀본능이 작동해서일까
 
그런데 정작 고향 마을이 가까워지자
 
왜 되돌아오게 되는지
 
되돌아오는 길에도 왜
 
차창엔 먼먼 옛 풍경만 어른거리는지

고향마을 앞에서

옛날이 그리워 오랜만에 찾아 나선
고향마을 어귀의 냇가에서
왜가리 한 마리가 외다리로 바라본다
나를 반기는 것쯤으로 봐도 될는지
 
반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그런 생각도 하게 되겠지만
왜가리마저 어디론가 날아가고 난 뒤
옛날 한때가 안개와 더불어 다가온다
옛날은 가버린 지 오래지만
안개가 그 시절을 데려오는지
빈집도 태반은 훨씬 넘어 보이는데
옛 가족은 물론 옛사람들이 안갯속에
그대로 머물러있는 듯하다
눈 감고 있으면 더욱 그리 보인다

고향마을

고향마을이 너무 달라졌다
마을 앞 시내에 새 다리가 놓였지만
건너다니는 발길은 거의 없다
어쩌다 지팡이를 짚고 걷거나
휠체어를 타고 가는 노인이 보일 뿐
젊은이나 어린이는 안 보인다
사람들이 사는 집들 못잖게
허물어지는 빈집들이 적잖은 데다가
찾는 이는 어디 갔는지 뵈지 않는다
경로당에 몇몇 노파가 모여
오찬을 더불어 나누고 있으며
개 짖는 소리가 적막을 흔들어 댄다
동네를 두 바퀴나 돌아보아도
옛 기억들이 아쉬움을 안기고
떠난 뒤 못 돌아오는 사람들 얼굴이
눈앞에 다가와 어른거린다

꽃무릇, 그 처녀

꽃무릇의 꽃잎이 앙증스러워 되레 안타깝다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애달파 보인다
낙엽수의 잎들이 시들고 있을 무렵
제 몸에 잎사귀들이 돋아오르기도 전에
꽃대마다 속마음 저리 매달아 놓은 것일까
 
꽃무릇의 꽃과 잎처럼 엇갈린 사랑을 하던
아름다운 한 청춘남녀가 문득 생각난다
그 처녀는 꽃이고 연인은 잎이라서
그같이 엇갈리는 사랑을 해야만 했는지
 
꽃무릇꽃이 그 처녀 같아 너무나 안쓰럽다

너와 나

―결별
 
너는 나를 떠나 먼 곳으로 갔어도
 
나는 너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내가 너를 붙들 수는 없었어도
 
너는 내 안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주객 양치상*

그가 먼 세상으로 간 지 오래지만
그와의 오래된 기억들은 가까이 있다
만날 사람 마땅찮아 홀로 술잔을 들 때
그가 지어주었던 양복이 낡아 하나둘
계절이 바뀌면서 버려야 할 때
그는 더욱 가까이 다가오기도 한다
 
버릇 때문이겠지만 해가 서산을 넘으면
예나 지금이나 술이 나를 부르게 마련
그의 빈자리에 술잔을 채워놓기도 한다
 
한때 사흘이 먼 듯이 술자리를 벌이고
손수 지은 양복이 아니면 못 입게 한
그를 벗어나고 싶을 때도 없지 않았다
 
그 극성을 견디기 힘들어서 괴롭고
더러 원망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워진다
홀로 술잔을 기울일 때가 잦아진 데다
그가 지어준 양복들마저 다 낡아서
그 옛 시절이 잊히지 않는 걸까
*양복의 명인이며 시인(1941~2010).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 수상.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저녁 점묘』 냄.

두 예술가

몸이 악기인 한 예술가가
 
악기가 낡아 예 같지 않다고 한탄하고
 
몸으로 말하는 한 예술가는
 
입으로만 말해야 한다고 아쉬워하네요
 
저명한 성악가, 무용가도
 
강한 조명이 차츰 멀어져 가고 있으니
 
점점 밀릴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도 ‘예술은 길다’라는 말을 새기며
 
화려했던 두 분의 무대를
 
기억의 공간에 소중하게 갈무리합니다
 
물과 같이 흘러가는 세월을
 
그 누구인들 잡을 수는 없을 터이므로
 
두 분 손이나 잡아줍니다

명수*

그는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먼 세상으로 떠나가 버렸는지
 
아득한 세월 저편에서 이따금 그는
 
옛날 그 소년 모습으로 노래를 불러준다
 
<내 마음>, <가고파>, <바위 고개>
 
간밤의 꿈속에서도 들려주던 가곡들이다
 
소년 가장으로 방황하던 그 시절에
 
그는 나를 붙잡아준 친구였다
 
잊히지 않는 그때도 아득히 멀다
*소년 시절의 친구

그 사람 보고 싶네


그 사람 보고 싶네
이 세상 그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행여 다른 세상으로 떠나버렸는지
수소문해 봐도 행방조차 알 수 없는
 
그 사람 보고 싶네
아득한 기억들은 그 옛날 그대로나
물같이 흘러가는 세월
헤어진 뒤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 사람 보고 싶네
 
헐벗은 어린 시절 더불어 웃고 울고
서로가 기댈 언덕이었기 때문일까
일찍이 험난한 제 길을 가야 했던
그 사람 보고 싶네

뻐꾸기에게

뻐꾸기야, 울지마라
울어본들 떠나간 그임도
가버린 날들도 되돌아오겠느냐
숲속에서 네 울음을 듣고 있으면
가고 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오면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해보지 않을 수 없네
여름 내내 숲속에서 울음 우니
무엇이 그리도 애달프냐
뻐꾸기야, 울지마라
 
울지마라, 뻐꾸기야
오면 가는 세상사 새옹지마
뻐꾸기야, 울지마라
는개 자욱한 강가의 길을 걷는다
마음은 옛날로 거슬러 오르는지
맞은편에서 옛날의 내가 다가온다
 
는개 탓인지 알 수 없으나
희미하게 다가오지만 거울로 보거나
사진첩에서 보던 지난날 모습이다
 
하지만 가까워지다 이내 멀어진다
꿈꾸다 꿈 밖으로 밀려나 버린 걸까
깨게 마련인 게 꿈인 것을,
 
눈을 떠도 감아도 물러나 버렸다
가면 오지 못하는 게 강물이듯
이 순간도 저 는개 속에 묻힌다

추억, 어린 시절

오래된 사진첩을 들여다보면
아주 오래된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동네 악동들이
여전히 환한 미소를 띠고 있다
소문에는 절반도 넘게 세상 떠나버리고
몇몇은 병환에 시달리고 있다는데
오래 아무도 만나보진 못했다
 
나보다 연상인 영도를 만나면
마치 오랜 사진첩을 넘겨 보이듯
옛날을 불러와 선연하게 되살려놓는다
귀 기울이며 눈을 감고 있으면
별을 보며 꿈을 키우던 한여름 밤이나
앞날을 함께 꿈꾸던 한겨울 밤은
그중 극히 부분적인 풍경이다

추억, 강가에서

강가에서 흐르는 물을 바라본다
오고 가는 물결 따라
이런저런 추억들이 오고 간다
떠올리기조차 싫은 기억들은 죄다
물결에 실어 떠나보내고 싶다
가서 안 오는 사람과
안 잊히는 날만 또 만나고 싶다
 
부질없는 생각인 줄을 알면서도
낮 꿈을 꾸고 있는지
제자리만 지키고 있는 강같이
나는 강가에 붙박이처럼 선 채로
가고 오는 기억들과 마주친다
그중에서 안간힘으로
그리운 추억들만 끌어당겨 본다

Ⅳ

염소와 양 떼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는 양 떼에게
염소 한 마리가 난동을 부린다
양들을 뿔로 떠받고 쫓기도 한다
놀란 양들은 다른 풀밭으로 떠밀려 간다
 
