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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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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논설주간 시절 칼럼>
작성자 아트코리아 | 작성일 2018/03/22 | 조회 48

<매일신문 논설주간 시절의 칼럼>




 
 악담 넘어 덕담으로—매일신문 2005. 1. 4
 
 
 새해 들어 며칠째 덕담(德談) 속이다. 휴대전화나 이메일은 가히 그 세례로 넘쳐난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들의 목소리나 짤막한 메시지는 삭막해져 있는 마음에 짜릿한 전율을 안겨주는 경우도 있다. 몇 해 전부터 속도가 붙고 있는 현상이기는 하나, 심지어 아날로그 세대까지 눈에 띄게 가세하고 있을 정도로, 연하장이 현격히 준 대신 휴대전화 메시지들은 크게 늘어나 ‘달라진 세상’을 실감하게 된다.
 아무튼 상투화됐다고 하더라도, 덕담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을수록 좋은 미풍양속(美風良俗)임에 틀림없다. 들을 때도 그렇지만, 그런 말을 할 때는 기분이 더욱 고조되는 걸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덕담이란 단순히 ‘그렇게 되십시오’라고 축원하는 데 끝나지 않고, ‘이미 그렇게 되셨으니 고맙습니다’라는 언령관념(言靈觀念)이 배어 있다고 일찍이 최남선(崔南善)은 풀이한 바 있다. 그런 것 같다. 분명 말에는 그렇게 되라고 하면 그렇게 되어지는 어떤 ‘신비스런 힘’이 들어 있다.
 그래서 그럴까. 새해 덕담 나누기는 지구촌의 공통적인 풍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민족이나 나라에 따라 그 빛깔만 조금씩 다를 뿐이다. 미국에서는 ‘해피 뉴 이어’가 대변하듯 ‘행복 추구’가 주요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쿵시화차이(恭喜發財)’처럼 재물(財物)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배어있는가 하면, 일본에선 ‘새해가 시작되니 축하합니다’라는 인사가 주류이듯이, 상대적으로 보면 다소 추상적인 빛깔을 띠고 있는 경우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으뜸인 모양이다. ‘복’이라는 말에는 재물․출세․자식․부인․남편 복 등 많은 의미가 두루 포함돼 있기 때문일까. 게다가 만나서 인사를 나눌 때는 ‘복’이라는 추상성 뒤에 구체적인 덕목이 보태지면서, 득남․건강․치부․승진 등 상대방의 처지에 따라 그 빛깔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덕담은 세태의 변화와 맞물리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몇 해 전부터 ‘부자 되세요’가 회자(膾炙)돼 우리의 가치관에도 ‘물질적 풍요’가 주요 미덕으로 자리 매김 하는 감이 없지 않았다. 이 가치관은 절대빈곤층이 계속 늘어나는 가운데 정치권에서 수백 억대의 돈이 오가는 데서 오는 상실감이나 박탈감과도 무관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올해는 한동안 바람을 일으켰던 ‘부자 되세요’라는 말마저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날로 어려워지는 경제 사정과 서민들의 얇아지는 주머니 탓으로 그런 소망마저 시들해져 버린 건지, 아예 포기해 버렸기 때문인지…. 아무래도 물신주의(物神主義)나 배금주의(拜金主義)가 지양되거나 극복된 것 같지는 않으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사실 평소 우리 사회에는 악담(惡談)이 덕담을 뒤덮고 있는 형국이다. 남을 속이고 해치고 아픔과 슬픔을 주는 말들, 실현 가능성과 동떨어진 허언(虛言)이나 구두선(口頭禪)들이 난무하고 있다. 세 치 혀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가 하면, 그 폭력이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셰익스피어는 일찍이 ‘사람은 비수를 가시 돋친 말 속에 숨겨둘 수 있다’고 했지만, ‘마음의 소리’이며 ‘정신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말이 새해 덕담처럼 평소 일상에도 널리 확산될 수는 없을는지….
 올해도 해바라기를 하기 좋은 전국 곳곳에서는 인파가 넘쳐났다고 한다. 남에게 ‘부자 되세요’라고 말할 마음의 여유마저 잃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쳐지게 했던 한 해를 훌훌 털어 버리고, 새로운 희망을 안고 새해의 새 빛을 열망하는 행렬이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만성화된 실업, 최악의 경기 침체, 그 끝이 안 보이는 정국 불안과 흔들리는 사회 안전망,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앙(災殃) 등은 우리를 여전히 옥죄고 있기 때문이리라. 젊은이들의 경우 절박한 상황에서 더더욱 자유롭지 않다. 수십 차례 취업의 문을 두드렸으나 면접마저 한두 번 봤을 뿐이었다는 누군가의 고백은 그 사정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패거리 짓기’에 눈이 어둡고 ‘내 탓이오’가 실종돼 버린 듯한 권력층, 민생(民生)과 상생(相生)을 저버린 채 힘 겨루기를 일삼는 정쟁(政爭), 갈등과 대립, 경제적 고통의 먹구름과 골이 깊이 파이기만 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 개인이나 집단 간의 ‘막무가내’식 이기주의…. 우리 사회는 그렇게 뒤틀리고 병들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젠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힘 있고 가진 사람들부터 ‘따뜻한 세상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 잘못은 ‘내 탓이오’, 잘되면 ‘남의 탓’인 너그러움을 회복하면서, 성실하고 정직하며 참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새로운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진정한 덕담’이 일상화(日常化)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정녕 그래야만 한다. <논설주간>
 
 
 
 

 경주 최 부자 가훈—매일신문 2005. 1. 18

 
 경주 최 부자의 가훈(家訓)에 나타난 경영철학은 시대의 변화에도 소중한 일깨움을 안겨준다. ‘10대에 걸친 300년 부(富)’의 비결은 청렴한 선비정신과 투철한 국가관, 충절․애민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빈민 구제를 통한 재산의 사회 환원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세계사에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그 ‘오랜 부의 비결’ 중 첫 번째 덕목은 ‘근검절약(勤儉節約)’ 정신이다. 선대(인조 때)의 최진립이 일으켰던 ‘청백리 정신’을 후손들이 저버리지 않아 부가 지속될 수 있었다. 물건을 아껴 쓰고 이웃에 나누어 준다든가,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라는 가훈은 그런 정신의 소산이다. 근검절약과 나눔 정신이 몸에 배게 하려는 뜻이 담겨 있어 이 삭막한 시대에 귀감이 돼야 한다.
 두 번째 덕목은 재산을 모으는 과정이 정당성․도덕성을 담보로 했다는 데 있다. 그 부의 출발인 최국선(1631~82)에서 최준(1884~1970)에 이르기까지 흉년 때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제했다는 기록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 실천 덕목이 가훈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에 나타나 있다.
 이 집안의 이 같은 선린정신은 동학혁명 때도 화를 피하게 했다. 이익 추구를 위해서는 무차별 인수․합병하는 ‘약육강식’의 논리와는 사뭇 다르다. 소작인들이나 일반 사람들로부터 원한을 사지 않고, ‘정당성의 원칙’을 지켜 존경받았고, 오랜 부도 누릴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더구나 재지지주(在地地主)로서 마름을 쓰지 않고, 향리에서 농민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아픔을 최소화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은 돋보인다. 가훈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가 말하듯, 농민 수탈을 통해 부를 더 키울 수 있었으나 적정 이윤만 도모, 추호의 원성도 사지 않았다. 최 부자는 이처럼 ‘극대’나 ‘최대’보다는 ‘적정’이나 ‘차선’ 선택으로 부와 안정을 꾀했다. 아호마저 최세린은 대우(大愚), 최현식은 둔차(鈍次)로 하고, 이를 본가 문미의 액판으로 만들어 붙일 정도였다.
 조선조는 양반 지배 사회였다. 양반 신분 유지가 곧 부의 유지 조건이었으며, 재산 유지는 진사(進士) 이상이어야 가능할 정도였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란 가훈은 그래서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학문을 해서 양반 반열에 오르되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데는 권력에 맛들이면 그 다툼에 휘말려 보복 당할 경우를 우려한 ‘지혜’가 자리 잡고 있다. 철저한 ‘정경분리(政經分離)’주의였던 셈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정치는 금력을 이용하고, 재력가는 금력으로 세력을 매수하려 했다. 이권을 얻어 더 많은 부를 얻으려고도 했다. 그러나 정경유착(政經癒着)으로 이룬 부는 오래지 않아 정적(政敵)에 의해 파멸에 이르게 마련이었다. 부의 지속에는 ‘정치적 중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가훈은 어떤가. 당시 과객 중에는 풍류객․선비․무인 등 도 많았을 게다. 그들을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인심만 얻었겠는가. 지식과 문화 교류를 통해 다른 지방의 정보를 얻고, 집안 인심을 널리 알리는 홍보 효과도 얻지 않았을까. 또한 가훈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가 이르듯, 나누고 베푸는 ‘공동체적 노사 관계’ 맺기는 휴머니티의 발로이면서 불만 세력을 잠재우는 전략에 다름 아니었으리라.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은 더 나아가 나라를 위해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독립투사 안희제와 협력해 백산상회를 만들고, 막대한 재산을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인재 양성을 위해 1947년에는 대구대학(1967년 청구대와 통합해 영남대학교가 됨)을 설립, 모든 재산과 서책들을 이 재단에 기탁하지 않았던가.
 이 내용을 소상히 담은 전진문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단숨에 읽을 수 있었던 건 오늘의 사회나 부자들이 그런 덕목들과 거리가 먼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리라. 성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부유해질수록 마음은 가난해지는 사회, ‘부익부 빈익빈’을 넘어서는 정당성과 도덕성이 받들어지는 사회는 아직도 멀기만 한 것일까. <논설주간>
 
 
 
 

 대구-‘열림 속의 지킴’—매일신문 2005. 2. 1
 
 대구(大邱)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열려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문학․음악․미술 등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특히 그렇다. 어느 지역보다 앞서거나 해외(선진국)로부터 새 흐름을 빨리 받아들이면서 나름으로 새롭게 꽃 피우는가 하면,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역할도 했다.
 개화기 이후부터 대구에서 활동했던 문인․예술가들 중에는 서울로 무대를 옮겨 선구적 역할을 한 경우가 적지 않으며, 영향력 역시 컸다. 이 지역 사람들의 ‘개방성’과 ‘진취성’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대구에서 싹이 튼 문학․예술의 ‘열림’이 큰 영향력을 뿌리고, 새로운 발전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는 게 바로 그 방증이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언제나 ‘지킴’이라는 주체성이 자리잡고 있었던 점은 주목해야 한다. 대구에서의 ‘열림’은 어디까지나 주체성에 뿌리를 둔 ‘열림’이었다. 달리 말하면, 새로움을 향한 ‘개방성’이나 ‘진취성’이 언제나 ‘보수성’이나 ‘배타성’을 담보로 하고 있었다. 그런 바탕 위에서 ‘보수’와 ‘혁신’이 공존하거나 융화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혁신이 또 하나의 새로운 보수로 ‘자리 매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복합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대구에서의 문학․예술 활동은 이같이 끊임없이 새로움을 지향하면서도 보수성이 두드러지는가 하면, 보수적이면서도 부단히 새로움을 지향하는, 이른바 ‘열림 속의 지킴’이나 ‘지킴 속의 열림’이라는 미덕을 끌어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보기에 따라 이 미덕은 애매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혼선에서 자유롭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이 미덕은 새로운 시대를 선도하게 하는 ‘화두’가 되고,‘동력’이 되는 복합적인 요인이어서 내세울만하지 않을까.
 흔히 대구를 ‘보수적이고 배타성이 강한 도시’라 한다. 이는 주체성이 강하다는 말이 되고, 고답적이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시각에 무게 중심이 가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시각이 전부는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 이후 대구가 ‘변화의 도화선’이 되거나 새로운 흐름을 앞서서 받아들일 정도로 개방적이었으며 진취적인 기상이 두드러지는 도시로 여겨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구가 거느리고 있는 도시 성격이 다분히 이율배반적인 특성을 동시에 거느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점들을 미뤄 보더라도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대구가 거느리고 있는 도시의 정체성은 ‘열림’과 ‘지킴’이라는 상반되는 성격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복합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대구의 정체성’은 ‘열림 속의 지킴’ 또는 ‘지킴 속의 열림’이라고 거칠게나마 괄호를 쳐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문학과 예술은 언제나 우리 삶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그 시대나 그 속의 정신을 반영하며,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적 지형도’들을 함축해서 보여준다. 이 때문에 그 지역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 알맹이에 해당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외부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도시의 정체성은 누구나 수긍하는 가운데 부정적인 이미지를 넘어서서 긍정적인 면이 강조될 수 있어야 한다. 내부적으로는 결속력과 자긍심을 북돋우며, 내외적으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도시 이미지를 새롭게 부각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열림 속의 지킴’이나 ‘지킴 속의 열림’은 대구의 정체성이며, 성장과 발전의 동력이 아니었던가 한다. 개방성과 진취성이라는 측면과 전통(보수성)과 주체성을 중시하는 측면이 어우러져 상호 상승작용을 하게 하는 ‘화두’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개방성이나 진취성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외부의 시각이 대체로 그렇듯이, 보수성이나 주체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열림 속의 지킴’이 더 타당한 규정이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대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정체되고 침체돼 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다. ‘되는 게 없는 도시’ ‘가난한 도시’라는 자괴감에서도 마찬가지라는 느낌이다. 지난해 대구시가 새 슬로건으로 ‘컬러풀 대구'를 정한 까닭마저 ‘이젠 반대 방향으로 달리자’는 역설로 들리는 건 ‘왜’일까. ‘문화산업 도시’ ‘기업 하기 좋은 도시’ 등 지향점도 적지 않지만, ‘어떻게 현실로 변용을 시킬 수 있느냐’가 문제요 과제다. 대구가 그렇게 거듭나자면 위도 아래도 달라져야 한다. 다시 지난날처럼 새롭게 열려야 하고, 그 안에서 흔들림 없이 지킬 것을 완강하게 지켜야만 한다. 아니, 이젠 일단 더욱 확실하게 열려야 한다. ‘열림 속의 지킴’이 대구의 정체성이자 ‘미래지향적인 화두’가 돼야 하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논설주간>
 
 
 
 

 ‘선비정신’을 기리는 까닭—매일신문 2005. 2. 15
 
 
 벼슬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높은 자리를 좇는다. 권력의 속성이 그렇듯이, 그런 사람들은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서 쾌감과 성취감에 젖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문제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대개 물러날 때를 내다보지 않는다. ‘추락의 섭리’를 모르는 경우도 대부분이다.
 정치인들은 흔히 자기의 주장이 국민적 지지를 받는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대중을 앞세워 실제로는 ‘얼굴 가리고 나서기’ 일쑤다. 게다가 자기 허물 발견에는 지극히 인색하다. 발견했더라도 애써 감추려 한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권력이 과연 오래 간 적이 있었던가.
 그러잖아도 ‘권력은 달아오른 난롯불 같다’고 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자신이 타버리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추위에 떨게 되기 때문이다. 그게 권력의 함정이요 모순인지 모른다. 타지 않으면서 춥지도 않으려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상책이라는 점은 말할 나위 없으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의 원인은 복합적이겠지만, 권력 구조와 그 속성이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닐까. 앞에서 언급한 대로, 물러날 때를 내다보지 않고 ‘추락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는 ‘막무가내’식 권력 추구엔 분명 문제가 있다. 남의 허물만 탓하고 자신의 허물은 애써 감추려는 사람들, 권력이라는 난롯불에 마냥 가까이 다가가려는 자세 역시 그렇다. 더구나 그런 사람들끼리 다투는가 하면, 그 반대편 사람들과도 수시로 부딪치기 때문에 세상은 어지럽고 시끄러울 수밖에 없어진다.
 관점에 따라 다를지 몰라도, 정치인들이 나라를 움직이는 원동력인지는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선량’인 그들의 손에 의해 이끌려 가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일으키는 파행적인 분열과 갈등은 국민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급기야 하부구조를 극심한 분열로 몰고 가 갈등과 반목을 증폭시키고 있기도 하다.
 인간 세상에 분열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정도가 문제다. 지난날 우리 사회는 분열됐더라도 수습할 수 있는 처방이 있지 않았나 싶다. 유교적 전통의식이 그것이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선비정신’이 완강하게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웬 케케 낡은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오늘의 세태에 비춰보더라도 결코 낡은 소리만은 아닐 게다.
 선비는 ‘학식이 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사람’ ‘어질고 순한 사람’을 일컫는다. 아무튼 ‘풍류정신’에 뿌리를 둔 ‘선비정신’은 격이 높았다. 그윽한 정신세계에서 물질을 탐하지 않았으며, 권세에 연연하지 않았다. 양심과 지조를 지키고, 가난해도 체면을 알았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받들었다. 그러나 오늘의 세태는 아무래도 그런 ‘고결한 정신’과는 거꾸로 가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유교적인 전통에 모순이나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렇더라도, 일반에까지 선비정신이 파고들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게 하는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불러일으켰음은 자명하다.
 이제 정치권․권력층 등 지도층 인사들부터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교육도, 가정도 달라져야 한다. 성숙한 인성과 합리적 시민의식 갖추기는, 위아래를 막론하고, 소중한 덕목임에 틀림없다. 그 실현은 윗물부터 맑아지는 가운데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학교 교육’의 정상화는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장관이 바뀔 때마다, 여론이 들끓기만 하면, 바뀌는 교육으로는 암담하다. 멀리 내다보면서 국가 경쟁력으로 나아가는 ‘백년대계’여야만 한다. 공동체의 최소단위이자 마지막 보루인 가정의 환경, 어른들이 구성하는 사회의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정 교육’과 ‘사회 교육’도 그에 부응할 때 교육이 바로 설 수 있다.
 해외 유학 열풍과 ‘기러기 아빠’, 이민 행렬이 말하듯이 우리의 교육 현실은 실로 딱하다. 가정 해체도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다. 특히 일부 무모하고 이기적인 정치인들과 사명감을 저버린 엘리트 관료들이 이끌어 가는 우리 사회의 환경은 혼탁과 부조리로 얼룩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같이 일그러지고 뒤틀린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길, 서둘러 키워야 할 덕목은 바로 ‘선비정신’의 회복과 현대적 계승이 아닐는지…. <논설주간>
 
 
 
 

