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5    업데이트: 12-11-21 15:13

킬럼-1

한여름 책읽기
이태수 | 조회 819

 

한여름 책읽기

 

李 太 洙 <문화부장>

 

 헤세의 수필 「노발리스」에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책, 우리가 어렸을 때 낡은 장롱에서 이미 본 일이 있는 책, 조부모들이 편지를 주고받거나 일기를 쓸 때면 언급하곤 했던 책들이 실상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많은 낯선 사람의 손에서 우리는 책을 얻게 되는데, 그때 거기 나타난 낯선 전소유자의 이름, 전전 세기의 「증정」이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일자획 논평, 또는 옛날식의 읽었다는 표지 등을 발견할 수 있으며, 수십년 전에 죽은 그전 소유자가 아주 근엄한 얼굴의 남자나 여자 얼굴을 그려 놓은 일도 있다. 그 모습은 벌써 오래 전에 케케묵은 것이 된 외투며 소매, 머리털로 꾸며져 있는 바, 이들 인물들은 베르테르, 괴츠, 빌헬름 마이스터의 출간과 베토벤의 초연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헤세는 노발리스의 책이 몇 세대에 걸쳐 전달되면서 그 책을 가졌던 사람들의 숨결이 다시 보태어져서 그의 손에까지 들어온 감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흔히 책읽기를 남의 체험을 함께 경험하고 세계에 대한 안목을 그만큼 넓혀주는 것쯤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헤세는 인용한 글에서 그 책 자체의 내용뿐 아니라, 그 책이 전해진 과정에 대한 호기심까지 보태질 경우, 남의 정신세계와 취미를 추적하는 묘미까지 맛보는 감동을 말해주고 있다. 서양 사람들의 책읽기에 대한 관심과 생각은 이같이 인간과 밀착돼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아직도 책읽기를 통한 체험은 간접적 체험이라는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창백한 인텔리로 보는가 하면, 일반적으로 책읽기라고 하면 어둠침침한 골방을 떠올린다. 눈빛이 살아 있고 몸은 깡마른 선비를 연상한다. 현실과는 거리가 있고, 살아 있는 행동과는 거의 무관한 관념의 놀이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이 같은 고정관념 때문에 책을 읽는다면 의례히 등화가친의 계절, 가을만 생각하는 습성 또한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고 있다. 왜 이런 습성이 생겼으며, 그 연원은 어디에 있었을까. 문학평론가 김주연씨는 어떤 글에서 이같이 비뚤어진 독서풍토는 사대부 중심의 조선조 사회가 만들어낸 공리주의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글 읽기가 출세의 길트기에 다름 아니었다. 논어, 맹자, 중용을 읽는다고 했지만, 그것은 결국 과거에 급제하기 위한 시험공부에 바쳐졌다. 많은 선현들이 책을 읽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았으며, 훌륭한 저술을 많이 남겼으나, 일반적인 인식은 「써먹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출판문화와 책읽기도 이제는 눈에 띄는 상승작용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여름에도 새 책들이 여전히 쏟아져 나온다. 책을 읽는 층이 점차 두터워진다는 반증이다. 문학류의 서적 출간이 얼마 전까지 만도 가을과 봄에 쏠렸으나, 이젠 여름을 선호하는 경우마저 없지 않다고 한다.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책을 읽는 분위기는 아직도 요원하다. 이른바 교양서적은 여전히 제한된 일부 독자층에 의해 제한된 시간, 제한된 장소에서 읽혀질 뿐, 도서관 좌석의 대부분이 시험 준비생들로 채워지고, 잘 팔리는 책의 무게가 시험 준비용 서적에 실리고 있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는 차 속에서, 벤치의 한 모퉁이에서,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앉은 계곡에서, 거의 알몸인 채로 바닷가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책읽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책읽기의 참맛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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