양치기 목동이 염소를 풀어놓은 것은
은밀한 전략이 숨어 있는 탓일 테다
 
재빠르게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양들은 염소가 원망스러울지라도
난동 부리는 염소 탓에 도리어
새 먹이가 있는 풀밭에 이르고
싫어하는 운동도 했던 게 아닌가
전화위복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양 떼 같더라도
염소 같은 사람과 안 마주칠 순 없다
 
괴롭고 상처받아도 더불어 살아야 한다
목동의 지혜가 말해주는 암시대로
우리는 고난 너머의 복을 향해
염소에게 쫓기는 양 떼인지 모른다

향일성向日性 우울증

장마 그친 듯 하늘이 맑게 갠다
며칠간 눅눅하던 마음에는 햇살
그늘진 모서리에도 햇볕이 든다
창밖을 내다보니 회화나무 잎사귀들이
햇빛을 탱글탱글 되쏘고 있다
 
이따금 들리는 새소리도 밝다
악몽 때문에 헤매던 간밤의 내 모습이
유리창 너머 잠시 어른거리더니
어디로 갔는지 말끔히 사라진다
창문을 열고 햇살을 그러안는다
 
장마철엔 왜 마음 걷잡을 수 없이
진창 같은 데서 헤매게 되는 건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데 속절없을 뿐인지
 
밤이면 악몽에 더욱 시달리게 되는 것도
언제나 하늘이 맑아지기만 바라는
향일성 우울증 때문인지도 모른다

꿈속의 빌런

꿈속에서 가끔 빌런과 사투를 벌인다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괴한 빌런이 내 목을 죈다
 
소스라쳐 비명을 지르다 잠 깨면
 
온몸이 땀에 젖어 있게 마련이다
 
무의식 속에 똬리 틀고 있던
 
트라우마가 꿈속에서 법석이었는지
 
마음을 비우려고 애써왔지만
 
여태 그 한때의 치욕적인 일들과
 
등을 돌린 사람에 대한 기억들이
 
지워지지 않아서인지 모른다
 
지난 일은 잊어야 할 텐데도
빌런은 그 트라우마의 변신이었는지

불신의 늪

둘이선 함께 우물을 들여다보지 말라든가
셋이는 더불어 나무를 들지 말라는
중국 속언이 있다고 하더군요
셋 중 한 사람은 힘을 쓰지 않거나
둘 중 한 사람이 우물에 떠밀어 넣을지도
알 수 없다는 불신감 때문이라나요
 
요즘 세상도 그렇지 않은가요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한다는 말을
믿던 사람이 갈등에 빠지는 경우를 보았고
가까운 친구가 등을 돌리는 바람에
우물에 빠진 적도 있었거든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한 지기는
지금 세상을 불신의 늪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그는
요즘 세태를 원망만 하더군요
동서고금이 별반 다르지도 않다면
믿고 사는 세상은 꿈속에만 있는 것일까요

대인 기피증

그러지 않고 싶지마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기피증이
아직도 거의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모임에는 빠지기 일쑤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많아도 그렇다
 
누군가의 농담과 같이
나무 코트를 입기 전까지 이럴까
극복해야 할 증상일 텐데
평생 낫지 않을 고질일는지 몰라
마음을 추슬러 보지만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마주치면
만나지 않기보다 괴로워질 것 같고
악몽이 도질지도 모른다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이 하루도
나만 만나던 날이었다

거리두기

좋으면 좋을수록 거리두기를 한다
너무 가까이는 다가가지 않는다
예쁜 꽃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듯이
가까운 사람과도 적당한 거리를 둔다
 
아무리 친해도 거리를 유지한다
상처를 주고받지 않고 싶어서다
 
어제 본 꽃을 오늘 또 바라보고
가까운 사람도 어제처럼 만난다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가 상처를 받는
고슴도치 사랑을 굳이 안 떠올리더라도
너무 가까이는 다가가지 않는다
한결같이 적당한 거리두기를 한다

세태, 각단

한참 물러서서 생각해 봐도 요즘은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것 같다
이 각단이 순조롭게 풀리는 듯했던
간밤 꿈을 불러와 들여다본다
 
거기에선 그 갈피와 실마리가 풀려
세상이 바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꿈 밖의 세상은 오리무중
이 각단을 방관하면서 제대로
풀려고 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세상이 바뀌길 기대하기는
나뿐만이 아닐 텐데 왜 이런 걸까
 
나만 살아보겠다는 개인주의로
더불어 살려고는 하지 않는 탓이며
알면서도 불을 보듯 이 각단을
바라보기만 하기 때문인 듯도 하다

별 하나 뜬다

마음도 칠흑 같은 어둠 속이다
 
캄캄한 하늘에 별 하나 뜬다
 
아마도 전할 말이 있는가 보다

미명微明

밤잠 이루지 못한 채 가슴 죄다가
조금 물러나 그런 나를 추스른다
 
아프고 안타까울지라도
지나가는 것은 그냥 지나가게 두려고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퍼담지 못하므로
미련도 지우려고 한다
 
창 너머는 어느새 어른대는 미명
궂은날도 새날에 밀려나는가 보다

주어진 길

주어진 길로만 갈 수밖에 없는지
 
얽히고설킨 문제도 단순화해서 풀고
슬픔과 기쁨의 경계도 허물어
하나로 그러안으면서 다독여야 하는지
 
지나온 길들 죄다 지워버리고 싶어도
가는 데를 몰라도 가지 않을 수 없어
 
주어진 길을 거스르며 갈 수는 없는지
가다가 언제 멈춰버리게 될지
모를지라도 모르는 채 가야 하는지
 
가다 못 갈 때까지 가야 하는지

만나manna*
 

오랜만의 밝은 햇살은 마치 만나 같다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는 아니지만
하늘이 내리는 은총의 양식 같아서다
 
어둡고 무겁게 헤매던 마음이 모처럼
환하고 따스한 빛에 감싸인다
 
긴 장마는 왜 광야의 고난을 연상케 할까
 
폭우가 쏟아지다 말다가 하면
마음의 갈피조차 잡지 못해서 그럴까
 
가나안으로 가는 꿈속의 나라를 향해
오랜 세월 광야에서 고행하면서
만나로 축복받던 옛사람들이 생각난다
*하늘이 내린 양식

칠포 해파랑길

칠포의 해파랑길을 걷는다
끝없이 밀려오는 푸른 파도와
눈부시게 뛰어내리는 햇빛
솔 향기 품어 오는 바람
 
장마로 눅눅하게 무거웠던 마음이
뜨거운 햇볕에 녹아내리는지
파도 소리에 씻기어나가는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가벼워진다
 
며칠 벼르다가 오랜만에
여기 오기를 잘한 것 같다
오도교까지 걸을 수 있을는지
느긋하게 걷는 해파랑길

모래밭에서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시간은 간다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이
모래알 같은 순간들이 간다
지금 이 찰나는 작은 모래알 같아도
처음이자 마지막인 영원의 숨결
 
오면 가는 세월은 덧없을지라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을
움켜쥐다가 말다가 하면서
떠나는 찰나의 뒷모습을 그러안는다
모래밭에 선 채로 감사기도를 한다

쓴소리 친구

오랜 친구와 만나 그윽한 시간이다
서로 쓴소리하면서 살아와서 그런 것 같다
 
오늘도 그는 나의 잘못들을 말해주고
나는 그의 허물을 짚어주지만
멋쩍게 웃다가 서로 술잔을 채워 준다
 
우리는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입에 써야 약이 된다고 했던가
언제나 안 바뀌는 그가 믿음직하다
 
가까웠다 멀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
가까웠을수록 더욱 그러했으며
관계가 모래알과 같던 사람 역시 많다
 