 위태로운 게 어디 문학뿐이랴—매일신문 2005. 3. 1
 

 요즘 문인들은 어깨가 처져 있다. 소외감이나 자괴감에 빠져 있는 문인들도 적지 않다. 글을 써서는 ‘밥’이 안 되고, ‘이름’에 별 보탬도 되지 않는 데다 주위에서 바라보는 시선마저 과거와는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활자 매체가 발달하면서 오랜 세월 정신문화의 중심에 놓여 왔던 문학이 ‘변두리로 밀려난다’든가 ‘죽어간다’는 말이 나온 지는 이미 오래됐다.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며,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때 큰 영향력을 뿌리고, 주머니도 두둑했던 작가들마저 대부분 ‘개점 휴업’ 상태다.
 문학 서적 판매 부진과 문학 저널리즘의 현격한 퇴조는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외환 위기 이후 문학류의 베스트셀러는 10분의 1 내지 5분의 1 규모로 떨어졌다. 지난 한해는 출판사의 92%가 책 한 권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제 전업작가들이 설자리는 거의 없어지고, 절대다수의 문인들에게 원고료나 인세는 ‘그림의 떡’이 돼 가는 세태다.
 이 와중에 ‘필자가 곧 고객’인 ‘질 낮은 문학지’들이 생겼다 없어지고, 없어졌다가는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든다. 이 악순환은 문단과 사회에 ‘공해’를 일으키고, 문학과 문인들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데 이바지(?)할 뿐이다. 권위와 공신력을 자랑하던 문학지들은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있다. 최근만도 연륜이 깊은 ‘동서문학’, 이태 전 ‘21세기 문학’에서 새롭게 변신했던 ‘파라’를 비롯한 몇몇 문학지들이 폐간됐다.
 계속되는 경기 불황과 시대의 변화 등으로 ‘문학이 망하는 건 당연하다’는 한 젊은 작가의 진단도 있었다. 모든 게 거덜나는 판에 ‘문학이 뭐 그리 대수냐’라면 할 말이 군색해진다. 게다가 현학적인 문인들이 기이한 어휘나 꼬인 문장, 풀기 어려운 표현으로 독자들을 질리게 만들거나 문학으로부터 쫓아버린 측면도 없지 않다. 문인끼리의 ‘폐쇄회로의 문학’ ‘문학을 위한 문학’ ‘권력화한 문학’ 등도 악재를 부른 셈이다.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을 더 깊고 넓게 펼쳐내려 안간힘을 보이는 시인․작가들이 왜 없겠는가. 통속적 흐름에 영합하고, 가벼움과 상업성에 경도되는 문인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는 데 문제가 있다. 더구나 제사보다는 잿밥에 눈독을 들이는 사이비 문인들이 크게 불어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형국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문학작품은 물론 책을 읽지 않는 분위기의 확산은 ‘포퓰리즘에의 기울어짐’과 무관하지 않다. 어떤 영화인이 ‘오늘날은 문학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영화가 그 정서적 대변과 트렌드적 성향,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꿈까지 대신하고 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는 놀랍게도 ‘한국 영화 관객 1천만 명’ 시대를 열었다.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큼직한 상들을 받아 우리 영화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문학의 위기는 이같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과 맞물려 있다. 영상 매체와 인터넷의 급속한 발달은 우리의 생활 패턴을 엄청나게 바꿔놓았으며, 그 속도는 계속 붙고 있다. 물질만능주의와 세속주의, 인문학 경시 풍조, 학벌 사회가 부추기는 입시 위주 교육 등도 함께 어우러져 ‘한없는 가벼움’을 부채질하는 추세다.
 매체와 표현 양식이 급속도로 달라지는 이 변화의 시대에 문학의 소외를 놓고 타령을 늘어놓는 건 분명 어리석은 일이다. 문인들이 팔리지 않는 문예지들과 출판 문화의 사양길을 마냥 아쉬워하거나 독자들을 원망하면서 ‘죽어 가는 문학’을 안타까워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가벼움의 시대에 문학은 인생과 현실 세계에 새롭게 눈뜨게 하는 참신한 ‘견인력’을, 한층 고양된 삶을 찾아 나서게 하는 ‘매력’을 증폭시키지 못하는 한 길은 안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문학의 진정한 부활’은 안타까운 꿈이요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흔들림을 넘어서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문학의 위기’는 바로 ‘정신문화의 위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위기가 자살적이든 타살적이든, 걸림돌들을 하나씩 제거할 수 없는 걸까. 이 일에 공급자들부터 뼈를 깎는 심정으로 나서야겠지만,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더 큰 문제가 아닐는지, 수요자 쪽에서도 자성해 봐야겠다. <논설주간>
 
 
 
 

 인륜 실종, 이대로는 안 된다—매일신문 2005. 3. 15

 
 널리 애송되고 있는 김춘수(金春洙․1922~2004)의 시 ‘꽃’은 존재에 대한 인식의 세계를 아름답게 떠올린다. 시인은 이 시에서 사물 그 자체와 함께 존재의 심연에 이르려는 몸짓을 보여준다. 스스로 ‘사물화’됨으로써 상식의 차원을 넘어선 형이상학적 인식의 공간을 열어 보이기도 한다. ‘나’와 ‘너’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가 이뤄질 때 비로소 ‘꽃’을 볼 수 있다는 인식의 공간이다. 특히 그 관계는 대상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줄 때 형성된다는 깨달음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썼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내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고도 적었다. 이어서 ‘나’와 ‘너’의 만남은 대상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인식의 눈’을 뜨면서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달라는 소망을 간절하게 토로하고 있다.
 이 시를 제대로 읽으려면, 존재론적 소망을 담고 있는 “우리는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는 구절을 지나치지 말고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라고 풀이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전인수(我田引水)’식 풀이일는지 몰라도, 시 ‘꽃’ 속의 ‘꽃’은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다. 사람(人)은 사이(間) 때문에 인간(人間)이며, 인간은 그 사이 유지를 지상 덕목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건 아닐는지…. 그런데 요즘 사람 사이가 이지러지고 뒤틀려, 세상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의 꽃밭’이 돼 가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지금 세상은 배금주의, 인명 경시 풍조 등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누구나 실감할 만큼 사회 병리가 깊을 대로 깊어진 느낌이다. 더구나 잇따르는 패륜 범죄들이 대부분 ‘돈’ 때문이라는데 그 심각성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한 가장이 보험금을 노려 인터넷 살인 청부 사이트 운영자에게 아내와 두 자녀의 살해를 의뢰한 사건이 터졌다. 아들과 어머니가 가장 살해를 청부한 사건도 일어났다. 술 취한 가장이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딸에게도 중상을 입힌 사건도 있었다.
 지난 1월엔 자식들로부터 수억 원을 받기로 하고, 수천억 원대의 재산을 관리하는 한 종교단체 간부인 아버지를 청부 납치하려던 사설 경호업체 직원들이 붙잡히기도 했다. 20대 동거 남녀가 전 아내와 전 남편 사이에서 각각 태어난 영아 두 명을 때려 숨지게 하거나 유기했었다. 어쩌다 이런 ‘인륜(人倫) 파탄’에 이르렀는지, 놀랍고 두렵기 이를 데 없다.
 이들 사건들은 성격이 다소 다르긴 하지만, 돈만 좇으며 가정을 저버린,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불륜(不倫) 행각이 낳은, ‘막가는 세태’의 단면들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배금주의, 불륜과 가정 해체 현상, 인명 경시 풍조가 어우러진 ‘총체적인 인륜 실종 상태’는 좀 과장하자면 ‘지옥’에 다름 아니다.
 아무리 돈이 모든 것을 말하는 세태라지만, 돈이면 살인과 납치까지도 서슴지 않는 세상은 분명 살만한 곳이 못 된다. 게다가 신고만 하면 설립이 가능한 ‘심부름 센터’와 급격하게 팽창한 인터넷 사이트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니 실로 기가 찬다.
 사회 구성의 기초인 가정에서조차 이처럼 인륜이 해체돼서는 안 된다. ‘나’와 가족을 같이 여기거나 가족을 더 아꼈던 우리의 전통적인 미덕이 되살아나지 않는 한, 우리 사회가 무너져 내릴 건 뻔한 일이다. 더 늦기 전에 달라지려면, 가정은 물론 학교와 직장, 나아가 사회 전반에 걸쳐 도덕성과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우리 모두가 이에 대한 위기의식 공유를 출발점으로 일그러진 사회를 복원하고, 그런 바탕 위에서 그 건강성과 ‘화해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정신을 바로 일으켜야 한다. 아울러 범죄의 온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인터넷 카페, 심부름 센터 등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와 단속의 고삐를 죄어야 한다.
 인간적인 자제력과 신의(信義), 사랑을 바탕으로 한 건강한 ‘인간 관계’는 인륜과 천륜(天倫)을 저버리지 않는 데서 싹이 트고 자란다. 공동체의 최소 단위이자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가정에서부터 그런 미덕 되찾기에 서두르는 분위기가 무르익어야 하리라. <논설주간>
 
 
 

 ‘생명 존중’ 가정과 사회를…—매일신문 2005. 3. 29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오래된 소설이지만 ‘시간의 침식’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명작이다. 독일 문호 괴테가 1774년에 발표한 이 작품에는 절대성을 추구하던 18세기의 시대적 열정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인기를 누리면서 널리 회자되고, 그 치열함만큼의 생명력도 지니게 된 건 아닐는지….
하지만 이 소설의 부작용과 폐해 또한 만만치 않았다. 주인공 베르테르가 사랑하는 연인 로테에게 실연당하자 비관한 나머지 권총으로 자살해 버린다. 문제는 바로 이 대목에 있다. 베르테르의 ‘극단적인 목숨 버리기’가 비슷한 바람을 몰고 와 ‘모방 자살’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병처럼 퍼지게 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발표된 지 꼭 2세기 뒤인 1974년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는 ‘자살에도 강한 전염성이 있다’며, 이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불렀다. 그 이후 이 용어는 사회학․정신의학 등에 널리 쓰였다. 지금까지 ‘무효화’는커녕 ‘날로 유효화(?)’다.
지난달 영화배우 이은주가 목을 매어 자살한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젊은이들이 그 이전보다 무려 2.5배 이상이나 늘어났다고 한다. 젊은이들의 충동적인 감정 분출이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이 풍조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땅에 떨어지고 있다는 방증이어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고개를 드는 ‘베르테르 효과’로 보이나, 제발 일시적인 ‘미친 바람’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젊은이들에게는 인터넷 확산의 폐해도 간과할 문제는 아니다. 자살을 미화하거나 방조하는 ‘자살 사이트’들이 생명 경시 풍조를 부채질하는가 하면,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부르는 사례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비전과 희망에 부풀어 있지 않은 사회는 내일이 어두울 수밖에 없으므로 근절 대책이 절실히 요구된다.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30명 정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48분 만에 한 명 꼴로 자살하는 셈이다. 게다가 자살자가 해마다 5% 이상씩 늘어나 그 증가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한다. 이 나라가 도대체 왜 이 모양인지, 암담하기 짝이 없다.
대구지방경찰청은 최근 대구 지역의 자살자 수도 해마다 늘고 있다고 밝혔다. 2002년에는 546건, 그 이듬해는 666건이었으나 지난해는 무려 729건이었다. 지난해의 경우 전체의 59%나 되는 40~50대의 자살은 생활고 비관이, 20대는 취업난 등에 따르는 우울증이 주된 원인이라니 우리 사회의 현주소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어떤 유형이든 자살은 인륜에 반하며, 가정과 사회의 파괴 행위에 다름 아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당사자가 속해 있는 가정이나 조직, 나아가서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도 상처와 후유증을 안겨 주게 마련이다. 어디 그 뿐인가. ‘잘못된 자유 의지’가 남에게 ‘큰 짐’을 지우게 하는 경우마저 허다하다.
성서의 ‘시편’에는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어 주셨나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성서의 이 같은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바다. 다만 그 존엄성을 지키지 않고 훼손시키는 데 문제가 있을 따름이다. 알다시피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농경 사회를 이루고, 대가족제를 유지하면서 존귀한 생명과 가족 간의 긴밀한 유대를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 왔다.
그러나 산업 사회로 이행하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핵가족화’에 속도가 붙고, 가족 간의 소통도 뜸해지면서 그런 미덕들이 점차 사라져 삭막해지기 시작했다. 자기중심적 이기주의가 팽배하는가 하면, 불륜과 패륜이 빈발하는 가운데, 생명을 해치는 끔찍한 일들이 부쩍 늘어나게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대가족제로 회귀할 수 없는 사정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적 미덕들을 회복하는 길마저 막혀 있는 것일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힘들겠지만, 더 늦기 전에,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관을 일으켜 세우는 길을 새롭게 열어야만 한다. ‘아노미적 자살’ 유도 요인들도 낱낱이 찾아내고 치유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논설주간>
 
 
 

 ‘맨주먹 섬 독도여, 함께 가자’—매일신문 2005. 4. 12
 
 
초기의 잠수함들은 항해할 때 토끼를 싣고 다녔다. 토끼는 깊은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잠수함 속에서 바지런히 쏘다녔다. 그러다 산소가 모자라면 민감하게 숨을 할딱였다. 숨쉬기 어려워진 토끼의 모습을 본 선원들은 물 위로 재빠르게 솟구쳐 오르곤 했다. 과학의 발달로 지금은 사정이 크게 달라졌지만, 그 시절에는 토끼가 잠수함의‘살아 움직이는 위기 경보기’ 역할을 했던 셈이다.
1970년대에 대구를 찾았던, 소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시인을 ‘잠수함 속의 토끼’에 비유한 바 있다. 시인이 그만큼 사회의 첨예한 자리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게오르규는 시인을 '다가오는 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재빠르게 경보를 보내는 존재'로 보았다. 동시대에도 다른 견해는 없지 않았다.
“옛날 시인은 자기를 예언자라고 생각했다.…<중략>…그러나 오늘날에는 시인이 전문가의 등급에까지 떨어졌고, 호텔 숙박부의 이름 아래 문필업이라는 직업을 명기할 때 일종의 거북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철학자이자 문인이었던 J.P.사르트르의 다분히 자조적인 말이다.
요즘 일본의 독도(獨島) 영유권 주장과 교과서 왜곡이 불러온 한․일 외교전이 국제 사회를 무대로 본격화되는 가운데 한국시인협회는 한 주일 전‘독도 사랑 시낭송 예술제’를 가졌다. 시인 106명 등 140여명의 ‘독도 찾기’였다. 함께 참여해 보았지만, 독도는 이르기 어려운 고도(孤島)에다 일본의 억지 주장 와중이어서 그런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지난 3일 울릉도 뱃길은 파도가 사나웠다. 다섯 시간 만에 포항으로 회항할 때 어떤 시인은 울음을 터뜨렸다. 이튿날 고전 끝에 포항→울릉도→독도→울릉도 항해가 이뤄졌다. 하지만 무려 열 시간이나 소요됐으며, 독도 접안이 안 돼 선상 행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시인들의 독도 사랑은 각별했다. 독도는 ‘한국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이자 ‘미동도 않는 자세로 우뚝 솟은 파수병’(성찬경)이었다. ‘내 조상의 담낭’ ‘내 자식의 담낭’ ‘내 조국의 고독’(고은)이었다. ‘날마다 태어나는 빛의 아들’이요 ‘단군사직의 제단’(이근배)이면서 ‘반도의 야경꾼’(이가림)이고, ‘혈혈단신 맨몸으로/우리 땅을 지키려 나간/맨주먹의 섬’(조정권), ‘인기척이 그리운 사막 같은 대낮’(박정대)이기도 했다. ‘파도, 바람, 물새도 기역 니은 디귿 리을…로/한글 노래 부르는 시인들의 섬’(유안진)이며, ‘비바람 몰아치고 태풍이 불 때마다/안부가 걱정되’(오세영)는 존재였다. 그래서 ‘너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독도여, 함께 가자’(김종해)거나, ‘독도 만세를 부르자’(이근배)는 외침을 터져 나오게 했다.
시인들의 이 같은 독도 사랑은 같은 날 밤 ‘울릉도 시낭송 축제’에서도 이어졌다. 독도를 향해‘바닷바람에 지친 너를 두 팔로 감싸 안는’(이건청)가 하면, ‘두 캐럿 국토의 보석이여’라며 ‘나 떠나도 울지 마라’(이기철)라고 달래고, ‘이 세상 끝날까지/내 고향 독도에서 살으리 살으리랏다’(김소엽)라는 노래를 낳기도 했다.
게오르규의 말이 여전히 유효한 것 같고, 사르트르의 말도 머릿속에 맴돌게 한 이벤트였으나, 보다 냉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도는 분명 우리 땅이더라도 왜곡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며, 국토 영유권 문제라면 ‘감성적 접근’만으로는 제대로 풀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은 외교적 수사를 늘어놓으면서도 독도 침탈 야욕과 역사 왜곡의 입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있다.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막무가내 우기고 있으며, 교과서 개악이 일본 정부의 지시에 의한 것임에도 기만과 후안무치의 망발을 일삼고 있다. 이대로는 한․일 간 외교 전쟁이 불가피하다. 국제 사회에서 공감대를 넓히고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을 찾지 않으면 낭패를 보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이다.
이제 우리는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국제무대에서 일본의 거짓 주장과 왜곡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차단하기 위해 더 늦기 전에‘냉철한 대응과 전략’을 서둘러야 할 때다. 그 해법은 이미 나와 있기도 하지 않은가. <논설주간>
 
 
 
 