쓴소리 한 번에 멀어진 사람도 있으며
이해관계가 끝나면 등 돌리는
경우는 듣기 좋은 말만 하던 사람이다
 
돈독한 우정은 진정성이 다져주는 것 같다
그와는 오늘도 쓴소리를 주고받는다

오랜 친구

오랜 세월 한결같은 친구가 있어 눈물겹다
 
잘 안 보이게 나누고 베푸는
 
그의 뒷모습을 몰래 지켜보면 더욱 그렇다

버릇 타령

제 버릇을 남에게 못 준다고 하지만
버리지 않고 싶은 버릇도 없진 않아요
짭짤한 음식과 반찬도 그러하지만
해가 지면 술 마시고 싶어지는 데다
기분이 좋거나 나쁠 땐 끽연하게 마련이죠
 
그런데 이 버릇이 나쁘지만은 않은지,
마음 비우거나 마음에 몸을 맡기는 게
소금 같은 역할도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와 딴판으로 오래 살아보려고 기를 쓰며
싱겁게만 먹고 술 담배도 끊어버렸던
한 친구가 오래전 세상을 떠났어요
알 듯하면서도 모르는 게 인생사일까요
그는 내 버릇 고치라고 성화였거든요

오늘 쓰는 시는

시간은 어김없이 앞으로만 가지만
 
사는 게 그러하듯
 
가다가 되돌아오고 돌아와 다시 간다
 
되다가 덜 되다가
 
오늘 쓰는 시는 고치고 또 고친다

마지막 새날같이

날이 밝아오니 어제와는 다른 날이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오늘은
지난날들을 지우면서 다가오는 새날이다
 
그러나 지난날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건
아름다운 기억들만 되살아 오고
그 나머지 기억들은 물러나기 때문일까
 
여기까지 오는 데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평소에는 무심히 맞이하던 오늘을
오늘은 마지막 새날같이 맞으려 한다

<해설>

찰나를 절정으로: 존재와 시간에 대한 명상
박진임(문학평론가, 평택대 교수)

1. 시간과 존재

이태수 시인의 스물다섯 번째 시집은 시간과 존재에 대한 명상의 기록으로 보인다. 그 명상의 흔적들은 물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고, 거울의 상징 속에 재현돼 있기도 하다. 다시 물의 이미지는 강물이나 는개의 이미지로 나타나면서 시간에 대한 시인의 사유를 추동한다. 물이 매개하는 시간의 명상을 만나기 위해 먼저 텍스트에 나타난 물의 이미지를 따라가 보자.

물은 시를 쓰면서 평생을 보낸 시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매체이며 그의 상상력의 근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강물이 강을 떠나듯」에서 보듯, 푸른 산 어느 정수리에서 발원하여 산그늘을 따라 흐르다가 계곡을 이루기도 하고 강물이 되어 흘러온 강물의 일생은 그대로 이태수 시인의 삶 그 자체이고, 마침내 이제 그 물은 강을 떠나 바다에 들 준비도 하는 듯하다.

강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강물이 흘러들어 떠나간다
나는 언제나 이 자리에 있고 싶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고 싶은 나도
강물이 흘러와서 가버리듯
가지 않으려 해도 가고 있다
 
가고 싶은 곳이 아닌 데로만
가는 듯해 멈춰 서고 싶다
강가의 소나무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 없는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같은 자리에 선 채 간다고
와서 가지 않을 수는 없다고
―「강물이 강을 떠나듯」 전문

강물은 명상하는 시인의 모습과 그의 내면세계까지 반영하면서 추억과 회한을 안고 흘러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시편에 보이는 시간과 존재의 속성에 대한 시인의 명상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사유에 닿아 있다. 인간이란 이유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 즉 Dasein이라고 하이데거는 불렀다. 하이데거는 Dasein의 어원을 드러내기 위하여 Dasein을 Da-sein으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Da-sein은 영어로는 ‘Being-there’를 의미한다. 우리말로는 ‘거기 있음’, 또는 ‘있음’으로 번역해 볼 수 있다. 그 말이 뜻하듯,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역사적, 문화적 조건 속에 이유 없이 던져진 것이 인간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또한 인간의 삶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죽음의 가능성을 언제나 포함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삶이 멈추는 순간, 가능성으로 존재하던 죽음은 실현되고, 삶은 일종의 완성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은 본질적으로 경험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니며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삶은 죽음의 순간 완성되는 것이지만 인간의 삶이 완성되는 것은 이 세상의 다른 존재들이 완성되는 것과는 성격을 달리한다고 그는 말한다.

하이데거는 과일이 익는 것과 인간의 삶과 죽음을 대비해 설명한다. 과일도 인간도 그 존재의 내부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not-yet 가능태로서의 완성을 포함하고 있다. 과일은 무르익음ripeness, Reife으로써 과일이라는 존재가 포함하고 있던 가능성을 실현fulfill하게 되는 반면 인생은 그렇지 않다. 죽음이라는 가능태가 현실이 되는 순간 그 존재가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를 따르자면 심지어 실현되지 못한 존재도 언젠가는 존재이기를 멈추게 된다. 인간 존재의 경우, 죽음의 순간 그 존재 의미를 실현하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의 존재는 실현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끝난다Dasein ends in unfulfilment, 또는 죽음 이전에 이미 존재 의미가 고갈되었거나 와해된 상태에 이르렀다가 죽음을 맞기도 한다.(288)

이태수 시인이 강물의 이미지 속에서 명상하는 주제도 결국은 존재, 존재의 의미, 그리고 시간과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간이 강이라면 인생은 강물이 아닐까? 인생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강에 실려 잠시 흘러가는 강물이 아닐까? 강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다만 물이 그 강에 흘러들었다가 그 강의 품 안에서 흐르다가 결국은 그 강을 떠나가게 된다.

강물이 강물인 것은 강이라는 이름을 지닌 공간에 실려 있는 동안에만 한정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강물이라는 이름은 시간성을 지닌 물의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물은 어느 산꼭대기에서 발원하여 흘러간다. 물은 한때는 냇물이거나 계곡물이었다가 강에 이르러 한동안은 강물이 된다. 그러다가 강물은 강이 끝나는 곳에서 마침내 바닷물을 만난다. 강물로서의 생애가 그렇게 끝나는 것이다.

이태수 시인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그 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 강물의 경로를 우리 인생의 길과 대비한다. 흘러가면서 언젠가는 강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강물의 운명이듯이 “강물이 흘러와서 가버리듯/가지 않으려 해도 가고 있다”라고 노래한다.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 흐르는 물의 운명이듯 세월과 함께 서서히 죽음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이른다.

하이데거가 죽음이 아직 실현되지 않은not-yet 상태로 존재를 이루고 있는 요소라고 보았던 것처럼,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는 삶이 죽음의 실현을 향한 여정이고 탄생이 곧 죽음을 향한 기나긴 그 여정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가고 싶은 곳이 아닌 데로만 가는 듯해 멈춰 서고 싶다”라고 시인은 노래하기도 한다.

그동안 시인은 강물처럼 흘러가며 인생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순응의 자세를 텍스트에 담아내곤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흐름을 멈추고 머물고 싶은 것 또한 모든 존재가 지닐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마음 상태일 것이다. 그런 내면의 흐름을 담담히 그려내면서 “나는 언제나 이 자리에 있고 싶다”라고 솔직하게 토로한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꾸어 “강물이 흘러와서 가버리듯/가지 않으려 해도 가고 있다”라고 다시 현실을 긍정한다. 강물의 흐름을 인생의 시간과 나란히 놓고 바라보면서 강물의 물 이미지를 통하여 인생의 유한함을 드러낸다. 흐르는 물이 인생의 비유라면 강가의 소나무는 초월자의 상징으로 보인다. 강가의 소나무는 강에 담겨 흐르는 강물과는 대조를 이루며 강가에 뿌리를 내리고 선 채 강물을 굽어본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유한함을 자각하는 일은 두 겹의 노래를 부르게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회한의 정을 한없이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자각하고 그 유한성을 인정할 때 오히려 삶을 더욱 긍정하게 되기도 할 것이다. 시인이 노래하듯 시적 화자를 둘러싼 우주 만물이 전부 움직이며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흘러가고 따라가고」를 보자.

개울에 발을 담그고 멍때리듯이 앉아
물살의 느낌을 지그시 받아들인다
나를 스쳐 가는 물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흘러간다
소슬바람도 옷자락 흔들며 지나가고
하늘엔 구름이 떠서 흘러간다
구름 따라 물길 따라
나도 아래로 먼 데로 가고 있는지
개울에 발을 담근 채 넌지시 바라본다
―「흘러가고 따라가고」 전문

이 텍스트에서도 시인은 유동적인 물의 이미지를 통해 삶을 노래한다. 그러나 흘러가고 따라가는 물은 회한의 정보다는 긍정과 순응의 자세를 더 강하게 드러낸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은 시간의 흐름 속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 존재의 그림자에 해당한다. 「흘러가고 따라가고」에서는 흐르는 것이 물만이 아니다. 개울에 발을 담근 시적 화자를 스쳐 가는 물살도 흘러가지만 소슬바람으로 나타난 바람도 옷자락을 흔들며 지나간다. 하늘엔 구름도 흘러간다. 그래서 흘러가는 일이 자연스럽고도 순리에 맞는 것임을 확인하게 한다.

위에 든 두 텍스트가 보여주듯 강물이 추동하는 물의 상상력은 시간에 대한 시인의 명상과 긴밀히 연결되고, 시간을 떠날 수 없는 존재의 속성을 설명하기에 이른다. 물의 이미지를 통한 시간과 존재에 대한 명상은 「어느 날 강가에서」에서 다시 전개된다.

강가에 앉아 눈 감고 있으면
걸어온 길이 물길을 거스르듯 다가옵니다
그 길을 한참 거슬러 오르다 보면
오랜 옛날로 되돌아가는 발길이
머무르는 곳도 더러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잃어버린 그 풍경 속에 깃들어
그리웠던 사람들과 기껍게 만나고
더 가다가는 다른 세상으로 떠난
친구도 만나서 회포를 풉니다
 
눈을 감아도 흘러가는 강물은
계속 아래로 가는 소리를 냅니다
귀 기울여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거슬러 오르던 발길이 다시 되돌려집니다
 
시간도 강물도 흘러가고 있듯
나도 그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한동안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보면
강가의 나무들이 나를 내려다보는 듯하고
강물은 아래로만 흘러갑니다
―「어느 날 강가에서」 전문

“시간도 강물도 흘러가고 있듯/나도 그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라는 구절을 다시 살펴보자. 시인은 강물의 흐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함께 느끼면서 삶 또한 그러한 흐름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이른다. 이 텍스트의 시적 화자는 강물을 따라 하염없이 걷고 있는 산책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산책자Flâneur는 19세기 서구 사회에서 근대 도시가 발전하면서 등장해 문학 속 중요 모티프로 부상한 바 있다. 프랑스의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서 출발해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를 거쳐 미국의 포우Edgar A. Poe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학 텍스트 속의 산책자들은 개인의 내면적 고독과 함께 도시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불안을 증언하곤 했다.

이태수 시인의 시편에 등장하는 산책자도 뚜렷한 목적 없이 걸어간다. 집을 나서 강을 따라 걸으며 나무와 구름을 살피고 있다. 그러나 그 산책자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간과 존재에 대해 명상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지닌다. 강물이 흐르는 시간을 지시한다고 볼 수 있는 까닭에 강가를 걷는 산책자는 필연적으로 그 시간이 지니는 의미를 탐색하면서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묻고 답하는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강물처럼 자연 속에 현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으로 시간은 인생의 변화에 개입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제 시간과 존재에 대한 시인의 명상이 현실 속의 삶으로 확장된 텍스트를 살펴보자. 강물이 지닌 유한성을 인지하면서 그 강물의 속성에 비추어 존재의 운명을 다시 살피는 시인의 눈길이 「두 예술가」에서는 예술가의 몸을 향해 있다. 물이 강물인 것은 그 물이 강을 통과하는 시간 동안만이듯이 예술가의 몸도 그러하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유한성이 예술가의 몸을 통해서도 구현됨을 볼 수 있다. 그렇다. 「두 예술가」는 몸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명상이 담긴 텍스트이다. 그리고 몸과 예술의 관계는 다시 ‘존재와 시간’이라는 명제와 연결되어 있다.

몸이 악기인 한 예술가가
 
악기가 낡아 예 같지 않다고 한탄하고
 
몸으로 말하는 한 예술가는
 
입으로만 말해야 한다고 아쉬워하네요
 
저명한 성악가, 무용가도
 
강한 조명이 차츰 멀어져 가고 있으니
 
점점 밀릴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도 ‘예술은 길다’라는 말을 새기며
 
화려했던 두 분의 무대를
 
기억의 공간에 소중하게 갈무리합니다
 
물과 같이 흘러가는 세월을
 
그 누구인들 잡을 수는 없을 터이므로
 
두 분 손이나 잡아줍니다
―「두 예술가」 전문

다시 한번 시인은 “흘러가는 세월은 물과 같다”라고 노래한다. 시간과 물은 모두 유동적이라는 점에 유의하면서 그 흐름 속에서 인간 존재의 운명을 살피고 있다. 물과 같이 흘러가는 세월을 텍스트의 한 축에, 시간의 힘을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의 몸을 다른 한 축에 배치하면서 시인은 예술가의 몸을 악기라고 명명한다. 악기는 시간의 풍화 작용을 이길 수 없는 까닭에 시간이 지나면서 낡아간다. 사람의 몸이라는 악기도 마찬가지여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운을 잃어간다.

그러나 유한한 인생과 달리 예술은 길다. 길면서도 한결같다. 강과 강물에 대해서 시인이 명상한 바에 비추어 보자면 예술은 강이고 예술가는 강물이라고 볼 수 있다. 강물이 강에 흘러들었다가 다시 강을 떠나 흘러갈 수밖에 없듯이 예술가의 몸은 예술의 공간 속에 스미었다가 서서히 그 자리를 떠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저명한 성악가, 무용가도/강한 조명이 차츰 멀어져 가고 있으니/점점 밀릴 수밖에 없겠지요”라고 시인이 노래하는 바와 같다.

성악가에게도 무용가에게도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그들의 몸이다. “몸이 악기인 한 예술가”가 성악가이며 “몸으로 말하는 한 예술가”가 무용가이다. 시간의 법칙 앞에서 유한한 인간의 몸은 쇠약해지고 그 몸은 예술적 표현 도구로서의 기능을 잃어갈 운명에 놓인다. 두 예술가는 “악기가 낡아 예 같지 않다고 한탄하고” “입으로만 말해야 한다고 아쉬워하”는 우울한 모습으로 텍스트에 등장한다.