 미생지신(尾生之信), 아득한 옛말이로되—매일신문 2005. 4. 25
 
 
옛날 중국 노(魯)나라 사람 미생(尾生)은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약속을 지키려다 목숨까지 잃었다.
그는 어느 날 다리 아래에서 사랑하는 여자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하지만 홍수 때문에 갑자기 물이 크게 불어 약속한 곳에서 기다리기 어렵게 됐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애인마저 나타나지 않았다. 미생은 그런 급박하고 황당한 상황 속에서도 약속을 지키려 최선을 다했다. 물이 더 불어도 애인을 기다리며 다리 기둥을 부둥켜안고 버티었다. 그러나 사면초가(四面楚歌), 물살에 휩쓸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런 일로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신의(信義)를 이야기할 때 이 고사를 인유(引喩)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그 평가는 당연히 엇갈리게 마련이었다. 당시 소진(蘇秦)은 미생을 ‘신의가 두터운 사나이의 본보기’로 꼽았다. 장자(莊子)는 달랐다. ‘쓸데없는 명목에 사로잡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른 사람’이라고 폄하했다.
‘미생지신’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하더라도, 요즘 사람들은 약속을 너무 쉽게 저버리는 것 같다. 약속을 저버리기만 할 뿐 아니라, 저버렸다는 그 사실 자체마저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렇지 않더라도 ‘모르쇠’이기 십상이다. 특히 정치인들은 그 ‘대표 선수’ 격이라 할 수 있다. 번드르르한 ‘말의 성찬’ 뒤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식이지 않은가. 말하자면 미생은 골치 아픈 인물 아니면, 바보가 돼버리는 세상이 아닌지 모르겠다.
오는 30일의 재보선을 코앞에 두고 다시 도처에 말의 성찬이 넘쳐난다. 지도층 인사들은 진정으로 민생을 살피려 하기라도 하는 건지, 패거리 짓기나 줄 서기로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국민 역시 개인이나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선거 바람몰이가 또다시 한창이다. 일부 지역 선거를 겨냥해 서로 상처와 흠집 내기, 현실성이 희박한 공약 남발, 당리당략과 불신감의 팽배 등으로 어지럽기 그지없다.
한 철학자는 “정치가의 궁극적 목적은 권력을 휘두르며 남을 지배하는 데 있다”면서, 정치가를 “도적이 아니면 사기꾼”이라고까지 폄하한 바 있다. 그러나 한 사회, 한 국가의 독립과 번영, 존속을 위해서라도 정치는 필요하며, 어떤 작업보다도 어렵고 개인적인 희생을 요구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우리의 정치 풍토는 정책 대결보다는 지방색 위주의 패거리 짓기, 지역 이기주의나 집권 야욕이 애국심보다 앞서 온 게 사실이다. 커다란 풍선 같던 공약(公約)은 정치적 목적만 이뤄지면 곧바로 물거품처럼 공약(空約)이 돼버리곤 했다.
선거철은 철새 떼의 대이동 시기이기도 하다. 심지어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는 소용돌이가 거듭돼 왔다고 해도 지나치지만은 않다. 지금도 그 사정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데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정치적 신조나 국민을 위한 헌신의 자세보다는 야망에 불 지피거나 이해(利害)를 따라 움직이는 행렬이 길어지고 있지만, 자신도 그 대열에 끼어 있지 않은지도 자성해 봐야 한다.
영천(永川) 국회의원 재보선 현장만도 ‘총성 없는 전장’에 진배없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구․경북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여당의 공세, 이에 맞서 낙동강 전선 사수에 나선 야당의 대응은 가히 처절할 정도다. 여․야 지도부가 총출동해 요동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으나 과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려’ 하는 건지, 유감스럽게도, 묻지 않을 수 없다.
한 철학자의 말을 다시 빌리면, 이런 때에 “모든 국민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정치가의 가면을 쓰고 설치는 깡패나 사기꾼의 벌거벗은 꼴을 가려내는 작업”이다. 물론 선택의 기준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속고 속이는 세상, 그러고도 또 속는 세상은 아니어야 한다.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말의 성찬이나 공약(空約)에 현혹되는 어리석음은 반드시 경계돼야만 한다. 현명하지 못한 선택은 그 피해가 부메랑처럼 어김없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더더욱 잊지 말아야 한다. 미생(尾生)과 같은 ‘위인’도 함께 살 수 있는 세상, ‘바보’로만 보이지 않는 사회는 안개 저편에나 있는 것일까. <논설주간>
 
 
 
 

 이 세상의 가장 뜨거운 지옥?—매일신문 2005. 5. 10
 
 
프랑스 작가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과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의 ‘인형의 집’은 가정의 소중함을 역설적으로 일깨운 명작이다. 비정상적인 가족생활이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가정은 끝내 파탄을 부를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떠올리고 있다.
‘보바리 부인’은 어느 시골 의사 부인의 애정 행각을 그렸다. 다정다감하고 몽상적인 성격의 주인공 에마가 정사를 거듭하다가 빚이 ‘구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극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줄거리를 담은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백미다.
한편 ‘보바리 부인’보다 스무 해 뒤에 나온 ‘인형의 집’은 은행가의 아내로 행복하게 살던 주인공 노라가 남편만 바라보고 사는 ‘인형 노릇’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온다는 얘기를 다뤘다. 널리 읽힌 이 작품 속의 노라가 신여성의 대명사로 부각되면서 여성 해방 운동에 불을 지피기도 했었다.
얼마 전 서거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지난 1994년 ‘가정의 해’에 “결혼을 통한 인간 가치의 발견, 부모가 돼 느낄 수 있는 자식에 대한 의무적 사랑, 출산과 자녀 교육의 위대함 등이 위협받고 있는 오늘날 문화는 병든 문화”라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 사회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보바리나 노라는 물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질타했던 ‘병든 문화’ 정도는 시쳇말로 ‘새 발의 피’가 돼 버렸다. 가정의 안정과 가족 관계는 심각한 위기를 맞아 웬만한 충격은 ‘엽기적 가정 파괴 다반사’ 속에 묻힐 지경이다.
흔히 가정은 공동체의 최소 단위이며, 그 마지막 보루나 소중한 안식처라고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인정이 각박해질수록, 직장이나 사회가 급변하고 유동적일수록 그런 말이 부각되게 마련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가벼워질 수 없다. 실제 요즘 가정이 ‘속박의 사슬’로 작동하거나 이지러지고 부서져 만신창이가 된 경우가 너무나 많다. 심지어 가정의 구성원 간에 서로가 심하게 상처를 입히므로 ‘이 세상의 가장 뜨거운 지옥’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예전에는 세상이 느리게 바뀌었다. 안심하며 믿을 만도 했었다. 한 고장에서 태어나면 거기에서 살다 죽는 게 보통이었고, 일자리는 대개 ‘평생직장’이었다. 친구는 언제까지나 친구가 되기도 했다. 이와는 아주 다르게 ‘변화’가 일상화돼 버린 오늘날 믿을만한 건 혈연관계뿐이다. 하지만 그 마지막 남은 인간관계조차 ‘불편할 때는 언제나 끊을 수 있고 바꿀 수도 있다’는 가치관의 뒤틀림으로 파탄에 이르는 가정이 얼마나 많은가.
핵가족의 폐해는 더 큰 것 같다. 가까운 탓에 그만큼 더 쉽고 진하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가족 간의 불화에 지난날처럼 어른이나 친지 등 중재자가 끼어들 여지마저 없어져 버렸다. 싸움을 피해가게 해주던 다른 인간관계마저 없어져 그 함정은 더 커진 셈이다.
우리 부모들은 자식 위한 희생을 미덕이나 숙명으로 여겨 왔다. 자식들에게 사랑을 일방적으로 퍼주면서 이에 대해 보답해야 한다는 교육은 소홀히 했다. 그 결과 부모의 희생을 공짜로 여기는 분위기가 됐고, 극단적으로는 패륜적 이기주의, 노부모나 어린 자식 유기 등으로 이어지게 한 건 아닐는지…. 날로 높아가는 이혼율 역시 헌신은커녕 상대의 헌신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 탓이 클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남을 생각할 줄 모르는 챙기기와 편 가르기,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냉혹함, 뿌리 없이 흔들리는 가치관 등은 반드시 지양돼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갖가지 기념일로 가득 차 있는 이 ‘계절의 여왕’ 5월에 보바리나 노라를 무색케 할 지경으로 무너지거나 이지러지는 우리 사회의 ‘마지막 보루’를 새삼 떠올려본 건 이달이 ‘가정의 달’이기 때문이다. 지난 1일은 근로자의 날이자 아버지의 날, 5일은 어린이 날, 8일은 어버이 날이었다. 오는 15일은 스승의 날, 16일은 성년의 날,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15일은 또한 ‘부처님 오신 날’이기도 하다. 이런 날들의 의미를 진정으로 되새겨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굳이 이런 날들이 있어야 하는 까닭이 ‘하도 안 되니까’에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논설주간>
 
 
 
 

 가짜․거짓말이 날개 다는 사회—매일신문 2005. 5. 24
 
 
얼마 전의 일이다. 한 음식점에 들어가면서 신발장 옆 꽃병에 꽂혀 앙증스럽게 눈길을 끄는 한 송이 장미를 보았다. 마음속으로 “참 잘도 만들었군”하면서 만져보았다. 그런데 가짜 꽃이 아니었다. 순간, 진짜 꽃을 가짜로 본 자신이 부끄러웠다. 진짜를 보면서도 ‘진짜로 보이는 가짜’로 여긴 자신이 기가 막히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가짜들이 진짜처럼 행세하거나 심지어 가짜들이 진짜를 밀어내는 세상이기 때문에 생긴 불신증(不信症)이라는 ‘자기 위안’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참 한심하구나”라는 자괴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지금 세상은 사실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다. 때로는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로 보이고, 진짜가 가짜들에 떠밀려 가짜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아 가짜와 진짜를 바로보기 어려울 지경이지 않은가. 이런 징후가 ‘나’뿐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 혼란에 빠지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섣불리 말할 수는 없으나, 혹시 우리 사회 구조가 요즘 가짜를 진짜로 믿도록 무리하게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닐는지…. 나아가 이런 풍토가 진짜를 가짜처럼 변두리로 밀어내고, 가짜들이 진짜들의 자리를 버젓이 차지해, ‘진짜 같은 가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우려되는 점은 불행하게도 그 이상이라는 데까지도 미치게 된다.
한 학자가 우려했듯이, 문제의 심각성은 ‘가짜의 횡포’ 그 자체도 그렇지만, 그 횡포를 빈번히 겪은 결과 우리의 ‘사고방식마저 왜곡되고 있지 않은가’라는 우려에 닿게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가짜에 대한 경계심이 정상적 자위책을 능가해 이상심리(異常心理)로까지 발전할까 걱정된다는 얘기다.
우리 속담에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는다’는 말이 있고, ‘팥을 콩이라 해도 곧이듣는다’는 말도 있다. 이 두 속담은 반대되는 말 같지만 기실은 비슷한 말이다. 전자는 불신증의 소산이며, 후자는 안 그런 척하면서도 남의 말을 쉽게 믿는 사람을 조롱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두 속담을 두고 생각해보면, 후자에 마음이 더 깊이 가닿는 건 ‘왜’일까. 전자는 우리 사회가 거짓말에 심각하게 오염돼 ‘구제 불능’이라는 절망감을 안고 있다. 이에 견주어 후자의 경우는 ‘그런 사람은 바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음에도 반드시 그렇지만 않다는 틈을 보여주고 있다고 봐야 한다. 속이고 속는 세상이라 하나 절대로 속지 않겠다는 마음보다 더러는 속아주는 마음이 훨씬 인간적임도 말할 필요가 없을 게다.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나 근래의 신문 지상에는 ‘날개를 다는 거짓말들’이 어지러운 느낌이다. 어느 국회의원의 ‘독립군 딸’ 논란이 그렇고, ‘유전(油田) 의혹’의 전 건교부 차관의 ‘오리발 내밀기’가 그렇다. 어느 국회의원의 ‘병역 기피용 손가락 자르기’ 논란과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는 변명도 마찬가지 사례다. 거슬러 오른다면 그 끝이 안 보일 지경이지만, 이 세 가지 경우만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부끄러워질 정도이지 않은가.
이 일련의 의혹 행진은 그 진실의 뿌리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는 쉽게 예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들의 말이 ‘긁어 부스럼 만들기’나 ‘거짓 새끼치기’로 가지 않고, ‘말 아끼기나 입 다물기’로만 갔더라도 의혹을 덜 사고, ‘가짜 행세’라는 누명(?)에서 조금은 더 자유스러워 질 수 있지 않았을까.
거짓말은 무겁다고 한다. 아무리 힘이 센 장사라도 억눌린 양심을 견디지 못한다는 말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그야말로 너무나 단순한 진리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지도층 인사들이 행여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면 정말 안 될 일이다. 법정에서도 거짓말을 하는 ‘위증’이 크게 늘고 있다지만, 윗물부터 맑아야 아랫물도 그렇게 될 수 있을 터이다.
아무튼 가짜는 가짜이고, 진짜는 진짜다. 가짜가 진짜처럼 보이고, 그 때문에 진짜가 가짜에 밀리는 사회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진짜를 보면서도 ‘진짜로 보이는 가짜’로 여기는 불신증도 치유돼야겠지만, 가짜이면서 ‘진짜를 밀어내는 가짜 진짜’여서는 더욱 안 된다. 나아가 행여 우리 사회 구조가 가짜를 진짜로 믿도록 강요하고 있다면 기필코 달라져야만 한다. <논설주간>
 
 
 
 

 상아탑이 낭패로다—매일신문 2005. 6. 7
 
 
대학은 ‘정신적 행동의 장소’라는 뜻을 담은 ‘상아탑’으로 불리어 왔다.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어원이 말하듯이, 대학의 전통적 개념은 교육․연구․봉사 기능을 중심으로 한 ‘진리 탐구의 전당’이다. 하지만 대학들이 상아탑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학문에 정진하고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교수들이 적지 않더라도 여러 가지 여건이나 풍토가 크게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학생들에게는 학문 탐구보다는 졸업한 뒤 일자리 만들기가 최우선 목표요 과제다. 연구실을 지키기보다는 돈이나 보직에 신경을 쓰는 교수들이 느는가 하면, 연구비 유용과 착복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들도 빈발하고 있다. 심지어 연구비는 ‘눈먼 돈’이라는 말이 나돌고, 그 유용이 관행처럼 굳어졌다는 비판의 소리까지 나오는 판이다.
오늘의 세태에 비춰 대학들이 상아탑으로 남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지식 기반 정보사회는 급변하는 발전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기능과 역할을 끝없이 요구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가치관의 흔들림에 있지 않나 싶다. 누군가 대학생을 ‘실용파’ ‘고시파’ ‘흥청망청파’로 나눈 바 있지만, 이 분류대로라면 대학은 이미 순수한 학문의 전당이라고 보기 어렵다. 인문학이 죽어가고, 기초학문이 뿌리째 흔들려온 지는 이미 한참이나 됐다. 게다가 학벌사회는 일류대 지상주의로 치닫게 하다가 요즘은 모든 대학의 의대․치대․한의대 선호 추세로 돌아선 모습이다.
우리나라가 성장을 거듭해온 저력은 극성에 가까운 교육열에서 나왔는지 모를 일이기는 하다. 대학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세계에서 대학생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되기도 했다. 대학이 358개, 학생은 무려 355만여 명에 이른다. 진학률도 81%로 미국(63%)과 일본(49%)보다 훨씬 높다. 하지만 그게 또한 큰 문제다.
대학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숫자를 늘려온 결과, 입학 정원이 고교 졸업생 수를 넘어서 버렸다. 백화점식 학과 신설이나 외형 키우기에 골몰한 나머지 교수 한 명에 학생 수는 고교의 두 배가 넘는다. 대학이 급기야 고학력 실업자를 양산하는 곳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제 경쟁력이 약한 대학은 ‘학생 모시기’에 전전긍긍하고 있으며, 경영이 부실한 대학들은 존폐의 기로에서 온갖 살아남기 편법을 동원하는 형국이다. 정부는 이제야 대학 몸집 줄이기에 나서면서 대책을 내놓고 있으나 그 처방은 제자리걸음 수준이다.
한 가지 예만 들더라도,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도 전문대학에 다시 진학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난다는 건 무얼 말하는가. 이 지구촌 어디에도 없을 만큼 복잡한 대학 입시를 치르고도 4년이라는 세월과 막대한 교육비를 낭비한 뒤 취업을 위해 U턴하는 행렬이 길어지는 현상은 대학 교육의 취약점을 단적으로 말해준다고 봐야 한다. 전공 부적응증, 오직 시험 점수에 따른 ‘한 줄 세우기’, 사회 활동과 취업에 도움이 안 되는 대학 교육의 질과 내용이 빚은 결과가 아닐까.
이런 와중에 최근 대구․경북 지역 대학들의 부패․비리 소식을 들으면서는 부끄럽고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일부 대학에서 일어난 일이기는 하나, ‘부패와 비리의 잡화점’을 방불케 할 정도다. 억대의 돈 주고받기 교수 임용, 교비나 국고지원금 횡령, 연구비 유용, 수익금 허위 계상, 학교 건축 비리, 고위관리 매수 등으로 부패 양상은 그 끝이 안 보일 지경이지 않은가.
그 가장 무거운 책임이 대학 자체에 있음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편법 경영이나 비정상적인 교수 만들기와 교수되기로 대학 교육이 바로서고 경쟁력을 갖추기를 바란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그런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피해자일 수 있으며, 우리 사회․국가의 불행과도 무관하지 않다. 실로 상아탑이 낭패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대학은 여전히 ‘진리 탐구의 전당’이자 ‘지성과 양심의 최후 보루’여야 한다. 사회와 국가 발전, 나아가 국제 경쟁력까지 이끌어내는 산실과 원동력이 돼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나라의 장래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과 교수들마저 돈에 눈이 어둡고, 도덕 불감증이 심각하다면 정녕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논설주간>
 
 
 
 