그러나 시간의 불가역성, 시간의 철학을 긍정하는 까닭에 시적 화자는 그 변화를 긍정하고 위로를 건넬 준비가 되어 있다. “두 분 손이나 잡아줍니다”라는 구절에서 보듯, 시적 화자는 공감과 이해의 손길을 내밀면서 그들의 존재 의미를 긍정한다. “물과 같이 흘러가는 세월을/그 누구인들 잡을 수는 없을 터이므로”라는 구절에서 보듯, 그런 시적 화자의 목소리는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긍정하는 소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강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강물이 흘러들어 떠나간다”라는 구절과 함께 “강물이 흘러와서 가버리듯/가지 않으려 해도 가고 있다”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시간이라는 강에 실린 강물은 “가지 않으려 해도 가고 있”는 존재라는 점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강가의 소나무가 나를 내려다보며/말 없는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라는 구절을 상기해 보자. 소나무가 말 없는 말을 강물에게 건네듯 시적 화자는 가만히 예술가의 두 손을 잡아준다. 손을 잡아주면서 지나간 시간의 빛나던 무대를 기억한다. 소나무처럼 “말 없는 말”을 건네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같은 자리에 선 채 간다고/와서 가지 않을 수는 없다고” 그 소나무는 뇌고 있다. 강과 강물, 그리고 소나무의 모습이 예술과 예술가,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또 다른 예술가의 모습에 겹쳐 있다. 텍스트와 텍스트가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시인의 철학을 함께 노래하고 있다.

2. 시간, 존재, 죽음

시간 위에 서서 한정된 삶을 유지하다가 끝에 이르게 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일진대 시간과 존재에 대한 시인의 명상은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명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이데거는 죽음이란 모든 존재가 어느 순간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죽음을 구성하는, 부정할 수 없는 주요 요소는 그 죽음이 ‘나의 것mineness’이며 ‘존재existence’의 마지막이라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284)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는 존재의 완전한 의미는 실현되지 않은 것이고 그러므로 존재의 총체성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치도 빚을 다 갚기 전에는 빚이 ‘남아’ 있는 것과도 같다는 예를 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은 존재, 즉 Dasein의 끝ending이라고 부르며 그때의 죽음은 물리적, 생물적 죽음과 구별된다고 본다.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 시점이 죽음이라고 본다. 그러나 죽음은 존재가 그 끝에 이르기 전에는 경험 불가능한 것이기에 이 세상에 함께 존재했던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만 죽음에 대해 명상할 수 있다.

이태수 시인은 시간과의 관련 속에서 타자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 명상하는 텍스트를 보여준다. 삶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명상이 벗의 죽음이라는 소재를 통해 확장된 텍스트로 「배롱꽃 필 무렵」을 들 수 있다. 텍스트에서 시간은 배롱꽃 피는 여름이라는 계절의 은유를 통해 나타난다.

이른 봄의 꽃들이 지자 그가 떠나고
꽃피는 배롱나무에서 매미들이 운다
그를 애도하는지 그 소리도 붉다
 
그를 떠올려보면 애달프기 그지없다
겨우내 홍매화와 수선화를 기다리고
목련, 개나리, 벚꽃을 그리도 좋아하더니
그 꽃들이 지니 미련마저 지웠을까
병마를 끌어안듯이 하늘 품에 든 걸까
 
그는 왜 이른 봄의 꽃들만 좋아했을까
여름과 가을에 피는 꽃들도 적잖고
겨울에 피는 꽃은 더욱 아름답지 않은지
목숨을 겨우살이같이 부지해야 하고
기생하듯이 살아왔다고 여겼던 건지
 
오랜 세월 병마와 더불어 산 그는
새 생명력이 약동하는 봄을 기다리고
그 절정의 순간만을 붙잡고 싶었을까
―「배롱꽃 필 무렵」 전문

「배롱꽃 필 무렵」은 「흘러가고 따라가고」에 나타난 시간과 존재에 대한 시인의 명상 연장선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텍스트에서 삶의 유한성과 시간을 넘어설 수 없도록 한계 지어진 존재의 속성에 대한 명상이 타자의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한 명상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타자와 함께 하는 것Dasein is essentially Being with Others”라고 말한다. 타인의 죽음이 존재의 총체성Dasein’s totality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된다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타자와 함께하는 세상이기에 그 세상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타자의 존재와 부재는 곧 존재 자체의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이 되는 것이다.(281)

살아있는 존재는 죽음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에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존재가 끝나는 일coming to an end이며 그 존재를 이루어오던 요소들이 마침내 통합되어 일체를 이루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죽음은 오로지 죽는 자의 몫일 뿐이고 그 누구도 타자의 죽음을 그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284)

죽음이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는 것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은 자는 이 세상을 버리고 떠났다. 그러나 그 버려진 세상을 중심으로 보자면 남아 있는 자는 여전히 죽은 자와 함께 남아 있을 수 있다The deceased has abandoned our world and left it behind. But in terms of that world, those who remain can still be with him.” “죽음은 남아 있는 존재에게는 타자의 상실”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상실은 살아남은 자가 경험하게 된다. 죽은 자가 스스로 ‘겪어야만’ 하는 ‘존재의 상실’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Death does indeed reveal itself as a loss, but a loss such as is experienced by those who remain. In suffering this loss, however, we have no way of access to the loss-of-Being as such which the dying man ‘suffers’.”(282)

하이데거는 죽음은 사건event이 아니라 현상phenomenon이라고 말한다. 존재가 타자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속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이제 타자의 죽음에 대해 하이데거가 언급한 바를 따라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초승달은 보름달이 될 때까지는 완전체가 아니고 실현되어야 할 존재의 가능성을 대부분 어둠 속에 감추고 있다가 보름달이 되면서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인데 그렇듯 인간 존재도 그동안 실현되지 않았던 죽음의 가능성이 실현될 때 죽음을 맞게 된다.

죽음은 존재가 완전체에 이르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순간 존재의 소멸을 겪게 되는 독특한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처럼 존재의 소멸을 경험하는 경험의 주체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길이 없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망자는 이 세상을 이미 버린 것이고 살아남은 자만이 여전히 이 세계 안에서 그 망자와 함께 할 수 있다.

그처럼 이태수 시인은 벗이 세상을 떠난 후에 홀로 남아 지켜보게 된 계절의 변화를 통해 그의 죽음을 재구성한다. 망자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 망자의 죽음 이후에도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존재로서, 망자가 경험한 삶과 죽음들을 홀로 재구성해 보인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망자의 목소리를 찾고 상상 속에서 그의 내면을 다시 그려보고 있다.

봄꽃이 망자로 하여금 그의 삶을 지속하게 해 준 존재 이유가 되었던 것처럼, 그 꽃이 지고 계절이 변화할 때, 그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죽음의 근원을 찾는다. 봄이라는 시간대가 지닌 강렬한 생명의 기운이 망자를 존재하게 해 주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망자의 존재와 부재 사이에 놓인 것이 결국 시간이었음을 기억한다. 삶도 죽음도 시간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텍스트로 보인다.

그처럼 죽음은 오로지 죽음을 맞는 존재의 몫일 뿐, 누구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고유의 경험이지만 이태수 시인의 텍스트에서 보듯 이 세상에 살아남은 자는 여전히 그 부재하는 존재와 함께 할 수 있다. 죽음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일조차 존재의 몫이 되는 것이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했던 만해 한용운처럼,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했던 소월의 한 맺힌 노래처럼, 누군가는 스스로 죽음을 경험하면서 이 세상을 떠나간다.

그 망자에 대한 기억을 지닌 채 이 세상에 남은 존재는 여전히 타자와 ‘함께 하는 존재Being-with’로 남는다. 그리하여 망자의 죽음에 따른 상실loss을 경험하는 것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존재의 몫이 되고 죽음에 대한 명상 또한 살아남은 존재에게 속하는 주제가 된다. 타자의 죽음에 대해 증언하고 기록하면서 존재와 시간에 대한 명상을 이어가는 일, 그 일은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의 몫일 뿐이다.

3. 존재와 거울, 그 안과 밖

존재와 시간에 대한 시인의 명상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진다. 흘러가는 강물이 지닌 유동성이 시간에 대한 재인식을 가능케 하는 질료였다면 금속성의 거울은 존재의 존재 됨을 다시 인식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소재라고 볼 수 있다. 거울이 반영하는 존재의 모습을 재현한 「고독의 초상」을 보자.

거울 앞에 앉거나 설 때가 잦아지며
마음이 한결 푸근해지는 것 같다
 
지금의 나와 나를 보는 내가 마주하는데
지난날 나와 다가오는 날의 내가
은근슬쩍 끼어들기 때문에 그런 건지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그 속의 나는 나를 본다)
 
거울 속의 나는 시공도 아랑곳없는지
가거나 올 나를 두루 데리고 와서
지금의 나와 어우러지게 부추기기도 한다
 
나는 외롭기보다 고독한 것 같고
고독한데도 마음은 되레 푸근해진다
―「고독의 초상」 전문

「고독의 초상」에서 보듯 거울은 거울 앞에 선 존재의 모습을 되비추어주면서 동시에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이다. 마치도 일기를 쓸 때 일기장이 오랜 벗이기라도 하듯 그를 향해 마음속 깊이 묻어둔 얘기들을 다 털어놓는 것처럼 거울 앞에 서서 시적 화자는 거울과 대화를 나눈다. “그 속의 나는 나를 본다”라는 구절을 보자. 거울 속의 자아가 금속성 물질성을 바탕으로 삼아 거울 밖 자신의 모습을 되비추고 있다. 거울을 사이에 두고 거울을 마주 보는 존재는 한편으로는 현실 속의 자아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거울로 인하여 현실이 아닌 곳에 거하는 또 하나의 자아가 된다. 그럴 때 거울 속의 자아는 시공의 한계를 벗어나 존재한다. 거울 속의 자아는 자아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비자아, 즉 자아가 아닌 존재이기도 하다.

그처럼 거울이 매개하는 새로운 공간에서는 시간의 성격도 달라진다. “가거나 올 나를 두루 데리고 와서” 구절에서 보듯, 거울은 가버린 나, 즉 과거 속의 나를 불러들이기도 하고 올 나, 즉 미래의 자아를 내부 공간으로 초대하기도 한다. “두루 데리고 와서” “지금의 나”와 어우러지게 만든다. 그렇다면 거울이 생성하는 공간은 필연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대가 해체된 공간이다. 그 결과 텍스트 속 시적 화자는 “고독한데도 마음은 되레 푸근해진다”고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의 제약을 벗어났거나 벗어나 있다고 느끼게 하는 낯선 체험을 거울이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

거울을 통해 형성된 새로운 세계는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명명한 대로 시뮬라크룸 simulacrum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을 반영할 뿐 현실 그 자체가 아닌 까닭에 거울의 내부에서 시간의 질서는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현실의 질서와는 다른 성격의 것으로 변한다. 선조적인 시간대가 와해된 곳에 비선조적인 새로운 시간대가 부상하여 그 공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거울이 지닌 독특한 성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를 쓴 루이스 캐롤Lewis Carroll이 잘 반영하고 있다. 거울이라는 독특한 사물에 주목하면서 거울이 불러올 전복과 새로운 상상력의 가능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소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다. 앨리스가 속한 이상한 나라, 그 공간에서는 파이는 조각으로 나뉘기도 전에 먼저 접시에 담기고, 죄수는 형량을 선고받기도 전에 벌을 먼저 받는다. 그래서 앨리스는 당황하여 거듭 물을 수밖에 없다.

“어디로 가야 해? 어느 길로 가야 해?” 거울을 앞에 두고 선 시적 화자도 거울을 매개로 하여 낯선 경험을 한다. 선조적으로 진행되지 않는 시간대를 맞이한다. “지금의 나와 나를 보는 내가 마주하는데/지난날 나와 다가오는 날의 내가/은근슬쩍 끼어들기”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존재와 시간에 대한 명상이 길어질수록 시인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시간도 늘어날 것이다. 스스로 거울 앞에 서서 거울을 마주 보면서 거울 속에 반영으로서 존재하는 자신과 마주한 시인이 현실로 돌아올 때를 살펴보자. 시간은 달라진 모습으로 시인에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4. 그래서 더욱 소중한 순간

이제 시인이 다시 깨닫는 시간의 의미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시간은 스치고 지나가는 현재의 순간들, 그 비가역적이고 끝없이 지속되는 것으로 보이는 순간들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그와 같은 시간에 대한 이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순간의 연속이라고 보는 것은 유한하여 사라져 갈 운명에 놓여 있는 존재가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의 의미가 그러한 것이며 진정 유의미한, 그래서 중요한 미래의 시간은 현재 순간의 연결 선상에서 이해하는 미래의 시간과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478)

하이데거는 묻는다. “시간성을 시간 속에서 다시 사유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How is this mode of the temporalizing of temporality to be Interpreted?”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은 아직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존재의 운명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존재가 경험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삶의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강렬한 경험으로 그 순간을 이용할 수도 있고 환상과 기억, 혹은 예술이 열어 주는 상상의 시간대로 이주하며 여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태수 시인은 존재에게 주어진 물리적, 비가역적 시간을 되돌리거나 거슬러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노래한다. 이를테면 음악이 열어 주는 세계는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 붙들려 있는 존재를 현실계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제3의 영역으로 데려간다고 이른다. 「겨울 창가에 앉아」를 보자.

어제는 맑은 날이었으나
오늘은 눈보라 사납지만 받아들인다
주어진 길로 그냥 가기로 한다
 
눈보라 치지 않은 겨울이 있었던가
그런 한겨울이 없는 봄이 있었던가
 
앙상한 나무들은 흔들리면서도
머지않아 새잎을 돋우어 낼 태세다
온몸으로 중심을 잡는다
 
더욱 사나워지는 눈보라
그 틈 사이로 어제도 내일도 보인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다시 온다
 
창가에 앉아 바깥 광경을 바라보며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을 듣는다
 
몇 해 전에 아내와 함께 듣던
베네치아에서의 그 새소리도 들린다
눈만 감으면 봄날 속이다
―「겨울 창가에 앉아」 전문

비발디의 <사계> 중 봄 악장을 겨울에 듣는 일이 시적 화자로 하여금 자연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시적 화자는 음악을 통해 겨울이라는 시간성을 벗어나 봄의 시간 속으로 이주한다. 시간만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공간도 벗어난다. 행복한 추억의 장소, 베네치아로 잠시 망명한다. 시공간을 벗어나는 그 활주, 그 비행은 눈을 감을 때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시각은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 중에서 현실을 가장 확실하게 규정하고 인지하게 하는 감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시각이 제한될 때, 현실이 아닌 새로운 시공간으로 훨씬 쉽게 옮겨갈 수 있는 까닭이다.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 Dasein이 유한자로서 무자비한 시간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돌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시간성authentic temporality이 운명과 같은 것, 진정한 역사성authentic historicality을 만들어 낸다”고 하이데거가 언급할 때, 그가 의미한 바도 순간의 소중함을 강조함이 아니었을까?(437)

마치도 강물에 실려 가는 나뭇잎처럼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흐르는 것도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려니와 흘러가는 시간 중 소중한 순간들을 한껏 향유하고 그 순간이 주는 기쁨을 맑은 공기처럼 들이마시는 일도 또한 기억할 만하다. 그리하여 흘러가는 자연의 시간을 존재를 위한 진정한 시간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른 아침에 마지막 날을 맞이하듯
뛰어내리는 햇살을 그러안는다
앞뜰에는 나리꽃들이 막 피어나고
멧새 몇 마리 경쾌하게 포물선을 그린다
 
내일을 기대하던 지난날과는 달리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게 된 지도 어제오늘이 아니지만
햇빛이 유난히 눈부신 것 같다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아서 그런지
날마다 마지막처럼 살려고 해서 그런지
 
피어나는 나리꽃도 나는 멧새들도
이 찰나를 절정으로 여기면서
뛰어내리는 햇살을 쟁이는 것 같다
―「이른 아침에」 전문

살아간다는 것은 우주의 에너지를 끌어와 그 안에서 호흡하는 일, 과거와 화해하는 일, 소중한 존재를 오래 기억하는 일, 그리움을 잃지 않는 일…이태수 시인은 “뛰어내리는 햇살을 쟁이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아침에 새로운 하루의 시간대가 펼쳐질 때 그 순간을 “이른 아침에 마지막 날을 맞이하듯” 여긴다고 이른다. 그런 시적 화자 앞에서는 아침 해도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햇살도 그저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햇살은 시적 화자를 향해 뛰어내리는 햇살로 변하고 시적 화자는 그런 햇살을 자연스럽게 그러안는다. 이른 아침의 시간대를 찬양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존재와 시간이 평화롭게 서로 어울려 있는 모습을 본다.