 윗사람의 네 가지 유형—매일신문 2005. 6. 21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윗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직장 상사에서 넓게는 최고지도자까지가 모두 윗사람이다. 그러므로 윗사람이 어떤 유형인가는 크게 신경 쓰일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는 ‘길’이 달라지고, 운명까지도 걱정스러울 수 있다. 물론 윗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아랫사람들도 잘 만나야 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윗사람 잘 만나기를 기대하고 소망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 걸까.
오래 전에 회자된 ‘네 유형의 윗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머리 좋고 부지런한 사람’ ‘머리 좋고 게으른 사람’ ‘머리가 좋지 않고 게으른 사람’ ‘머리가 좋지 않은데 부지런한 사람’이 바로 그 유형들이다. 첫 번째 유형은 ‘똑부’, 두 번째는 ‘똑게’, 그 다음이 ‘멍게’, 마지막 부류는 ‘멍부’라고 부른다는데, 최악의 경우가 ‘멍부’라는 블랙유머다.
‘멍부’가 가장 골치 아픈 이유는 머리도 좋지 않으면서 부지런해 의욕만 앞선 나머지 좋은 성과를 거두기보다 조직에 손해를 끼칠 우려가 크다는 데 있다. 한발 더 나아가서는 엉뚱한 일을 다반사로 저질러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고생 또한 이만저만이 아닐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나쁜 인물이 ‘멍부’보다는 덜 괴롭히는 ‘멍게’라 한다.
상대적으로 가장 훌륭한 경우는 분명 ‘똑부’다. 그러나 그게 또 그렇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다. ‘똑부’는 따라가기 버거우며 사실 잘 안 되는 일이 적지 않으므로 그보다는 유능하면서도 적당히 틈새를 보이는 ‘똑게’가 낫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윗사람을 만나 좋아하거나 미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윗사람과는 싫든 좋든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윗사람론’이 부정적인 빛깔을 띨 경우 단순한 블랙유머 차원을 넘어서서 절실하게 호소하고 싶은 ‘아픔과 고통, 비판과 비난론’에 연계될 가능성이 커져버리게 된다. 특히 ‘멍부’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곳이 직장이든 사회나 국가든 어둡고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출처가 어딘지는 모르나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 80 가지’에 대한 얘기도 거의 같음 맥락의 비아냥을 거느린다. 몇 가지만 들어보자. 프로는 불을 피우고, 자신이 한 일에 책임지며,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가 하면, 자신의 일에 목숨을 걸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며, ‘너도 살고 나도 살자’다. 하지만 아마추어는 불을 쬐고,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회피하려 급급하며, 돌다리를 두드리고도 안 건너는가 하면, 자신의 일에 변명을 걸고, 자기 이야기만 하며, ‘너 죽고 나 죽자’다.
논리의 비약일는지 모르겠으나 ‘아마추어 정부’ 논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마추어 참여 정부’론이 여러 차례 대두되자, 얼마 전 한 정부 측 인사가 ‘아마추어가 희망’이라고 맞서 또 다른 비판의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아마추어일수록 구태와 시류에 덜 물들었으니 희망’이라는 얘기지만 아무래도 어불성설이다.
사실 요즘 정부가 추진하는 ‘제대로 된 일’을 보기 어렵고, 국정 전반에 걸친 ‘경고음’도 나날이 증폭되는 형국이다. 경제는 계속 곤두박질인데 무슨 대책이든 내놓기만 하면 효과보다 혼란만 부를 따름이다. 행담도와 서남해안 개발 사업, 공기업 지방 이전 문제, 부동산․교육․연금 문제 할 것 없이 거의 예외가 안 보일 지경이다.
더구나 대통령 자문위원회와 측근들의 월권과 편법 문제를 두고는 국민의 실망이 극에 이르렀으며, ‘균형 발전’이라는 명분과 부동산 대책들도 편법만 거듭해 부른 결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시스템에 의한 국정 운영’을 표방해온 대통령이 스스로 각 부처 조직을 제치고 아마추어(비전문 인사)들에게 주요 국책사업들을 암암리에 맡긴 건 프로정신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라도 잘못되거나 고장 난 시스템, 편법과 코드만 맞추기를 지양하는 게 옳다. 변명만 하고 남의 소리를 안 들으려 한다면 ‘너 죽고 나 죽자’를 면하기 어려워진다. 정부가 머리 좋은 사람들의 집단이라면 적어도 ‘아마추어’나 ‘멍부’나 ‘멍게’ 윗사람들이라는 소리는 안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논설주간>
 
 
 
 
 
 사이버 폭력, 도를 넘었다—매일신문 2005. 7. 5
 
 
말은 그 사회를 반영한다. 전혀 다른 사회를 만들기도 한다. 새로운 말들은 그 유형도 천차만별이다. 우리 사회의 밝고 어두운 현주소를 다각적으로 비춰 보인다. 느리게 또는 빠르게 당대 사회를 거울처럼 비추지만, 빠르게 모습을 드러낸 말들은 대개 빠르게 사라진다.
디지털 세대의 인터넷 세상에는 각별히 새로운 말들이 넘쳐난다. 그 말들은 아날로그 세대를 당혹감에 빠뜨리기 십상이다. 두껍고 높은 벽이나 담장 안에 ‘별천지’가 펼쳐진다. 그 세상에는 그들만의 특이한 공간이 있고, 그 안에 빠져든 청소년들이 마치 외계와 같은 세계에서 유영한다고나 할까. 그 중심에는 어김없이 무작위로 돋아난 특정 문자들이 판을 친다.
그 사이버 공간에는 영어․한자어․일본어까지 합세한 말들,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일그러진 기형 언어’들이 홍수를 이룬다. 철자법이나 띄어쓰기, 받침마저 무시된다. 그런 ‘합성 기호’들이 난무하면서 언어의 정연한 질서를 무차별로 뒤흔들어 놓는다. 온라인의 익명성에 기댄 채 언어폭력, 한글 파괴로 치닫는 모습 또한 비일비재다. 물론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비속어․유행어․욕설 등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정도가 문제다.
언어 독버섯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네티즌들의 ‘나쁜 은어․속어’의 경우 포털 사이트들까지 금칙어로 여긴다. 하지만 독버섯 같은 새 변칙어들은 젊은이들 사이에 급속도로 번지면서 고삐 풀린 망아지를 방불케 한다.
포털 사이트에 금칙어를 교묘하게 바꾼 변칙어들이 활개를 쳐온 지는 오래됐다. 변칙 키워드로 회원들을 모으는 불법 카페들이 범람, 당국이 통제하기엔 힘이 턱없이 미치지 않는 형편이기도 하다. 유해하다고 판단되면 금칙어로 등록해도 네티즌들이 만드는 변칙어를 따라잡을 수 없는 형편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날로 위력이 커지는 가운데 욕설과 비방, 터무니없는 인신공격들이 도를 넘어 우리 사회를 뿌리째 흔드는 느낌이다. 시궁창 같은 ‘오물 언어’들이 넘쳐나고, 변칙어들의 활개는 날로 기승이다.
최근 정부가 ‘인터넷 실명제’ 도입 검토에 나섰다. 일정 특정 사이트의 ‘댓글’ 등에서 시작한 뒤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연구 중인 모양이다. 하지만 시민단체와 네티즌들의 반대 여론도 만만찮은 것 같다.
인터넷 실명제는 ‘표현의 자유’와 ‘사이버 폭력’이 대비되는 민감한 사안이다. 이에 대한 찬․반 논란이 거세지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인터넷은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며, 소통과 토론의 사이버 만주주의의 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익명의 역기능’은 인터넷 강국인 우리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사이버 폭력은 이제 위험수위와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하다. 이 역기능은 인터넷 문화의 성숙한 발전을 막고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고 있다. 하지만 실명제가 능사는 아닐는지 모른다.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를 훼손할 수 있으며, 주민등록번호 기재로 인한 개인 정보 유출 확산 등 부작용도 그에 못지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도 있는 사회적 논의와 의견 수렴이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논설주간>
 
 
 
 

 빠르게, 한편으로는 느리게—매일신문 2005. 7. 19
 
 
사람들은 요즘 살아가는 게 힘이 든다고 한다. 도무지 여유를 가질 수 없다고 한다. 살아남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고도 한다. 사실 우리는 지금 바쁘게, 쫓기듯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황금만능(黃金萬能)’의 세상에 내던져진 채, 순리를 거스르면서까지 이익을 찾아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과연 얻고 있는 건 무언가. ‘부익부 빈익빈’의 골이 갈수록 깊어지는 가운데 한결같이 불만이 커지고 있지는 않은지. 만약 그렇다면, 잘살고 싶은 욕망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는 얻는 게 적다는 얘기가 아닐는지….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무한경쟁에 따르는 스트레스가 무거워지는 것은, 간디가 ‘지구의 자원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충분하지만 인간의 욕심을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듯이, 우리 사회가 끝없이 부추기는 ‘욕망 키우기’ 탓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치권만 하더라도 빈 수레처럼 ‘빨리 빨리’ 소리만 높여가고 있다. 개혁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사안마다 지지부진하거나 방향감각마저 아리송한 경우가 적지 않다. ‘민생(民生)’과 ‘경제’는 구두선(口頭禪)에 묻히고, 이기주의를 내세운 대립과 갈등만 증폭되는 느낌마저 없지 않다. 개혁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기는 하지만, 청와대건 정당이나 국회건 무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무얼 기대해야 할지. 종잡기가 어렵다.
세계화와 디지털로 상징되는 현대의 코드는 분명 ‘속도’다. 그러나 ‘빨리 빨리’라는 삶의 패턴이 확산되고 있는 한편으로는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 ‘육이오’ 등 취업난과 직장 퇴출을 일컫는 신조어들이 좀체 사라지지 않는 ‘스트레스 사회’가 여전해 우리를 우울한 늪에 빠뜨린다.
옛날 우리나라를 일컫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동이열전(東夷列傳)’에 기록돼 있다. 공자(孔子)의 7대손인 공빈(孔斌)은 여기에 우리나라를 ‘풍속이 순후해서 길을 갈 때나 음식을 먹을 때 서로 양보하는 예의 바른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썼다. 또한 구한말에는 ‘은자(隱者)의 나라’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점차 변화와 마주치고, 세상은 끊임없이 달라졌다. 불과 30여 년 만에 우리나라 산업화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한강의 기적’이 이뤄졌다. 그 이후 우리의 전통적 미덕인 ‘은근과 끈기’는 ‘빨리 빨리’로, ‘양보와 예의 바름’은 ‘남보다 먼저, 더 많이’로 바뀌어 날로 속도가 붙어 왔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이미 2000년대 들머리에서 우리나라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보급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며, 정보 혁명 발전 속도 역시 마찬가지라 했다. 우리는 그만큼 ‘빨리 빨리’ 가고 있으며,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강박감에 빠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빨리 빨리’는 부작용과 폐해도 더욱 키웠다. ‘빠름의 미학’에 기운 나머지 밀란 쿤데라가 말한 바 그 ‘느림이 감속의 기법을 다룰 줄 아는 지혜’를 놓쳐 온 형국이다. 그래서 어둠과 그림자가 더 짙어지고 있다.
‘느림’을 ‘게으름’으로 봐서는 안 된다. 이는 빠름에 적응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아니라 ‘창조적인 게으름’이라 해야 옳다. 특히 정신문화에 있어서는 피에르 상소의 견해대로 ‘느림은 부드럽고 우아하며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므로 소중하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래도 그 방식을 너무 도외시해 온 것 같다.
‘느림의 미학’은 더구나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므로 ‘결과 집착과 과정 소홀’을 면하기 어려운 ‘빠름의 미학’에만 기울어져 놓친 게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 큰 잘못은 ‘가치관의 흔들림’에 있다고 봐야 한다. ‘정신문화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이 ‘물질적 풍요와 이기적 욕망 추구’에 밀려나 버린 ‘뒤집힌 가치관’도 ‘느림의 미학’ 실종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빠르게’와 함께 ‘한편으로는 느리게’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속도가 곧 경쟁력’인 이 디지털 시대에 과정만 중시하면서 느리게 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소가 적절하게 섞이고,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모든 것이 제대로 굴러가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도 보다 살맛나게 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느리게’가 갖는 미덕을 최대한 살린 ‘빠르게’ 미학의 새로운 추구가 우리를 거듭나게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논설주간>
 
 
 
 

 믿을 만한 말들을 듣고 싶다—매일신문 2005. 8. 2
 
 
말은 세상과 더불어 시작됐다. 세상을 낳았다. 말은 세상을 만드는 사상을 담고 있는 그릇이자 그 방식이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그렇게 말이 있었다. ‘인간 세계를 낳은 말은 사상이며, 사상은 말이다’라는 하이데거의 견해도 같은 맥락이다. 이때의 말은 깊은 사상과 비전을 끌어안고 있는 ‘나직한 담론’이거나 그와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니체는 ‘폭풍을 일으키는 건 가장 조용한 말이며, 비둘기의 발로 오는 사상이 세계를 좌우한다’고 갈파한 바 있다. 말의 진정한 효능에 대한 성찰로 읽힌다. 말잔치가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말을 줄이고, 침묵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을 때만 말을 하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말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의 깊은 사고, 진실과 확고한 믿음이 담보돼야 한다. 그렇지 못한 말은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갈등을 부르거나 그런 부채질을 하기 십상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부쩍 더 그런 소용돌이 속인 것 같다. 날이 갈수록 화해나 희망의 말들보다는 갈등이나 절망의 말들이 무성해진다. 특히 최고 권력층 인사들의 절제되지 않는 말들이 혼란을 가중시키고, 그 파장은 온 나라를 뒤숭숭하게 흔들어대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역 구도 해체 등을 내세운 ‘대연정’ 제안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런 말들의 끝은 안 보인다. ‘한나라당 주도’를 주장하며 정권까지 내놓겠다고 하다가 여야 모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 빛깔이 또 다소 달라졌다. ‘선거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추는 등 발 빠르게 말을 바꿨다. 더구나 ‘대연정 제안은 반대급부이고, 진정으로 제안한 것은 선거제도를 고치자는 것’이라고 했다.
한술 더 떠서 ‘귀담아듣지 않고 거역하면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한 말은 거의 ‘협박’ 수준으로 읽힌다. 비판이나 비난에도 ‘요즘 더 나빠진 게 뭐냐’는 식의 말은 또 어떤가. 이 같은 정치적․전략적 ‘억지’에 공감할 이들이 과연 어느 정도나 될는지…. ‘민심이 천심’임을 아랑곳하지 않은 말들이 아닌지 모르겠다.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여당마저 엇박자를 보이고 있는 까닭을 모르는 건지, 알고도 딴청인지, 오로지 정치적 욕망과 그 목적만 우선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그 ‘말빚’들을 국민이 짊어져야 하고, 그에 따르는 갈등이나 고통 역시 국민 몫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또한 포퓰리즘의 한 방법론이라면 해도 너무한다.
‘탈무드’에는 혀에 얽힌 일화들이 적지 않다. ‘행복 비결’을 파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한 상인이 거리에서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판다고 외쳤다. 많은 돈을 주겠다는 아우성이 넘칠 때, 뜻밖에도 그 비결이 ‘자기 혀를 조심하는 것’이라고 했다. 요즘 혼란을 부르는 말들은 이 일화 속의 ‘행복 비결’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말이 고마우면 비지 사러 갔다 두부를 사온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나라 어른의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럴진대, 대연정에 관련한 대통령의 말들을 어느 모로 봐도 고와 보이지 않는다. 최근 일련의 말들이 고도의 정치 전략적 소산이지,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는 말들로 들리지 않는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거짓말은 아니라 해도 위헌 소지까지 있음에도 거침없이 나오는 말들 속의 진실을 헤아릴 수가 없다. 말 속에 진실이 적으면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신뢰가 무너지게 될 건 뻔한 이치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가 말하듯이, 진실하지 못한 말은 큰 파국을 부르게 마련이다. 그런 말들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물게 돼 있으며, 끝내는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발을 빼지 못할 지경의 수렁에 빠져들게 한다.
휴가를 끝낸 뒤의 대통령은 새로워지기 바란다. ‘나직한 담론’의 미덕도 잊지 말기를 권한다. 선동 정치, 흘리기 정치, ‘눈 가리고 아옹’식 정치에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쳐 있다. 끼리끼리 문화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국민은 무성한 말잔치와 특정 세력의 권력 잡기․유지가 아니라 경제를 살리고 외교를 잘하는 정치 지도자들을 원하고 있다. 믿을 만한 말들, 진정한 희망을 안겨주는 말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천심에 눈 가리고 귀 막지 않는 ‘나라의 어른다움’을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논설주간>
 
 
 
 

 군자와 귀족을 보고 싶다—매일신문 2005. 8. 16
 
 
우리 사회가 탐욕과 도덕불감증․가치도착증에 빠져 있는 느낌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돈과 명예와 권력을 좇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예의와 아부, 선물과 뇌물을 구별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동서고금을 통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더러운 물과 깨끗한 물이 함께 흐르기는 했다. 그런 어느 쪽이 큰 흐름인가가 문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아무리 봐도 ‘남들이 어떠하든’이 아니라 ‘남들이 다 하는데’라는 풍조가 큰 물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 큰 물줄기는 바뀌어야 한다. 도덕군자의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한 사람 한 사람이 깨끗한 물에 합류한다면 점차 청류(淸流)의 시대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오늘날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진부한 속담이 새삼스럽고 소중한 일깨움으로 다가온다.
세상 만물은 ‘극성’ 뒤에 제자리로 돌아가는 ‘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달이 차면 기울고, 꽃이 피면 어김없이 지는 법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썩을 대로 썩었으니 그 다음 차례가 된 게 아닐는지…. 그러기를 기대하는 게 고목에 새 잎이 돋아나고 꽃도 피기를 바라는 바와 다름없기만 한 것일까. 정녕 그러할까.
오늘의 정부나 정치권을 바라보면 암담하기 그지없다. 어느 한 구석을 봐도 사정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최근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그렇듯이, 큰일을 하거나 가진 계층일수록 실망감을 넘어 절망감을 안겨 준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남을 생각지도 않는다. 남을 이용하고 괴롭히는 일마저 서슴지 않는다. 게다가 마음대로 안 될 때는 억지와 궤변을 늘어놓기까지 한다. 거짓이 거짓을 낳고, 그 말들이 그런 말들을 ‘구르는 눈덩이’로 만들며, 그 소용돌이 속에서 국민은 깊은 시름을 놓아볼 날이 없을 지경이다.
조선조의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군자에게는 귀하게 되려고 하는 귀욕(貴慾)이 있고, 소인에겐 부자가 되고자 하는 부욕(富慾)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전자는 귀욕을 키워 귀족이, 후자는 부욕을 충족시켜 소민(小民)이 된다고 했다.
지나친 비관인지는 모르겠으나, 군자의 자리에 있는 경우라도 군자로 보이지 않고 소인으로 보인다면 비극이다. 당사자를 위해서도, 백성들을 위해서도 그렇다. ‘귀하다’는 말은 흔치 않다는 뜻을 품고 있으므로 귀욕의 실현은 ‘쉽지 않다’가 전제돼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군자에게는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뛰어넘은 극기(克己)와 절제(節制)가 주요 조건이다.
선현들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각별히 받들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안다. 그 중에서도 모든 존재의 생(生)이 실현되도록 돕는 인(仁)을 최고의 덕목으로 쳤다.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義), 판단한 결과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 규범(禮), 사물을 파악하는 지혜(智)는 모두 인(仁)의 실현을 위한 방법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자는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위하며, 자기와의 싸움에서 자신을 이기고, 절제를 통해 귀욕을 충족시키는 ‘귀족’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 현실과 현주소는 어떠한가. 한 역사학자가 통탄했듯이, 정치판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한꺼번에 얻으려는 소인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는 것 같다. 도청(盜聽) 정국만 하더라도 그 치부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권력 상부층의 더러워진 물이 아랫물까지 더럽히는 탐욕의 경기장을 방불케 한다. 감추고 터뜨리는 행태들도 그렇지만, 이를 다시 돈․명예․권력 창출로 확대 재생산하려는 ‘이전투구’의 모습을 보는 마음은 참담하고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은 마땅히 군자를 지향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자신은 그렇다고 큰소리칠 수 있는 정치인이 어느 정도나 될까. 오로지 ‘잿밥’에 다름없는 정치적 목적과 권력 창출을 향해 탈법과 부정을 다반사로 저지르는 소인들이 귀족이나 군자 행세를 하고 있는 건 아닐는지…. 그런 ‘군자 탈 속의 소인’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깊이 끌어안는 군자와 귀족을 보고 싶다. <논설주간>
 