5. 는개 속의 시간

그동안 이태수 시인의 시 세계는 꿈의 시간대가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스물네 번째 시집 『후창』에서도 꿈속의 시공간이 시편 전편에 펼쳐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존재와 시간에 대한 명상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번 시집에서도 다시 한번 꿈속에서 전개되는 비결정성의 시간을 찾아볼 수 있다.

는개 자욱한 강가의 길을 걷는다
마음은 옛날로 거슬러 오르는지
맞은편에서 옛날의 내가 다가온다
 
는개 탓인지 알 수 없으나
희미하게 다가오지만 거울로 보거나
사진첩에서 보던 지난날 모습이다
 
하지만 가까워지다 이내 멀어진다
꿈꾸다 꿈 밖으로 밀려나 버린 걸까
깨게 마련인 게 꿈인 것을,
 
눈을 떠도 감아도 물러나 버렸다
가면 오지 못하는 게 강물이듯
이 순간도 저 는개 속에 묻힌다
―「는개, 꿈」 전문

이 텍스트에서는 는개가 열어 주는 비현실적인 공간이 먼저 눈에 띈다. 안개도 아니며 아직 비도 아닌 것이 는개이듯, 혹은 어쩌면 안개이면서 동시에 비이기도 한 것이 는개의 속성이듯 산책자로서의 시인은 환상의 공간 속에서 걷고 있는 듯하다. 그 발걸음이 강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니 시인의 산책로는 한편으로는 현실 공간 속의 강과 평행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앞의 텍스트에서 살펴보았듯 강과 강물이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상징이라면 는개 속 시인의 산책은 현실에서 벗어나 있는 꿈과 환상의 시간대를 보여주는 듯하다. 시인의 내면세계가 곧 는개 자욱한 강가의 길로 펼쳐져 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산책하는 시적 화자는 자신만의 고유한 시간대를 산책하는 것으로 보인다. 는개가 표상하는 흐릿하고 불투명한 공간의 특징에 맞게 그곳에서는 시간의 흐름 또한 현실의 시간 흐름과는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시간도 고유의 선조성을 벗어나 유연하고 더러 굴절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텍스트 내부에서 꿈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 그 경계가 흐려져 있는 것이다.

꿈에서 만난 사람을 현실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장면을 보자. 텍스트 속에서 시간이 다시 정의된다. 시간은 정확히 분절되지 않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다시 해석되면서 휘어지고 구부러진다. 미술이라면 달리Salvadore Dali의 화폭이 보여주는 구부러진 공간에 비길만하다. 모나고 각진 것들이 문드러져 나타나고 삼차원의 입체적인 물체가 이차원의 대상으로 변환된다. 그러면서 모든 대상은 액상으로 변하여 함께 흐른다. 꿈과 현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부드럽게 이어져 있는 공간을 형성한다.

그 공간은 들뢰즈Gille Deleuze와 가타리Felix Guattari가 찬양하는 부드러운 공간smooth space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 현실의 공간이 논리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층진 공간striated space임에 반하여, 그 층진 공간의 대척점에 놓인 것이 부드러운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고 이어지는데 그런 부드러운 공간이 이태수 시인의 텍스트에 펼쳐져 있다.

는개는 현실에서의 시간과는 달리 존재하는 시간을 가능하게 해 주는 소재로 보인다. 현실의 사물들을 흐릿하게 만들고, 뚜렷이 구별되는 것들이 서로 겹치어 있는 듯 아련하고 불투명해지게 하는 것이 는개이다. 시인은 는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는개가 매개하는 새로운 시간을 형성한다.

는개 속에서 시인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소설에서처럼 기억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선조적 시간대에서 과거라고 규정된 시간, 시적 화자가 잃어버린 과거의 시간에 다가간다. 희미하게 다가오는 그 존재가 실재하는 존재인지 마음속에 그려보는 상상적 존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편으로는 “옛날의 내가 다가온다”라는 구절에서 보듯, 그 존재는 시인 자신의 옛날 모습이기도 하다. 가까워지다 이내 멀어지는 존재로, 그러므로 꿈꾸다 꿈 밖으로 밀려나는 존재로 나타난다.

기억 속의 어느 시간은 그토록 애매한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은 물러나 시적 화자를 홀로 남겨둔 채 다시 떠나가 버릴 목적으로 기억 속 시인 자신의 모습은 나타났다가는 바로 사라진다. 가면 오지 못하는 게 강물이듯, 물러나 버렸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기억 속의 자신과 조우하면서도 그 타자화된 자아, 즉 과거의 자신은 결국 현재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사라질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꿈꾸다 꿈 밖으로 밀려나 버린 걸까/깨게 마련인 게 꿈인 것을”이라는 구절에서 보듯 그 만남이 한시적인 것이며 현실 속의 시적 화자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가까워지다 이내 멀어진다고 하지만, 어슴프레하게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졌다고는 해도 그 낯선 대상과의 한순간의 조우는 시적 화자에게 큰 여운을 남긴다. 그 만남을 통해 시적 화자의 내면에는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회상 속의 자아, 과거 시간대에 속하는 자아,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어 버렸던 과거의 자아가 시적 화자를 만나기 위해서 다시 찾아온다는 것은 분명히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힐 수 없지만, 나타난 그 존재가 어떤 사연으로 시적 화자를 찾아온 것인지도 알 길이 없지만, 시인은 예기치 못했던 만남을 경험하고 다시 현실로 되돌아온다. 중요한 것은 그 만남이 미묘한 내적 변화를 시인의 내면세계에 이루어내었다는 점이다. 설명하기 어려운, 그래서 사건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미묘한 차이들…어쩌면 모든 중요한 변화는 작은 차이들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사건 또한 분절하기 어려운 작고 미묘한 변화와 차이들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건이 발생한다는 표현 자체가 모순적이라고 이르기도 한다. 발생하는 것, happening은 없다고 말한다. 그처럼 바람 한 줄기, 햇살 하나가 어느 순간에는 모든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겨울 햇빛이 불러온 내면의 변화를 노래한 미국 시인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시가 생각난다.

There is a certain slant of light,
Winter Afternoons,
That oppresses, like the Heft

of Cathedral Tunes.

Heavenly hurt, it gives us-
We can find no scar,
But internal difference

Where the meanings are.

―‘There is a certain slant of light’ by Emily Dickinson.
한 줄기 비스듬한 빛을 본다

겨울날 오후엔.
그 빛은 중압적이다.
마치 성당의 음악소리처럼 둔중하여.

천상의 상처를, 그 빛은 우리에게 준다.
상처의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내면의 차이, 의미가 존재하는 곳에 차이가 생긴다.