 
 

 여전히 ‘인사가 만사’다—매일신문 2005. 8. 30
 
 
‘참여정부’ 2년 반의 인사 형태가 ‘청와대-회전문, 내각-물갈이, 장․차관급-늘리기’라면 지나친 비판일까. 이미 이 같은 지적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런 인상이 떨쳐지지 않는다. 청와대 참모는 의자만 빈번하게 바꿔 앉은 경우가 적잖은 반면 각료는 너무 자주 그 의자의 주인들이 바뀌었다. 각종 위원회가 늘면서는 장․차관급 자리가 계속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이 세 경우는 어느 쪽이든 ‘코드 맞추기’가 기본이요, 공통분모라는 느낌이다. ‘국민의 정부’보다 몸집은 눈에 띄게 커졌지만, 그에 상응하는 효과를 거뒀느냐는 반대급부로 회의적이다. 가시 돋친 눈에는 ‘패거리 짓기’나 ‘끼리 베풀기’로 보일 수밖에 없을는지 모른다.
정권 초기부터 논란을 불렀듯이, 참여정부 요직이 ‘코드 맞추기 일색’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더구나 그런 인사의 반복으로 ‘전문성이 부족한 아마추어 정부’ ‘약한 정부’라는 쓴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반환점을 돌아선 지금까지 나아지기는커녕 뒷걸음질하는 감도 없지 않다.
청와대 회전문을 가장 많이 돌린 참모는 이병완 비서실장이다. 대통령과 뜻이 맞아 ‘기획조정비서관→정무기획비서관→홍보수석→홍보문화특보→비서실장’에 이르는 자리바꿈을 해 온 게 아닐까. 문재인 민정수석도 시민사회수석을 거쳐 원래 자리로, 천호선 비서관은 ‘참여기획→정무기획→의전→국정상황실장→의전비서관’의 길을 걸었다.
청와대에도 예외가 없지는 않다. 김병준 정책실장을 비롯해 권진호 안보보좌관,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 등은 같은 자리를 오래 지켰다. ‘회전문’파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역시 코드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었을 게다.
열린우리당 출신 정치인들이 절반이나 자리를 차지한 내각의 경우는 청와대 참모들의 인사와는 대조적이다. 걸핏하면 ‘물갈이’다. 이헌재 경제부총리, 윤덕홍․이기준 교육부총리, 김두관 행정자치, 강금실 법무, 이창동 문화, 윤영관 외교 등이 ‘물갈이’의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중앙과 지방을 합한 행정부 인력이 지난해 말 현재만도 91만1천764명이다. 이 숫자는 김대중 정부 출범 직전과 거의 비슷한 규모다. 장․차관급은 당시 101명에서 126명으로 확대, 7년 반 동안 무려 25명이나 늘어났다. 그렇다면 일꾼을 더 쓴 만큼 일의 성과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회전문․물갈이’에도 물론이거니와 ‘늘리기’에도 사정은 그러하지 못한 형편이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은 그 일이 중요하면서 그만큼 어렵다는 뜻도 들어 있다. 12년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바로 이 말을 했으면서도 정작 인사에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다. ‘문민정부’는 막을 내릴 때까지 각료 수명이 평균 11.6개월밖에 안 되는 기록을 남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때도 장관은 ‘파리 목숨’이었다. 5년 동안 무려 90명의 장관이 바뀌었다. ‘비적격’ ‘무질서’ 인사 때문이었고, ‘지역 편중’ ‘정실’ 인사 탓이었다.
‘참여정부’의 ‘만사’는 앞의 정부보다도 정치 기반과 조직이 더 취약하다는 약점을 안고 출발했다. 그 약점을 극복하지 못해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게다가 ‘죄층우돌’ ‘좌왕우왕’이지 않은가.
일찍이 율곡(栗谷)은 ‘임현능(任賢能,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구하라)’이라는 인사 철학을 제시한 바 있다. 지금은 ‘전문성의 시대’이므로 상식만 가지고 풀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나 많다. 이해와 경쟁이 첨예해지고 정확한 판단을 요하는 일들도 그렇다. 하지만 율곡이 말했듯이, 어진 인사의 기용은 더 중요하다. 어진 사람은 도덕성을 갖춘 ‘착한 사람’, 균형감각을 지닌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업도 사람의 됨됨이와 전문성의 바탕 위에서 시스템에 의한 관리와 경영이 이뤄질 때 바람직한 길을 가게 된다. 그렇다면, 국가의 관리와 경영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참여정부’는 ‘코드 맞추기’를 기본과 공통분모로 한 ‘회전문․물갈이․늘리기’와 ‘패거리 짓기’ 끼리 베풀기‘를 지양,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쓰는 ’만사‘를 받들어야 한다.
<논설주간>
 
 
 
 

 하늘을 두려워하고 따라야—매일신문 2005. 9. 13
 
 
맑은 날 뛰어내리는 햇살은 어느 곳이나 고루 비춘다. 흐린 날 내리는 빗물도 만물을 두루 적신다. 사람도 깊고 넓은 도량(度量)을 지니면 햇살이나 빗물처럼 미운 사람과 고운 사람을 두루 비추고 적신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는 햇살과 빗물 같은 도량을 가져야 한다. 도량이 얕고 좁으면 세상은 어둡고 어지러워진다. 게다가 지도층을 비롯한 대다수 사람들이 옳고 바른 말을 접고, 입신출세용 줄서기와 아부를 일삼는다면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중국 은(殷)나라 재상 이윤(伊尹)은 ‘천하가 혼란스러울 때 질서 잡는 사람은 하늘을 무서워하고 따를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임금 노릇을 못할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면 하늘의 뜻을 어기는 짓’이라고도 했다.
이윤은 어느 날, 받들던 탕왕(湯王)이 죽자 아들 태갑(太甲)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하지만 망나니짓으로 나라를 어지럽혀 추방해 버렸다. 한동안 섭정하다가 태갑이 잘못을 뉘우치고 임금의 길을 걷겠다는 뜻을 굳혀 하늘의 뜻을 따르려 하자 다시 임금으로 모신 뒤 극진히 섬겼다고 한다.
장자(莊子)는 ‘덕은 천지에 두루 통한다(德者通於天地)’고 했다. 임금뿐 아니라 누구나 이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게 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거친 세상이 부드러워지고, 가시밭길도 꽃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윗자리 사람부터 먼저 그 미덕을 받들어 덕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행여 윗사람부터 덕을 펼치기보다 권력 유지에 급급한 재주넘기로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면 안 될 일이다. 도량이 좁고 얕으며, 패거리 짓기까지 일삼아서는 더욱 그러하다.
지난 두 달여 동안 몰아치듯 ‘연정(聯政) 정국’을 이끌던 노무현 대통령이 얼마 전 외견상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았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의 회담 뒤 ‘당분간’이라는 전제 아래 일단 휴지기에 들어가는 듯했으나 혼란 부르기는 여전한 듯하다. 잠시 나라를 떠나 해외를 순방하고 돌아온 뒤의 행보는 더 궁금해지기도 한다.
지난 8일 멕시코․코스타리카․미국 순방 길에 오르기 직전, 수석 ․참모들에게 ‘대통령이 비행기 타고 나가니 앞으로 열흘은 나라가 조용할 것’이라고 한 말이 단순한 조크로 들리지는 않는 까닭은 ‘왜’일까. 특별기 안에서 기자단에게 ‘이번에는 가급적 큰 뉴스는 만들지 않겠다’고 한 말 역시 그렇다. 대통령도 자신의 언행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한 모양이나, 그런데도 또 무슨 ‘노림수’를 쓰는 것 같아 아리송할 따름이다.
아무튼, 대통령은 힘(권력)이 세상을 혼란으로 빠뜨리고, 덕이 안온하게 해준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공자(孔子)는 ‘패도(覇道)를 버리고 왕도(王道)’를, 노자(老子)는 ‘병(兵)을 버리고 덕치(德治)’를 권했다. 이들의 일깨움은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할 왕도라고 본다.
나라의 혼란 요인이 물론 최고 지도자를 비롯한 지도자들의 몫만은 아니다. 바르고 옳게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개인 이기주의․집단 이기주의’가 수그러들 때, 비로소 세상은 크게 달라질 수도 있다.
사마천(司馬遷)은 잘못돼가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바른 말을 한 죄로 혹독한 옥살이를 하면서 ‘사기(史記)’를 썼다. 예부터 세상이 썩으면 죄 지은 사람들이 죄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았다. 그래서 임금의 비위장이나 맞추며 이득을 노리는 간신(奸臣)들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목숨 걸고 옳고 바른 말을 서슴지 않은 간신(諫臣)들은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간신(諫臣)이 많아지고, 그들을 알아주는 세상이 돼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
‘깊고 넓은 마음’은 듣기 싫은 말일수록 귀담아듣는다. 자신을 돌이켜 살펴보기도 한다. 남이 욕을 퍼부어도 화내지 않고, 칭찬에 우쭐대지도 않는다. 안 그러면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되기 어렵다. 위로부터 도량과 덕이 깊고 넓으며, 하늘을 두려워하고 따를 줄 아는 세상은 아직도 ‘하늘인 백성’에게는 요원하기만 한 걸까. <논설주간>

 
 
 
 어린이 학대, 해도 너무하다—매일신문 2005. 9. 27
 
 
얼마 전, 19개월 된 원생의 온몸을 때려 십이지장 파열을 일으킨 대구의 한 어린이집 원장이 구속됐었다. 그 얼마 뒤엔 세 살 난 친딸을 마구 때려 의식 불명 상태에 빠뜨린 ‘비정의 어머니’가 경찰에 붙잡혔다. 울거나 떠든다는 이유로 어린아이들을 그 지경으로 만든 원장이나 어머니의 행위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라며 혀를 찼을 것이다. 더구나 이와 유사한 일들이 빈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어른들의 어린이 가혹행위는 소름끼치게 하는 인면수심(人面獸心) 작태의 행진, 바로 그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조금 더 거슬러 오르면, 어머니의 체벌을 받다가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가 사망한 인천의 한 사건, 보육 위탁된 초등학교 3, 4학년 자매를 눈 부위에 피멍이 들고 정수리 머리카락이 뭉텅 빠지게 한 대구의 한 어린이집 원장 폭행 사건 등 떠올리기조차 민망한 우리 사회의 그늘진 단면들이 비일비재일 정도다.
한 조사에 따르면, 아동 학대(虐待)를 한 사람의 80% 이상이 부모이며, 이들 대부분은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아동 학대가 결손가정이나 극빈층에서 주로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라는 통계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모든 계층, 모든 사회 집단의 평범한 사람들이 아동 학대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 같은 불행한 사태들이 그늘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남의 집 일에 개입하기 싫어하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큰 걸림돌이다. 또한 아동 학대 행위 신고 의무자인 교사․의료인․복지시설 종사자들이 그 사실 자체마저 모를 뿐 아니라, 신고 위반 행위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는 점 역시 큰 문제다.
게다가 요즘은 어린이 보육시설에서 아동 학대 사건이 자주 터졌지만, 어린이를 믿고 맡길 데가 마땅하지 않듯이, 더 근원적으로는 우리의 엉성한 보육 정책이 비판과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형편이다.
빈발하는 어린이집 관련 문제는 이미 1990년 정부가 영유아 보육법을 제정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됐으나 인가제가 아닌 허가제로 바꾼 게 잘못된 게 아닌가 싶다. 어린이집을 많이 만드는 데만 힘을 쏟은 대부분의 정책들이 어린이보다는 종사자들의 복지에만 초점이 맞춰진 감이 없지 않은 점도 한가지다.
어린이는 우리의 희망이며, 무한한 가능성 쪽으로 열려 있는 꿈나무들이라는 사실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다. 전문가들은 유아기 어린이가 받은 심리적 상처는 성장 후에 언제 어떻게 터져 나올지 모르므로 제대로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초등학교에 이를 때까지 사랑으로 돌봐주고 인정해주며 격려해줘야만 어린이들이 제대로 자랄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볼 때, 부모들의 자식 사랑 정상화가 가장 먼저 풀어야 할 과제다. 그러나 보육시설과 저출산 문제 역시 함께 심각하게 우려해야 할 대목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로 떨어져 국가 차원에서도 부랴부랴 갖가지 출산 장려 대책을 내놓고 있기는 하지만, 젊은 부부들과는 여전히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일부 자치단체들은 출산하면 20만~30만 원의 장려금을 주고 있으나 이 정도로는 ‘바위에 대침 놓기’가 아닐는지…..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늘어나고 ‘일과 가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 잡기가 보편화되면서는 어린 자녀를 키우는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보육시설의 질적인 향상과 그 신뢰성이다. 우선 낳아 놓은 아이를 국가와 사회가 행복하게 키워주고, 교육시켜 준다는 믿음을 줄 때 사정은 크게 달라질 수도 있을 게다.
지난해 6월 말 현재, 우리나라 직장 보육시설 의무 설치 사업장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취업모들이 자녀를 보육시설에 맡긴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평균에 뒤지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정부가 영유아 보육과 교육에 투입한 예산도 국내총생산(GDP)의 0.13% 수준에 불과하다. 어린이를 제대로 받드는 국가․사회가 아쉽기만 하다.
<논설주간>
 
 
 
 

 이중섭 그림 ‘위작 시비’ 유감—매일신문 2005. 10. 11
 
 
말과 행동은 그럴듯한데 진실하지 않은 사람이나 진짜 비슷하게 만들어진 가짜 물건을 ‘사이비(似而非)’라 한다. 정교한 모조품은 진짜와 구별이 쉽지 않고, 때로는 진짜를 뺨치는 행세까지 한다. 그러나 진짜와 가짜는 만들어진 과정, 그 속에 담긴 정신이 딴판이다. 진짜에는 창조적이며 독창적인 정신이 깃들어 있다. 고통스러운 삶과 그 고뇌가 투영돼 있기도 하다. 반면 가짜는 겉모습만 진짜를 닮게 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도둑질하려 한다.
네덜란드의 미술품 위조꾼 얀센이 “아침에는 샤갈 드로잉 몇 점을, 점심 땐 아펠의 작품 두어 점을, 오후엔 피카소의 그림 몇 점을 그렸다”고 고백해 세상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가 그린 가짜 그림은 화가들마저 자신이 그린 진짜 그림으로 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도 결국은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샤갈의 가짜 그림을 감쪽같이 그렸으나 작가 사인의 철자를 조금 틀리게 썼다가 들켜버렸다.
미술품 ‘가짜 시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작가치고 위작(僞作) 시비에 휘말리지 않은 경우가 드물 정도다. 고미술품은 50%가 가짜라는 통계가 나온 바 있으며, 예술성과 희귀성 때문에 그림 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작가의 작품을 겨냥한 사기꾼들의 ‘눈독’과 ‘돈독’은 잠들 줄 모르는 ‘극성’이다.
근래에 진위(眞僞) 논란을 빚고 있는 서양화가 이중섭(李仲燮)과 박수근(朴壽根)의 작품들을 둘러싼 말썽이 뜨겁다. 이미 얼마 전, 미술평론가․화가․화상․미술품 감정가 등 미술전문가들이 ‘가짜’라고 판정한 작품들이 검찰에 넘겨져 최근 역시 위작 판정을 받았다. 이중섭 50주기 기념 미발표작 전시 준위원회가 소장해온 이중섭 작품 수백 점, 아들이 갖고 있는 작품들이 ‘위작 조직설’, 그 연루 의혹으로 증폭되더니 진품이라는 유족과 위작이라는 한국미술품감정협회가 맞서다 검찰에 넘겨져 내려진 판정이다.
이번 위작 시비는 지난 3월 감정협이 서울 옥션에 나온 이중섭의 작품과 그의 50주기 기념전 준비위 소장 작품들이 위작이라고 주장한 데서 비롯됐다. 이에 이중섭의 차남이 감정협에 대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면서 가열됐다. 아무튼, 유족들까지 위작 시비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오로지 창작에 몰두하면서 궁핍하게 살다간 예술가에게 돈 문제로 가족까지 누를 끼쳐서야 되겠는가.
이중섭과 박수근의 불우했던 생애를 떠올리면 더욱 기가 차는 일이다. 가난에 찌들었던 ‘빼어난 화가’들이 돈 때문에 사후에도 수모를 당하는 꼴이지 않은가. 우리나라 화가 가운데 타계 이후 성가(聲價)가 치솟고, 그림 값이 엄청나게 오른 대표적인 경우가 이중섭과 박수근이다. 더구나 이들에게 공통되는 특징은 처참할 정도로 불행하고 궁핍한 삶을 살았으면서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는 점이다. 생활에 반비례해서 예술적 성공을 거둔 건 작가적 태도와 개성적인 세계를 창출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중섭은 예술과 현실 생활 사이에서 갈등이 컸고, 마침내 예술을 위해 현실을 돌보지 않았던 화가였다. 이 때문에 가족과 헤어지고, 사회로부터 격리돼 불안․빈곤․방랑으로 점철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후 추인 형식으로 재평가되고, 기구한 생애까지 부각되면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대중적 인기까지 누리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가짜가 어디 그림뿐이랴. ‘가짜가 진짜를 뺨친다’더니, 요즘은 가짜가 진짜보다 더 그럴 듯해 보이는 경우가 없지 않은 세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군가가 우리 사회를 ‘짝퉁 천국’이라고 극언했다. 가짜의 범람은 생활 속에서 가짜 불감증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그렇다. 가짜인 줄 알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심지어 그럴듯하기만 하면 가짜라도 좋다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면 큰일이다. ‘가짜는 진짜로 보이고, 진짜는 가짜로 보인다'면, 가짜일수록 되레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가 발휘(?)돼 있다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가짜 문화, 가짜 상품, 가짜 지도층이 판치는 사회는 안 된다. 진짜만 제대로 발을 붙이는 사회가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가짜를 가려내고 밀어내는 분위기가 우선되고 성숙해야 하지 않을까. <논설주간>
 
 
 
 

 ‘오페라 도시’ 멀기만 할까—매일신문 2005. 10. 25
 
 
경기 침체가 지속돼 나라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체감을 일구고, 새로운 꿈을 향한 의욕을 북돋울 수 있어야 한다. 축제는 바로 그런 몫을 한다. 하지만, 엄청난 변화로 치닫는 오늘의 대도시에서 제대로 된 축제를 이끌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구는 얼마 전, ‘달구벌 축제’ 대신 첫 ‘컬러풀 대구 페스티벌’을 열었다. 세 번째 열리는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지금 막바지다. 둘 다 일정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으나 앞으로 발전적인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대구의 정체성․ 개성과 연결되고 있는 ‘약령시축제’나 ‘섬유축제’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 가는 관심은 각별하다. 오페라하우스가 생겼고, 오페라축제가 대구에서 열린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국내에선 물론 세계적으로 오페라축제가 잘 이뤄지지 않는 까닭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게다. 기획에서 막을 올리기까지 너무나 힘이 든다. 예산이 엄청나게 들고, 이를 어느 정도 받쳐줄 만한 호응도도 큰 문제다. 하지만 어쨌든 대구에서 해마다 열리고 있다.
첫해엔 서울의 2개 오페라단, 지역의 2개 오페라단, 해외의 2개 오페라단이 참여했으며, 지난해도 로마 오페라단의 야외공연이 있었다, 하지만, 그 규모나 내용에 있어서 큰 진전을 가져오지 못했다. 올해도 규모 면에서는 비슷한 수준이나 가능성을 굳혀 보였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지난 9월 29일 막이 오른 이번 축제는 이탈리아 베르디 살레르노 시립극장과 대구오페라하우스가 공동 제작한 ‘리골레토’를 시작으로 체코 프라하 국립극장 오페라단의 ‘돈 조반니’, 국립오페단의 ‘카르멘’이 공연됐으며, 오는 29일 대구시립오페단의 ‘마르타’가 대미를 장식한다. 그간 판소리 오페라 ‘춘향전’, 작은 오페라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가 선보였고, 오늘밤 작은 오페라 ‘버섯 피자’의 막도 오른다.
이미 선보인 오페라들에 대한 반응과 평가는 만족할만한 수준이었으며, 이 축제를 더욱 키워야 할 당위성을 말해 줬다고 본다. 올해 축제는 대구에서의 이 행사가 더 큰 견인력과 매력을 뿜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한층 뚜렷하게 모여 줬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대구는 일찍부터 빼어난 음악인들이 근․현대 서양음악 전통의 맥을 이어 왔다. 오페라 활동만도 다른 지방도시들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대구의 문화․예술적 역량과 저력을 제대로 끌어낸다면 다른 도시와는 달리 ‘오페라를 통한 차별화와 특화’로 새로운 매력을 창출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 축제를 ‘무늬만의 국제 행사’가 아니게 제대로 살리려면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부산 국제영화제, 안동의 국제탈춤페스티벌 등은 오페라보다는 쉽게 열 수 있는 경우이기는 하지만, 특화와 차별화를 통한 매력 만들기라는 점에서는 본받을 점들도 적지 않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아쉬운 대로 이미 구축된 하드웨어에다 소프트웨어에 얼마나 무게가 실리느냐가 문제다. 오페라의 질적 수준 향상, 참신한 기획력, 해외 오페라단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해외 관객 확보, 오페라 대중화와 문화 향수층의 눈높이 끌어올리기 등이 그 관건이다.
올해는 9억 원(시비 7억, 국비 2억)의 예산으로 이 축제를 치르고 있으나 예산 늘리기가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시비도 그렇지만, 국비를 대폭 늘려 전국에서 유일한 이 축제를 제대로 키울 수 있어야만 한다.
음악을 통한 사회 통합, 오페라 도시 이미지 만들기, 인프라 구축 통한 문화 환경 극대화, 고부가가치 창출 등도 숙제들이다. 오페라 중심의 다양한 음악과 인접 예술 무대들도 축제 기간에 동시다발적으로 꽃피울 때 시너지 효과가 커질 수 있다. ‘오페라 하면 대구’, ‘대구 하면 오페라’라는 신기원이 정녕 요원한 일이기만 할까. <논설주간>
 
 
 
 
 
 ‘서러운 황혼’의 사회—매일신문 2005. 11. 8
 
 
‘늙은 어머니가 죽는 네 가지 방법’이 여전히 화제가 되고 있다. ‘딸 둘을 둔 어머니는 외손자를 업고 고무장갑을 낀 채 부엌 싱크대 앞에 서서 죽는다’ ‘아들만 둘인 어머니는 두 아들집을 오가다 길에서 죽는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어머니는 크고 좋은 병원 문 밖에서 죽는다’ ‘아들이나 딸 하나만 둔 어머니는 뒷방이나 지하실에서 죽는다’고 했던가.
첫 번째 경우는 해야 할 일이 끝도 없으며, 둘째는 아들 둘이 서로 부양을 거부하면서 ‘떠넘기기’를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딸은 아들에게 ‘병원에 모시고 가라’며 돈은 안 내고 아들은 병원 문턱까지만 가는가 하면, 네 번째 경우는 그야말로 갈 데가 없어서다.
우리 민족이 가장 중시해온 덕목은 충효(忠孝), 특히 효도(孝道)사상이었다. 그래서 서양 노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우리의 전통적 경로(敬老)사상도 이 지구촌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미덕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떠한가. 어머니의 죽는 방법 이야기가 단적으로 말하듯이, 세태는 삭막하게 달라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우리나라는 빠르게 늙어간다. 고령화 속도가 세계 으뜸 수준이다. 지난 2000년에 이미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7%를 넘어선 ‘고령화 사회’로 들어섰다. 전문가들은 이런 추세로 가면 2018년에 노인 인구 14%가 넘는 ‘고령 사회’, 20026년엔 그 비율이 20% 이상인 ‘초고령 사회’가 될 것이라 한다.
벌써 경북 지역은 노인 비율이 올 연말 14.3%로 ‘고령 사회’, 2020년엔 22%로 ‘초고령 사회’에 이르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게다가 80대의 치매 유병률이 40~50%라니 큰일이다. 노인들은 가족에게 버림받을까 치매를 가장 두려워한다고 하지 않는가.
얼마 전엔 대구 거주 노인 가운데 30%가 가족의 학대 경험이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충격을 안겨줬다. ‘대구시 노인 학대 예방센터’에 따르면, 그런 피해 노인의 절반 이상은 거의 날마다 학대받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들은 심리적 타격이 커도 마음 놓고 하소연할 데마저 없을 게다. 더구나 치매에 걸리지 않아도 그런 경우가 다반사라면, 노인들의 삶은 갈수록 험난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지 않은가.
노인 자살이 크게 늘어나는 현상은 그 극단적인 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 나라 중 가장 높은 가운데 자살자의 28.8%가 노인들이라는 사실은 뭘 말하는가. 버림받고 따돌림을 당하다 못해 그 길을 택하거나 가족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면 너무나 가혹한 비극이다.
노인 부양 문제는 사실 큰 걱정거리다. 고령화 속도가 너무 빨라 지금은 65세 이상 노인 한 명을 생산가능인구(15~64세) 8명이 부양하고 있다. 하지만, 2050년엔 1.4명이 부양해야 할 판이라니 국가의 성장잠재력 추락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코앞에 가로놓인 산’이 아닐 수 없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노인 학대가 극에 이르고 있다는 점이다. 무너져 내리는 윤리의식과 가족 해체로 그 사정도 악화 일로여서 앞으로 ‘대재앙’으로 발전하지 않을는지 걱정이다.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바친 노인들이 자식과 함께 살더라도 구박받기 일쑤이며, 최소한의 생활비조차 안 주는 판에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게 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앞이 안 보일 지경이다.
불교의 최초 경전인 ‘수타니파타’는 ‘부모가 노쇠해 있는데도 부양하지 않고 저만 풍족하게 산다면 파멸의 문에 이르리라’라고 했다. 어머니 밥을 축낸다고 딸을 묻으러간 어떤 효자(孝子)가 그 땅속에서 금종(金鐘)을 얻었다는 옛 얘기, 아버지의 먼눈을 뜨게 하려고 몸을 판 심청이 이야기는 또 어떠했는가. 시인 김광섭이 시 ‘성북동 비둘기’에서 안타까워한 ‘가슴에 금이 간 새’들처럼, 늙고 병든 노인들을 진심으로 돌보는 분위기를 국가․사회, 가족 차원에서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논설주간>
 
 
 
 
 
 50대 여성들의 ‘울며 겨자 먹기’—매일신문 2005. 11. 22
 
 
나이 쉰을 넘긴 여성 취업자 증가율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여성 취업자는 올 들어 10월까지 월 평균 951만3천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 느는 데 머물렀다. 그러나 50대 여성은 월 평균 139만9천 명으로 9.7%나 늘어났다. 이 관련 통계가 나오기 시작한 1984년 이후 미미한 변화를 보였으나 지난해부터 급격히 상승, 올해는 부쩍 심해졌다는 이야기다.
이 기현상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젊은 노동력이 갈수록 줄어들면서 그 빈자리를 이들이 채우게 되고, 상대적으로는 남성의 일자리가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는 방증이 아니고 무언가. 더구나 50대 여성만이 그 이하 연령층과는 달리 유독 두드러져 우리 사회의 어둠과 그늘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우리는 이미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다. 20대는 태반이 백수이며, 평생직장 개념이 무너지면서 30대 후반만 되면 자리가 불안해진다. 그러다 마흔다섯 살이 되면 밀려나야 하고, 쉰여섯 살까지 자리를 지키면 ‘도둑’ 소리를 듣는 풍토다. 만일 예순두 살이 돼도 안 떠나면 ‘오적’에 든다 해서 ‘육이오’라는 지탄을 받아야 한다.
이런 슬픈 현실 속에서 남편 실직, 자녀 고용 불안 등이 겹친 50대 서민층 여성들은 고달프다. 생활고에 쫓기다 못해 생계 차원의 취업에 나서게 돼 임시직․일용직 행렬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다고 해서 생활이 따뜻해지기는 하는가. 월 60만~90만 원대의 저임금 일자리로는 고단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우리 사회의 ‘슬픈 풍속도’는 젊은이들에게 더욱 가혹하다. 청년층의 ‘학력 과잉’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대학 진학률이 82%에 이르는 데다 졸업한 뒤 68.5%나 눈높이를 크게 낮춰 일자리를 찾아도 그 길은 좁게 마련이다. 7급이나 9급 공무원 지망자가 40여만 명에 이르러 ‘공시 폐인’ ‘공시 낭인’들이 양산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석사․박사 학위를 가진 전문 인력들이 제자리를 찾기는커녕 하향 취업 자리마저 얻기 어려워 쩔쩔매고 있는 실정이지 않은가.
고급 두뇌들이 해외로 떠나는 추세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이공계 출신들은 낮은 보수와 사회적 푸대접,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에 해외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다. 해외 유학을 마친 우수한 인력들도 돌아올 자리가 없어 ‘중간인’이 되기 십상이다. 고급 두뇌의 해외행이나 유학파들의 그대로 늘러 앉기는 ‘두뇌 유출’ ‘국가적 낭비’라는 점에서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며, 그 원인과 책임은 어디에 있다고 봐야 할까. 이 모든 불행과 고통의 뿌리가 얽히고설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님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정녕 이대로는 안 된다. 인력 수요 예측 실패에다 ‘민생’이 뒷전인 최고 지도자를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과 정치권 인사들은 각성하고 책임감을 통감해야만 한다.
우리는 지금 총체적인 어둠 속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성장 속의 일자리 부족, 소비 위축, 납세 능력 약화와 세 부담 늘리기,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심화 등 ‘넘어야 할 산’들은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의 해법은 고사하고 더욱 꼬이게 하는 정치와 정책의 기조에 심각한 병인이 있는 게 아닐는지…. 특히 대통령은 과연 이 같은 문제들을 풀어 보려고 순리에 따라 정책을 운용하면서 갈등들을 조정하는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해 왔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는 헌법에 명시된 대로 ‘자유 시장 경제’다. 그러나 정부는 끊임없이 반시장적 정책으로 시장의 자생력을 떨어뜨리고, 잦은 정책 바꾸기로 예측 능력을 저하시켜 자유 시장 경제 원리를 흔들어 오지 않았던가. 더구나 정부와 청와대. 열린우리당의 손발이 맞지 않아 정책 혼선을 부른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 열기와 활기는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50대 여성 취업자 급증은 젊은이들의 ‘별 따기’ 일자리와 ‘평생직장’ 붕괴, 조기 퇴직,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현상 등과 맞물린 우리 사회의 ‘아픈 자화상’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논설주간>
 

 
 
 이 외톨이 청소년들을 어쩌나—매일신문 2005. 12. 6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無人島)에 떨어진 한 택배원의 처절한 생존 싸움을 담은 영화 ‘캐스트 어웨이’는 외로움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일깨워 줬다. 주인공은 택배 물품인 배구공에 가상인물의 얼굴을 그려 넣고, 그것에 자신의 고독을 하소연하기까지 했다.
‘잡을 테면 잡아봐’는 스무 살짜리 주인공의 지독한 외로움을 부각시킨 영화였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사무실로 걸려온 범인의 전화를 받은 주인공은 ‘외로워서, 전화할 데가 없어서, 걸었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범인은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황급히 수화기를 놓아버렸다.
먼 데 볼 것도 없이, 주위에 눈을 돌려보자. 영화 ‘캐스트 어웨이’나 ‘잡을 테면 잡아봐’를 무색하게 하는 일들이 넘쳐난다. 자의든 타의든 외톨이가 된 청소년들이 ‘외로움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증오를 낳으며, 증오는 파멸을 부른다’는, 바로 그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일찍이 공자(孔子)는 ‘소인이 한가로이 홀로 있으면 좋지 않은 일을 하기 십상(小人閑居爲不善)’이라 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인식하고 아는 것과 현실적인 문제는 갈수록 달라지고 있는 느낌이다.
고교생 가운데 친구는 물론 가족과도 담을 쌓고 방에만 박혀 있는 ‘은둔형 외톨이’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이런 고교생이 무려 4만3천여 명에 이른다. 이 중 5천600여 명은 학업까지 포기한 채, 집에 숨어사는 것으로 추산된다니 충격적이다. 집단따돌림(왕따)․자폐증․․대인기피증 등과 함께 이 현상은 우리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엄청난 아픔’이다.
이들 가운데는 심지어 홀로 식사하면서 인터넷에만 빠지고 TV를 보면서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다. ‘핵가족화 시대’에 형제자매 없이 자라나는 데다 부모의 과잉보호, 학력지상주의에 따른 친구 사귈 시간 부재,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폭넓은 보급 등이 주요 원인이겠지만, 진정 안 될 일이다. 이 같은 ‘아픔’은 분명 가정․학교․사회 등 사회문화적 산물이다. 자폐증․대인기피증․왕따 등과 다르다는 점에서도 더욱 우려된다.
얼마 전, 경찰청이 공개한 자살 청소년들의 유서는 가슴 아프게 했다. ‘심심하면 시비 걸고 때리고 욕하고, 죽으면 이런 고통은 없겠지…춥다.’ ‘내가 귀신이 되면 너희를 가만두지 않겠다.’ ‘친구 하나 없고, 난 바보인가보다. 멸시받는 것이 내 운명인가보다.’ ‘모든 것이 무섭게 보인다. 가슴이 답답하고 미칠 것 같다.’
몇 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으나, 이들 유서 내용엔 사회와 친구에 대한 원망과 분노, 고독과 절망 등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정녕 가정과 학교, 우리 사회는 이제부터라도 새로워져야 한다. 청소년들의 자폐증과 대인기피증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을 힘 모아 함께 찾고, ‘왕따’와 ‘은둔형 외톨이’가 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따뜻한 손길과 마음’을 펼쳐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저소득층 청소년들이 보호받으면서 공부하고 놀 수 있는 ‘학교 밖 공간’마저 거의 없는 형편이다. 적잖은 청소년들이 빈집을 지키는 외톨이가 되거나 또래들과 쏘다니는 게 고작일 정도로 소외돼 있다. 안전하고 건전하게 자랄 권리를 잃고, 가정환경에 따르는 ‘교육 기회의 상대적 박탈감’에서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성장한 청소년들은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워질 건 뻔한 일이다. 거리를 방황하다가 사회악에 물드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그렇게 성장한 외톨이는 사회성과 벽을 쌓게 될 것도 한가지다. 결국 이들은 ‘가난의 대물림’을 하게 되는가 하면, 신분 상승 기회로부터도 멀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사회의 밝은 미래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이들에 대한 폭넓고 깊은 관심과 배려, 제도적 장치는 ‘발등의 불’이 아닐 수 없다. <논설주간>
 
 
 
 