―에밀리 디킨슨, 「한 줄기 비스듬한 빛」. 졸역

디킨슨은 겨울날 오후 비껴든 빛 한 줄기에서 천상의 상처를 읽어낸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상처가 있다면 그런 것이리라. 우리 영혼에 생겨난 가느다란 균열 같은 그런 상처가 흔적 없는 상처이리라. 잠시 시적 화자를 찾아왔다가 바로 떠나버린 빛 한줄기가 내면의 차이를 만들어 내었다고 디킨슨은 노래한다. 그 빛 한 줄기가 천상의 상처를 감지하게 해 주어, 결국 시적 화자의 내면에 작은 변화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고 노래한다. 의미가 이전과는 다르게 존재하게 되었다고 노래한다. 그 모든 변화, 즉 빛 한줄기에 의해 촉발된, 한편으로는 지극히 사소할 수 있는 변화는 그럼에도 매우 중대한 변화를 시적 화자의 내면에 불러오게 될 게 분명하다.

이태수 시인에게도 그러한 내면적 변화를 가져다준 사건이 발생한다. 그의 내면, 그 영혼에 차이를 가져온 것은 빛 한 줄기가 아니라 타자화된 자아의 상像이다. 거울이나 옛날 사진첩 속에 존재하는 듯한 자아의 다른 모습은 한편으로는 자기 모습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타자가 되어버린 대상이다.

과거의 자아, 이제는 지나가 버린 시간대의 자아는 현재의 자아와 유사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타자화된 자아를 시적 화자가 된 자아가 만나는 이 장면은 그래서 매우 강렬한 상징성을 지니게 된다. 디킨슨이 겨울 오후 문득 한 줄기 빛을 통해 영성 체험을 하게 되는 것처럼, 이태수 시인은 “는개 자욱한 강가의 길”을 걷다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낯선 존재와 조우한다. 꿈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 그 타자 혹은 변형된 자아의 모습이라고 노래하듯 그 만남은 꿈의 공간 같은 곳에서 이루어진다. 강가로 난 길에서 그를 만나는 까닭에 강물이라는 유동적 이미지가 이미 거울처럼 자아의 모습을 반사할 수 있는 구실을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유동적 이미지의 강을 배경으로 는개조차 펼쳐져 있는 몽환적 공간에서 현재의 자아와 과거의 자아가 만난다. 그 두 존재 사이에 시간이 있다. 시간이 과거의 자아를 만들었고 시간이 흘러 현재의 자아가 존재한다. 현재의 자아와 그 현재의 자아를 구성하는 데에 기여하고는 사라져 버린 과거의 자아가 서로를 마주 보게 된다. 는개 속에서 현재와 과거 시간 너머에서 서로 만나는 독특한 경험이 텍스트에 그려져 있다.

강, 강물, 거울, 는개…시간에 대한 시인의 명상을 보여주는 대상들이다.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 태어나 또 자신의 욕망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개되는 시간을 맞고 보내는 것이 우리 삶일진대 이태수 시인은 시간에 대해 명상하는 산책자가 되어 한없이 강을 따라 걷는다. 잠시 강이라는 이름으로 흐르다가 강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 강물의 이치라 이르면서 존재의 유한성에 대해 노래한다. 시간의 끝에서 존재의 존재 됨이 완성될 때까지 부채처럼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을 분석하기도 한다. 거울의 상징성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도 하며, 는개 속에서 시간의 불가역성에 저항하듯 과거의 시간을 불러오기도 한다. 시간에 대한 존재의 명상과는 무관한 방식으로 시간은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찰나를 절정으로” 받아들인다. 시간에 대한 명상의 끝에서 시간을 이해하는 시인의 자세가 그렇게 드러난다. 는개 속을 산책하면서 과거의 시간대와 조우하기도 하고 “내일을 기대하던 지난날과는 달리/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도 생각한다. “새 생명력이 약동하는 봄을 기다리고/그 절정의 순간만을 붙잡고 싶었을까”하고 사라져간 타자와 함께하는 시간도 보낸다. 겨울날에도 봄의 음악을 들으며 눈 감고 봄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의 시편들은 마치 비발디의 <사계>처럼 우리를 현실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대로 데려갈지 모른다. 눈 감은 채 겨울에 봄 악장을 듣는 마음으로 이태수 시인의 시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본다. 는개 가득한 강가를 함께 산책해 본다.

인용한 책: Heidegger, Martin. trans. McQuarrie, John and Robinson, Edward. Being and Time. HarperCollins, 2008.

이 태 수 시인

1947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197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후창』(2026, 문학세계사), 『마음의 길』(2025, 문학세계사), 『은파』(2025, 문학세계사), 『먼 여로』(2024, 문학세계사), 『유리벽 안팎』(2023, 문학세계사), 『나를 찾아가다』(2022, 문학세계사), 『담박하게 정갈하게』(2022, 문학세계사), 『꿈꾸는 나라로』(2021, 문학세계사), 『유리창 이쪽』(2020, 문학세계사), 『내가 나에게』(2019, 문학세계사), 『거울이 나를 본다』(2018, 문학세계사), 『따뜻한 적막』(2016, 문학세계사), 『침묵의 결』(2014, 문학과지성사), 『침묵의 푸른 이랑』(2012, 민음사), 『회화나무 그늘』(2008, 문학과지성사),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2004, 문학과지성사), 『내 마음의 풍란』(1999, 문학과지성사), 『안동 시편』(1997, 문학과지성사), 『그의 집은 둥글다』(1995, 문학과지성사), 『꿈속의 사닥다리』(1993, 문학과지성사),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1990, 문학과지성사), 『물속의 푸른 방』(1986, 문학과지성사), 『우울한 비상의 꿈』(1982, 문학과지성사), 『그림자의 그늘』(1979, 심상사), 시선집 『잠깐 꾸는 꿈같이』(2024, 그루), 『먼 불빛』(2018, 문학세계사), 육필시집 『유등 연지』(2012, 지식을 만드는 지식), 시론집 『예지와 관용』(2024, 그루), 『현실과 초월』(2021, 그루), 『응시와 관조』(2019, 그루), 『성찰과 동경』(2017, 그루), 『여성시의 표정』(2016, 그루), 『대구 현대시의 지형도』(2016, 만인사), 미술산문집 『분지의 아틀리에』(1994, 나눔사), 저서 『대구문학사』(공저, 2020, 대구문인협회), 『가톨릭문화예술』(2011. 천주교대구대교구) 등을 냈다. 한국시인협회상(2021), 상화시인상(2020), 천상병시문학상(2005), 한국가톨릭문학상(2000), 동서문학상(1996), 대구시문화상(1986), 예술가곡대상(2022), 대구미술메세나상(2018), 대구예술대상(2008) 등을 수상했으며, 매일신문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대구한의대 국문과 겸임교수, 대구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뒤표지 글(표사)>

물과 거울을 통한 시간과 존재에 대한 명상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찰나가 바로 절정

이태수 시인의 스물다섯 번째 시집은 시간과 존재에 대한 명상의 기록으로 보인다. 그 명상의 흔적들은 물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고 거울의 상징 속에서 재현돼 있기도 하다. 다시 물의 이미지는 강물이나 는개의 이미지로 나타나면서 시간에 대한 시인의 사유를 추동한다. 강이라는 이름으로 흐르다가 강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 강물의 이치라 이르면서 존재의 유한성에 대해 노래하며, 시간의 끝에서 존재의 존재 됨이 완성될 때까지 부채처럼 남아 있는 삶의 시간을 분석하기도 한다. 거울의 상징성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는가 하면, 는개 속에서 시간의 불가역성에 저항하듯 과거의 시간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찰나를 절정으로 받아들인다. 는개 속을 산책하면서 과거의 시간대와 조우하고,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절정의 순간을 붙잡고 싶어 한다. 그의 시편들은 마치 비발디의 <사계>처럼 우리를 현실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대로 데려갈지 모른다. 눈 감은 채 겨울에 봄 악장을 듣는 마음으로 그의 시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본다. ―박진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