 되찾아야 할 ‘모자람의 미덕’—매일신문 2005. 12. 20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지나침'은 경계되고, 중용(中庸)의 미덕이 받들어지는 게 이상적이라 할까. 그러나 요즘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회자되듯이 사정이 적잖이 달라져 있다. 무슨 일에든 남다르게 뜨거운 열정을 가져야 남보다 앞서 성취할 수 있다. 하지만 발전이 가속화되고 경쟁이 치열한 사회로 치달으면서 ‘미치지 못하는 것보다 지나친 것이 오히려 낫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데 문제가 적지 않아 보인다.
이런 가치관은 개인이나 집단의 ‘자기중심적 성취욕 우선주의’ 때문은 아닐는지…. 새치기나 앞지르기가 서슴없이 저질러지며, 심지어 그 믿음을 받들지 않는 사람들을 ‘무능’으로 낙인찍는다면 곤란하다. 더구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경은커녕 ‘모자라는 사람’ 쯤으로 여기는 풍토는 지양돼야 한다.
그뿐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나치게 욕심 부리면서 상대적으로 뒤처진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친다. 심한 경우 남에게 궁핍을 겪게 한다는 사실을 외면해 버릴 만큼 도덕적으로 무감각하거나 해이에 빠지기 일쑤다.
중용도 그렇지만, 진정성을 담보로 한 ‘모자람’은 여전히 아름다워 보인다. 겉으로는 어수룩한 듯하지만, 일단은 우리를 느긋하게 만들어 준다. 완성을 향한 과정을 함축하기도 한다. 달도 차면 다시 기울게 마련이듯이, 초승달에는 보름달을 향한 기대와 희망이 들어앉을 빈자리가 있어 아름답듯이, 삶의 아름다움 역시 그런 데서 싹튼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말이 그렇지, 모자라듯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세상은 그런 여유를 가지기엔 너무나 각박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적 박탈감이나 상처로 괴로워해야 한다. 살벌한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겸양지덕(謙讓之德)도 마음에 와 닿는 경구가 되기 어려운 건 그 때문이다.
눈을 부릅뜨고 버텨도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에 겸손(謙遜)과 사양(辭讓)은 미덕이 아니라 패배와 추락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럼에도, 한 학자가 주장한 대로 ‘모자람이 결함 대신 바람직한 형태의 여유로 여겨지고, 미치지 못하는 것이 무능으로 간주되는 대신 발전을 위한 원동력으로 간주되는 사회’는 정말 물을 건너고 있거나 이미 건너 버린 걸까.
요즘은 아침마다 눈뜨기가 두렵다. 자고나면 놀라게 하는 일들이 기다리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작태들은 한심하고 개탄스러워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정치권은 물론 사회의 어느 모서리를 들여다봐도 거의 예외가 없다. 법과 상식, 질서와 권위, 나라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다. 독선(獨善)과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판을 치면서, 공동가치와 도덕 기준이 허물어진 ‘아노미적 혼돈’이 우리 사회의 피폐한 자화상(自畵像)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요즘 우리를 혼란과 우려, 절망감에 밀어 넣는 일들은 실로 헤아리기조차 민망하다. 여․야의 대립 정국과 그에 따르는 파행, 배아 줄기세포 논문을 둘러싼 의혹과 실망감, 국가기관의 도청과 이를 둘러싼 논란, 사학법 개정 날치기 파문, 과거사 정리 문제, 높낮이 없이 불거지는 아전인수식 패거리 짓기와 적대감 심화, 노․사간의 끊이지 않는 갈등 등은 하나같이 ‘너 죽고 나 살자’는 ‘지나침’의 소산들이 아니고 무언가. 눈앞의 현실이 이 지경이라면 미래는 보나마나다.
우리는 이제 달라져야 한다. 국가 지도자나 국가기관부터 국민적 상식과 기대에 부응하는 길 찾기에 나서야 한다. 지식인들을 비롯한 사회 각계각층도 그런 몸부림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두가 제자리에서 ‘모자라듯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제몫에 충실한 가운데 관용의 가치관도 성숙돼야 한다. 오만과 편견, 한탕주의와 자기기만을 벗은 겸손과 사양의 미덕이 요구된다.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부르는 불신과 반목을 넘어 진정으로 ‘미쳐야 미치는’ 새 지평을 열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논설주간>
 
 
 

 기본 중시하고 평상심 되찾아야—매일신문 2006. 1. 3
 
 
새해에는 ‘나’부터 새로워져야 한다. 성냄과 미움을 밀어낸 자리에 용서와 사랑을 앉히고, 갈등과 반목을 넘어 화해와 관용으로 가는 바람이 불어야 한다. 아래위를 막론하고 ‘너 죽고 나 살자’를 ‘나 살고 너 살자’로 바꿔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아집과 이기심에 빠져 있었다. 겸허하게 제자리로 돌아가 성실하고 정직하게 제 일을 하는 ‘기본’을 잊고 있었다. 하늘을 따르는 평상심(平常心)을 저버리고, 마음속 ‘욕망의 왕궁 짓기’에 혈안이었다.
우리 사회의 혼란과 어둠은 최우선 가치를 물질과 자기중심에 두는 데서 비롯되기도 했다. ‘빨리빨리 증후군’과 ‘한탕주의’가 이를 부채질했다. 탐욕을 서슴지 않고, 진실과 분별을 저버리면서 거짓과 무분별을 벗지 못해 꼬이고 뒤틀렸다. 갈등과 편 가르기가 만연했다.
금력과 권력을 행한 광기는 급기야 국가의 정체성마저 위협하는 방향으로 치달아 국론이 분열되고, ‘거짓’으로 포장된 ‘참’이 미증유의 혼란과 공황 상태를 연출하기도 했다. 물질도 정신도 양극화로 치달았다. 적게 가진 사람들의 위화감과 박탈감을 더욱 키웠다.
역사가 말해 주듯이, 우리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풍토나 압력까지 우리 사회에 퍼져 있다. 우리를 정신적 공황에까지 몰고 간 황우석 교수팀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지만, 악몽 같기만 하다. 한 연구원은 줄기세포 ‘바꿔치기’ 논란 조사 과정에서 잘못인 줄 알고도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자신은 제대로 말할 위치도 아니었다고 했다.
속이기나 알고도 한 짓, 몰랐던 척하는 일은 말할 나위 없지만, 모르고 한 일이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공동체에 손실이나 해악을 끼쳤는데도 ‘몰랐다’고 하면 그만일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는 몰라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왕의 자리를 떠났다. 바늘로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됐다.
오늘의 세태는 오이디푸스의 교훈 근처는커녕 무감각을 한참 넘어 ‘얼굴에 철판 깔기’가 다반사다. 마각이 드러났을 때도 ‘모르쇠’요, ‘남의 탓’ 타령이다. 책임지려 하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래’보다 ‘위’가 더 심하다.
우리는 권력이나 금력 앞에 무기력해질 때도 적지 않았다. 소속 집단에서도 한가지였다. 소속 집단의 이익 문제에 부닥치면, 복종이나 억압 상태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었던가. 이 같은 폐단은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을 부르고, ‘잘못’을 키우는 데 힘을 보태는 역할을 했다. 심지어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면 ‘왕따’가 되기 십상이었다.
윤리․도덕은 ‘지체’를 넘어 ‘땅에 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날보다도 더 숨 막힐 지경이라면 성낼 사람들이 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서 온갖 거짓말이 판을 치고, 그런 거짓 판치기 정황 속에서 우리가 날로 무디어지고 있다면 안 될 일이다.
정치권과 정부는 편을 갈라 싸우면서 온갖 상처를 만들었다. 패거리 지어 민생은 뒷전인 채 갈등과 분열, 추락으로 치달았다. 양극화는 날로 골이 깊어지고, 어느 일 하나 안 꼬이는 게 없었다. 뚜렷한 현상이라면 성과와 속도 부풀리기, 탐욕과 거짓, 땅에 떨어진 윤리의식 등 병폐들만 극명하게 드러냈다.
우리는 그런 지난날의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혼란과 어둠 거꾸로 돌리기와 기본 중시 풍토가 확산돼야 한다. 평상심을 되찾아야 한다. 특히 정부와 정치권부터 정직과 진실을 담보로 거듭나야 한다. 다가오는 지방 선거를 통해서는 아래위가 함께 새 전기를 만드는 교향악을 빚어야 한다. 이젠 민생 우선의 새 바람이 희망의 지평을 활짝 열 수 있어야 한다. <논설주간>
 
 
 
 
 유연성․창의성과 기회주의—매일신문 2006. 1. 17
 
 
찰스 다윈은 ‘살아남는 종(種)은 강하거나 머리가 좋기보다는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1859년 그가 ‘진화론(進化論)’을 내세우면서 한 말이다. 이 논리는 15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히려 그 설득력이 증폭된다.
그랬다. 덩치가 엄청나게 크고 힘이 센 공룡은 살아남지 못했다. 화석이 되고 뼈만 남게 된지도 까마득하다. 하지만 유연성을 가진 생물들은 끊임없이 새 환경에 적응하면서 번성한다. 이 이론은 생물학적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 사회의 새 패러다임으로도 부각되고 있다.
오늘날 유연성과 함께 요구되는 중요한 덕목은 ‘창의성(創意性)’이다. 창의성은 개인의 성취뿐 아니라 국가․사회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력이 된다. 그 덕분에 큰 명성을 얻거나 천문학적 고부가가치를 창출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유연성과 열린 사고(思考)는 문제 해결의 결정적인 힘이 되며, 그 소통(疏通) 능력이 다문화 사회에선 강조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워낙 가파르게 바뀌고 있으므로 유연성과 적응력의 ‘비교 우위’ 차지도 당연해 보인다.
정치 현장에서의 유연성은 더없이 중요한 덕목이다. 원칙과 기본이 끝까지 중시돼야겠지만, 그에 못잖게 유연성과 신축성이 요구된다. ‘아집’이 아닌 ‘고집’이라도 악재를 부를 가능성이 크다. 시대가 빠르게 바뀔 땐 어느 조직, 어느 사회에서나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사람이 유리하다.
그래서 앞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느 한 시점에 고정시키지 않고 유동적으로 바꾸는 ‘프로메테우스형’ 인간들이 넘쳐나게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연성을 넘어 ‘임기응변’과 ‘얼굴 바꾸기’가 다반사인 적자(適者)들만 살아남는다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될까. 경제학자 슈워츠가 일깨웠듯이 ‘묻지마 행렬’이 이어지고, 이들만 득세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게다가 수시로 변화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제친다면 안 될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식’ 정치에 비판의 화살이 끊이지 않는다. 그 중 이번 개각(改閣)과 사학법(私學法) 개정 추진, ‘탈당 시사’ 발언 등만도 곱게 보이지는 않는다. 리더십엔 소통․설득․통합이 중요한 덕목일 텐데, 야당과는 다른 행보라 하더라도, 당․청(黨․靑)간의 갈등으로 적잖은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도 모르는 놈들이 노 대통령을 조롱”한다고 언론의 논객들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 발언 역시 곱게 보이기 어렵다.
대통령 스스로 말했듯이, ‘역발상’, ‘역설적 전술’로 승부수를 노리는 것이 정치적 신념이라면,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을 생각한다고 볼 수 있을는지…. 이부영 열린우리당 전 의장이 ‘정상에 오른 사람의 역설적인 전술은 더 이상 아름답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다’고 한 쓴소리에도 귀를 열 필요가 있다. 국정(國政)이 대통령 한 사람의 ‘내 뜻대로’와 ‘코드 맞추기’로만 간다면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은 쓰레기통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프로메테우수형’ 사람들과 ‘기회주의자’들이 눈앞의 이익만 좇는 ‘묻지마 행렬’을 이루게 되지 않을지, 적잖이 우려된다. 이러다간 유연성 실종이 부르는 악재에다 또 다르게 ‘임기응변’ ‘얼굴 바꾸기’ ‘살아남기용 줄서기’ 등으로 레임덕을 재촉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지도자는 국가를 위한 뚜렷한 전망과 비전으로 끝까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명감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남을 포용하고 기껍게 하며, 모든 걸 아우르는 배려와 균형감각을 잃어서는 곤란하다. 나름의 철학과 소신, 창의성과 카리스마를 갖되 유연한 자세가 요구되며, ‘묻지마 행렬’을 거느리기보다는 단호하게 경계할 수도 있어야만 할 것이다. <논설주간>
 
 
 
 

 덕(德)은 천지에 두루 통하거늘…—매일신문 2006. 1. 31
 
 
‘궁하면 통하고, 통하면 변한다(窮則通 通則變)’. 이는 만물이 존재하는 모습을 말한다. 장자(莊子)도 ‘천지에 두루 통하는 게 덕(通於天地者德也)’이라 했다. 사실 이 세상 모든 건 바뀌게 마련이다. 목숨이 있으면 나고 늙으며 병들고 죽는다(生老病死). 목숨이 없는 경우도 어김없이 생성소멸(生成消滅)한다.
변화(變化)란 있으므로 없어지고, 없으므로 생기는 걸 말한다. 이 같은 변화를 순리대로 가게 하는 것이 ‘통(通)’이고, 이를 순조롭게 하는 게 ‘덕(德)’이다. 숨구멍을 트면서 살 수 있게 하면 덕이 되고, 그렇지 못할 경우 부덕(不德)이다.
인간 세상에선 정직하고 수수하며 사랑하고 베풀면 통한다. 하지만 속이고 꾸미며 미워하고 빼앗으면 막힌다. 이 때문에 덕이 있는 사람은 넉넉하고 너그러우며 마음이 넓고 깊다. 부덕한 사람은 모든 게 그 반대편이다. 옹졸하고 옹색해 마음이 좁고 얕다.
마음이 좁고 얕은 건 ‘나’만 내세우는 탓이다. 이기심과 욕심이 자신을 갉아먹고 망하게 하는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게 삶을 통하게 하지 못하고 막는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 두루 더불어 어울려 산다는 마음이 곧 덕임을 모르거나 모르는 체하는 게 큰 문제다.
‘좌전(左傳)’은 더불어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운다. ‘민신지주야(民神之主也)’는 ‘백성이 천지의 주인’, 즉 ‘백성이 하늘’이라고 가르친다. 천지가 없으면 만물이 없고, 만물이 없으면 백성이 없으며, 백성이 없다면 임금이 있을 수 없다.
더구나 민주주의(民主主義)란 ‘백성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일찍이 남명(南冥)은 ‘임금은 쪽배요 백성은 강물’이라 했듯이, 강물이 순하게 흐르면 쪽배는 제대로 떠갈 수 있지만, 강물이 성을 내면 쪽배는 산산조각날 수도 있다. 이런 이치는 ‘하늘의 뜻’이라고나 할까.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신년 기자회견은 서로 다른 인식을 보여줬다. 박 대표는 노 대통령을 향해 전방위로 대립각을 세울 만큼 판이한 입장이었다. 공통된 점은 양극화의 심각성과 그 해법의 필요성 동감뿐이었다.
사학법(私學法) 재개정 문제, 정부의 규모, 한․미관계와 대북 정책, 국민연금 개혁 등 어느 현안을 놓고도 대척점에 서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양극화 해법에 있어서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연초에 노 대통령이 화두로 던진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정 확대론’에 박 대표는 ‘양극화의 주범은 현 정권’이라고 규정하고, 실패로 끝난 구시대 사회주의의 유물 때문이라는 논리로 상반된 견해를 폈다.
사학법 논란은 ‘재개정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완강히 맞선 박 대표는 한․미 관계나 대북 정책에 대해서도 미국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노 대통령과는 달리 전통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외교 현안을 풀어가야 한다고 했다. 특히 노 대통령의 증세론과 큰 정부에 반기를 들면서 ‘작은 정부와 큰 정부, 감세와 증세 중에서 과연 어느 길이 올바른 길인지 밝히고 국민의 선택을 받자’고 했다.
아무튼 노 대통령과 박 대표가 구태를 벗으면서 정책적 화두를 던져 생산적인 논의로 나아갈 가능성을 어느 정도 시사했다는 점에선 고무적이다. 어제는 김한길․이재오 여․야 원내대표가 ‘산중 회담’에서 내일 국회를 53일 만에 정상화하기로 합의해 다행이다. 하지만 이젠 진정으로 국민이 바라는 게 뭔가를 제대로 읽어야 한다. 박 대표도 예외는 아니나, 칼자루를 쥔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더 늦기 전에 국민이 새 희망을 가지고 뛸 수 있도록 귀와 가슴을 여는 아량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옛 선현들이 갈파했듯이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다. 민심을 잡아 아무리 잔꾀를 부려도 안 될 일이 될 턱은 없다. 민심은 바람처럼 불고 다녀 막을 수도 없는 법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에 있는 지도자들은 ‘통즉변(通則變)’ ‘통어천지자덕야(通於天地者德也)’ ‘민신지주야(民神之主也)’의 순리와 이치를 깨달아 ‘하늘인 백성’을 받드는 바람이 새롭게 일기를 기대한다. <논설주간>
 
 
 
 
 
 ‘말 무덤(言塚)’이 말하는 지혜—매일신문 2006. 2. 14
 
 
예천의 ‘말 무덤(言塚)’을 새삼 떠올린다. 지보면 대죽리 한대마을의 이 무덤은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400~500여 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러나 이 무덤이 말하는 ‘경계(警戒)’ 만은 너무나 분명하다.
옛날 이 마을엔 여러 성씨들이 살았으며, 그들 간에 말로 인한 싸움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과객(過客)이 인근 야산 형세를 보면서 ‘개가 짖어대는 형상이어서 마을이 시끄럽다’고 일러 줬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개에 재갈 물린 모양의 ‘재갈바위’를 마을 어귀에 세웠다. 개의 송곳니 자리에 해당하는 마을 앞 논과 앞니 자리쯤 되는 곳에 2, 3개씩이나 그런 바위를 살치하고, 개의 아래턱에 해당하는 마을 왼쪽 ‘주둥개산’엔 사발을 묻어 무덤을 만들었다.
이 ‘험한 말들 장사지내기’ 이후, 과객의 말 대로 이 마을에는 말싸움이 가라앉고, 화목을 찾았다고 한다. 지금 이 바위들은 경지정리 등으로 마을회관 앞으로 자리가 바뀌기도 했지만, 50여 년 전만도 이 무덤 앞에서 제사가 올려졌단다. 공동체의 화평을 위한 선조들의 현명한 지혜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말들 때문에 늘 어지럽고 시끄럽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도처에 ‘빈말 같은 말잔치’들이 벌어지고, 탈도 많고 문제도 많아지는 형국이다. 진실을 진실이 아닌 것으로, 진실이 아닌 걸 진실처럼 말하는 경우가 적잖은 탓이다. 자신의 영달만 좇는 ‘자기중심적 가치관’이 날개를 달고, 심한 경우 모략과 중상이 고개를 들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빈말 잔치’가 요란하며 ‘돈 공천’설도 나돈다. 공무원들까지 특정인 지지를 유도하는 식사 대접으로 물의를 빚는 등 과열․혼탁 양상도 도진다고 한다. 포항에선 특정 후보 예정자 지지를 유도하며 밥값을 낸 공무원 3명이 적발됐다. 경주에선 공무원 간부회의 자리에서 시장 경선 후보 지지도 변화를 담은 여론조사 자료가 유포돼 논란을 빚었다. 김천에서도 유권자들에게 선물 세트를 돌리거나 식사 대접 요구 등으로 고발되는가 하면, 과태료를 무는 일도 있었다는 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공천 헌금’이니 ‘공천 장사’니 하는 썩은 용어들이 무색해지는 건 물론 ‘빈말 경연’이나 ‘감투만 겨냥한 이전투구’가 더 극성을 부리지 않을는지도 걱정스러워진다. 더구나 5․31 선거의 과열․혼탁 양상은 지방의원 유급화와 기초의원 정당 공천제, 3연임 제한 등으로 예고된 거나 다름없다. 과거와 달리 지방의회에 진출만 하면 적잖은 돈도 받게 돼 ‘너도 나도 나서기’ 바람이 이는 건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공천만 받으면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는 곳에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편법․불법들이 동원될 소지마저 적지 않다.
우리는 선거를 치른 뒤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자신만을 위한 무서운 경쟁들 때문에 정작 해야 할 일들이 묻혀 버리기 일쑤였다. 선거 뒤엔 거창했던 공약(公約)들이 공허한 빈말(空約)들이 되고, ‘거품 지향성’에 따른 허탈감과 실망,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지금 우리가 겪는 어려움들도 빈말들의 싸움과 그 허구에 속은 탓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새삼 말할 나위조차 없다.
이제부터라도 더 아프게 후회하지 않으려면 ‘의식을 마비시키는 선거전’에 놀아나선 안 된다. 정치권이나 후보자들의 행태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를 차단하려는 의지가 확고하다면 사정은 나아질 수도 있다. 합리적인 판단을 가로막고 비이성적인 선택을 유도하려는 행태들을 이젠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개의 해’에 하나씩 ‘마음속 말 무덤’을 만들어 제사지내는 심정으로 난마(亂麻)처럼 얽혀 소란스러운 정치문화를 바꾸기 위한 ‘현명한 판단’이 요구된다. 발레리는 ‘선거야말로 우리 사회의 최대의 암’이라고 했던가. 그 암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분명 우리 몫임을 잊지 말 일이다. <논설주간>
 
 
 
 
 
 민생과 상생은 낙동강 오리알?—매일신문 2006. 2. 28
 
 
잘사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살아 온 게 인류의 역사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부자 나라들이 있지만 그러하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그 정도가 문제다. 두 계층 간의 간극이 자꾸만 벌어지고,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번역․출간된 로버트 A 아이작 교수(미국 뉴욕페이스대)의 ‘세계화의 두 얼굴’은 이 문제를 다뤄 관심을 모은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으로 승자 독식 체제가 구축되고, 패자 보호 장치는 위축돼 세계화에 성공한 나라들마저 빈부 격차가 확대되는가 하면, 중산층이 하류층에 포섭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정보화 물결의 선두에 선 사람들은 거대 기업을 운영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부(富)를 확대해 왔다. 하지만 이들은 점점 빨라지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일의 활력을 계속 못 높이면 도태되는 ‘속도의 덫’에 걸렸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 약점과 제도․교육․문화․정보화의 취약성 탓으로 ‘빈곤의 덫’에서 헤어나기 어렵게 됐다는 진단이다.
아이작 교수는 그러나 반(反)세계화보다 ‘인간적인 얼굴을 한 세계화’와 ‘지속 가능한 세계화’가 요구되고 있으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력을 계속 높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한 그 길은 부자 스스로가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를 구축하는 데 있으며, 특히 저소득 자녀에게 교육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들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의 뜨거운 사회적 화두(話頭)도 바로 이 ‘양극화’ 현상이다. 얼마 전,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우리가 놓인 상황을 “경제는 어렵고, 민생은 고달프며, 사회는 어지럽고, 외교는 불안하다”고 했다. “이 정권의 반시장, 반기업, 반서민정책 때문에 경제가 성장을 못해 중산층과 서민이 빈곤층으로 내몰리면서 최악의 양극화가 생겼다”고도 했다. 처참하고 아프지만 ‘숨길 수 없는 현실’인 것 같다.
이제 4년차에 접어든 참여정부는 여러 여론조사나 국정 평가에서 ‘참담한 낙제점’을 면치 못했다. ‘과거사 파헤치기와 편 가르기’용 국정 과제에 매달리다가 뒤늦게 ‘양극화’를 들고 나오면서도 ‘최악’은 아니라고 우긴다. 게다가 여전히 정치적 어젠다를 쏟아내고, 선거와 집권을 겨냥한 정치적 제스처에만 급급한 인상이다.
대통령이 그런 카드를 꺼내자 여당 의장이 한술 더 뜨는 모습도 곱게 보일 리 없다. 어디 그뿐인가. 현직 장관들을 상당수 징발해 5․31 지방선거에 내보내려하니 ‘이 정권은 도대체 경제도 민생도 뒷전’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장관 자리마저 ‘얼굴 알리기와 지명도 높이기’용이요, ‘선거용 잠깐 자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여전히, 아니 어쩌면 더욱 심하게, 두 극단으로 갈라지고 있다. 더구나 여전히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는 느낌이다. 영남과 호남,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젊은 층과 나이든 층, 사용자와 근로자 등 어느 모로 봐도 성한 데가 없게 된 까닭이 어디에 있다고 봐야 할까.
이런 정치적 정황에 비춰, 백성을 끔찍이 사랑했던 옛 중국 태수 왕존(王尊) 이야기가 새삼스럽다. 홍수가 나서 동네 제방이 위태롭게 됐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산으로 도피했다. 관리들마저 도망치고 서기 한 사람만 울고 있는 가운데 왕존은 제방에서 신에게 지성으로 제사를 지냈다. 물이 계속 불어 둑이 터지기 시작했지만 ‘제 몸으로 대신 제방이 되겠으니 비를 멎게 해 달라’고 빌었다. 한참 뒤 비가 멎고 하늘이 개어 제방은 더 이상 허물어지지 않았다.
백성들은 그 이후 하늘이 왕존의 희생정신에 감동한 결과라고 믿었으며, 오랫동안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나라가 돌아가는 걸 보면 그런 정치지도자가 아쉽다. ‘잿밥 눈독들이기’와 공허한 구두선(口頭禪)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정부․여당을 보고 싶다. <논설주간>
 
 
 

 ‘들은 되찾았지만 아직도 봄은…’—매일신문 2006. 3. 14

 
대구가 낳은 민족시인 상화 이상화(尙火 李相和, 1901~1943))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詩碑)가 대구 수성못가에 건립돼 내일(15일) 제막된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굴종을 강요받았던 ‘암울한 시대’를 넘어 언젠가 올 ‘진정한 봄’을 향해 절규했던 이상화. 그의 염원이 이뤄진 지는 이미 오래됐으나, 그런 염원과 절규의 목소리가 이제나마 그 ‘뿌리의 터전’에 우람하게 선 돌에 새겨져 빛을 보게 돼 그 의미가 각별하게 다가온다.
광복 60주년과 수성구청 개청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구 수성못가 지산하수처리장 상단공원에 세워진 이 시비에는 이상화가 1926년 6월 ‘개벽’ 70호에 발표했을 때의 원문 시가 새겨졌다. 시의 문장들이 지금의 문법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살려(이견이 없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건립 의도대로 교육적인 효과도 기대해볼 만하며, 긴 시임에도 전문이 다 담겼다는 사실도 예사롭지 않다.
연마하지 않은 자연 상태의 고흥석(화강석)에 서예가 권시환 씨가 쓴 글씨들을 석공명장 윤만걸 씨가 새겼으며, 뒷면의 비문은 김규택 수성구청장과 이 시비 건립자문위원회가 함께 썼다. 비석은 4.6m×2.8m×0.8m 규모로 기단석(11t)을 포함한 무게가 무려 28t인 초대형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이상화의 시비는 그의 준열한 생애와 문학적 비중에 걸맞게 이미 몇 군데 세워져 있다. 1948년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상화 시비’(시 ‘나의 침실로’ 부분을 담음)가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임도 주지하는 바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도 지난 1986년 독립기념관에 세워졌으며, 1996년엔 대구 두류공원에 시가 곁들여진 동상이 세워졌었다. 두류공원 동상 시비와 이번 시비 건립에 관여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깊지 않을 수 없다.
이번 ‘빼앗긴 들에도…’ 시비는 특히 이 시의 시상을 떠올렸던 현장이 수성못에서 바라보이는 ‘수성들판’(유력한 설로 설득력을 가짐)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증폭된다. 말하자면, 비록 수성들판이 도시화의 물결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고 하더라도 이 시의 ‘역사성․현장감 살리기’와 ‘오래 기리기’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 이 시비는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내일의 사람들에게까지 ‘나라와 겨레 사랑’의 민족혼(民族魂)을 일깨우는 하나의 ‘상징이요 요람’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빼앗긴 들에도…’ 시비의 입지 역시 지나칠 수 없다. 수성못은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어서 시비가 사랑받을 수 있는 적지다. 더구나 ‘빼앗긴 들’은 일제에 강점당해 주권을 빼앗긴 우리 국토를, ‘봄’은 민족의 광복과 새로운 생명력을 뜻하고 있으므로 가히 ‘민족 차원’의 역사적 의미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작품이 실린 ‘개벽’이 판매 금지 처분을 당할 정도였다는 사실 역시 간과할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 시비는 그의 저항정신, 나라와 겨레 사랑 정신을 기리고, 현대적으로 이어가게 하는 하나의 숭고한 ‘정신적 메카’로 떠오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해지게 한다.
선진국들은 주요 작가의 생가(生家)와 머물었던 곳, 작품의 무대와 현장을 기념물로 보존한다. 이 때문에 작가들이 타계한 지 몇 세기가 지나도 그들의 문학정신과 사상은 살아 숨 쉬게 마련이다. 그 숨결을 더듬어 찾는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문화 자산(資産) 보존이 활기를 띠고, 교육의 장으로 만들어지며, 관광 명소로 뜨면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하지만 대구는 일찍부터 빼어난 문인들을 배출했으면서도 문학기념관은 말할 것도 없고, 작가․시인들의 생가나 살던 옛집 하나 보존된 게 없었다. 대구시는 오래전부터 이상화의 옛집(계산성당 옆)을 보존, 상화 시비와 동상, 묘역(화원) 등을 벨트화하려는 구상을 했으나 제자리걸음만 거듭해 왔었다. 이 와중에 시민운동에 힘입어 이상화가 만년에 2년6개월 정도 창작의 산실로 삼았던 옛집은 가까스로 살아남게 되기는 했다.
지난날 ‘문화 도시’로 자부해 왔던 대구가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달라져야만 한다. 이번 수성못가 ‘빼앗긴 들에도…’ 시비 건립을 계기로 이상화 기리기뿐 아니라 고월 이장희 를 비롯한 다른 문인들에게도 관심과 사랑이 증폭되고 확산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라와 민족을 여전히 걱정하는 이상화가 다른 세상에서 바라보며 ‘빼앗긴 들은 되찾았지만 아직도 봄은 오지 않고 있다’고 노래할는지 모를 일이다. <논설주간>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매일신문 2006. 3. 28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둘째형 이반은 막내 알료사에게 악(惡)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악마(惡魔)는 존재하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인간은 악마를 창조했으며 인간 자신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일깨워 주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악의 화신인 악마를 실제로 본 사람이 있을까. 그럼에도 역사를 통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온 바와 같이, 우리는 악의 존재를 전율할 지경으로 흔하게 마주쳐 왔다. 말하자면, 신은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은 악을 창조했음에 틀림없는 걸까. 더구나 우리 안에도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살아 움직인다. 이렇게 본다면, 악이나 악마는 우리 삶 가까이에 상존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나아가 ‘악마는 신(神)의 대리인인가, 적인가’라는 물음까지 나오게 되는 사실 역시 무리만은 아닌 듯싶다. 심지어 보는 시각에 따라, 이 세상은 악의 소굴이며, 우리는 그 소굴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악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얘기도 성립된다. 그래서 마냥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며, ‘자비를 베푸소서’다.
미국의 역사신학자 제프리 버튼 러셀은 ‘악(또는 악마)은 어떤 식으로 존재하든 결함을 가진 비실체’이며 ‘부정의 부정이고, 사랑의 빛으로 파멸되는 무의미’라고 했다. 20여 년에 걸쳐 악의 문제에 천착, 그 연구 결과로 펴낸 4부작 ‘악의 역사’에서의 이 같은 결론은 각별히 마음을 잡아끈다.
‘악’이나 악의 원리를 인격화한 ‘악마’를 파악하는 일은 인류의 오랜 숙제였다. 여전히 끊임없는 물음을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이 일은 ‘신의 실체․본질 규명하기’이자 ‘현실세계에서의 신으로 상징되는 희망의 논거 찾기’라는 점에서 물음이 멈춰지지 않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러셀은 데블․사탄․루시퍼․메피스토펠레스로 구분,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인류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상됐던 악과 악마의 모습을 좇아 밝히면서 해박한 분석을 가한 뒤 ‘부정은 긍정으로, 악은 선으로, 증오는 사랑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내비치고 있다.
그런 것 같다. 우리는 갈수록 온갖 악과 악마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사랑과 도덕의 실종이 빚어내는 아수라장에 놓여 허덕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종교는 거의 예외 없이 ‘사랑’과 ‘자비’, ‘도덕성’ 회복을 강조해 왔고, 지금도 그런 소리가 작아지기는커녕 더욱 커지는 형국이다.
구체적인 사례들을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요즘 세태는 실로 어지럽고 어둡다. 도덕이 무너지고 악이 창궐하는가 하면, 어느 한 구석 성한 데가 없다는 말도 과장만은 아닌 듯하다. ‘아래’도 예외는 아니나 ‘위’가 더 그렇다는 비판도 마찬가지다. 요즘 다시 새삼스럽게 공자(孔子)가 뜨는 까닭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할 것 같다.
세기말이던 지난 1999년, 우리나라에서는 공자(孔子)와 ‘논어(論語)’가 수명을 다한 것처럼 몰아붙여졌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김경일 지음)는 그 극단적인 예였다. ‘외환위기’라는 처참한 상황과 맞물리기는 했지만, ‘온고(溫故)를 밀어내고 ‘지신(知新)’만 지향하는 바람이 거세졌던 셈이다.
하지만 이제 그 사정은 달라지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무려 서른 종이 넘는 ‘논어’ 번역본과 해설서가 쏟아졌다. 종래의 성리학적 권위를 벗어나 새 시각으로 역주(譯註)에서 경영학 이론을 뽑아내는 책까지 다양한 해석들이 시도됐다. 특히 성인(聖人)을 벤치마킹하고 인간의 길을 배우는 빛깔을 띤 점은 주목된다. 7년 전의 ‘공자 사망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견해들이 적잖아 그간 세상과 가치관이 잘못됐다는 방증으로 읽히게도 한다.
이 같은 바람은 우리의 전통적인 미덕을 찾으려는 마음이 다시 고개 들고, 위계질서와 윤리․도덕이 무너진 정치․사회 현실에 대한 반작용과 자성(自省)의 소산이라 한다면 아전인수식 발상이기만 할는지…. 러셀이 간파했듯이, 악은 ‘결함을 가진 비실체, 부정의 부정, 사랑의 빛으로 파멸되는 무의미’라면, 그 자리에 긍정과 선(善), 사랑과 도덕이 새롭게 살아나고, 온고지신의 미덕이 봄바람만 같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논설주간>
 
 
 
 
 돌아와야 할 ‘신사와 신사정신’—매일신문 2006. 4. 11
 
 
‘품위 있는 체면으로 자기 명예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신사’라 한다. 버나드 쇼는 그렇게 말했다. 오르테카는 ‘단정하고 예의 바른 정신, 즉 깨끗한 신체와 깨끗한 영혼에만 관심을 가지는 인간’을 그런 유형으로 봤다. 푸코의 경우 ‘도덕적 반성’에서 ‘가짜 신사란 자기의 결점을 남에게나 자기에게 속이는 무리이며, 진짜 신사란 그걸 완전히 인식하고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썼다.
신사정신에 대해서도 오르테카는 ‘아무리 심각하고 위급한 상황에 부딪쳐도 삶의 압력과 고뇌에서 벗어나 여유를 가지고 유희에 몰두할 수 있는 정신적 자세’라 했다. 위급한 상황에 서도 여유를 가진다는 건 말이 쉽지 행동으로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악조건에도 침착하고 신중하게 주어진 상황을 바르게 꿰뚫어보는 냉철한 지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드골의 한 일화는 진정한 신사의 모습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어느 날, 그가 강연회 초청을 받고 엘리제궁을 나섰다가 도중에 잠시 연회장에 들르기 위해 차에서 내리는 순간, 반(反)드골 전선의 한 저격범으로부터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전혀 다치지 않은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식들, 사격술이 엉망이로군.”이라며 목적지로 향했다고 한다.
동서고금의 신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이쯤에서 그 정신을 대충이라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충실한 자기성찰’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용’ ‘정의 구현을 위한 자기희생’ ‘논리적 사고와 정확한 판단’ ‘위급한 상황에서의 여유와 용기’ 등이 그 덕목들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이 어지러운 사회에서는 자유와 책임을 깊이 인식하고, 사회 질서와 정의 구현에 이바지하는 ‘건전한 시민의 전형’이 각별히 요구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해 과연 ‘지금도 그런 신사들이 많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는지 의문이다.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실로 실망스럽다. 각종 게이트 사건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보이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브로커 김재록 씨 경우만 하더라도 일말의 절망감까지 안겨준다. 브로커들이 어떻게 그토록 활개를 치면서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다.
게이트들이 말하듯이, 권력에 끈을 달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이들에게 선을 댔기 때문이었다면, 우리의 정치 풍토는 그야말로 말이 아니다. 어떤 집단이나 개인의 이득을 위한 수요와 공급이 이어졌으므로 그런 비리와 부패 구조가 날개를 달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 여당은 끊임없이 ‘편 가르기’를 하면서 ‘충동’을 앞세우는 정치에 불을 붙이고 있다. 그것도 오로지 목적을 겨냥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여전히 브로커와 게이트가 난무하고, 연줄이면 안 통하는 게 없는 정부라면 이젠 나아지기를 기다리기보다 국민 스스로 정신 차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지금 정부의 몇몇 각료들을 보더라도 도무지 신사로 보기 어렵다. 얼마 전, 변양균 예산기획처 장관의 ‘작은 정부론 무색’ 보도에 대한 언론 탓하기와 막말에 가까운 비난 쏟아내기, 김진표 교육부총리의 자립형 사립고에 관련한 ‘한 입 두 말하기’, 추병직 건교부 장관의 추태 등은 제 정신으로 한 일들이었는지…. 자리 지키기도 좋지만 고위 공직자로소 부끄럽지 않은지 묻고 싶다. 특히 변 장관의 지나친 반응은 청와대의 언론 공격 독려와 무관하지 않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어서 어떤 변명도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최광식 전 경찰청 차장도 마찬가지다. 각종 청탁의 대가로 금품을 받아 차명계좌로 관리했다면, 도둑이 어떻게 도둑을 잡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일련의 사태들을 눈여겨보면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비신사’들이 활보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지울 수 없다.
국가청렴위원회가 로비스트의 자격이나 행위의 대상․주체 등을 공청회를 통해 확정짓고, 올해 안으로 로비를 양성화하는 법안을 제출하기로 했다고 한다. 과연 제대로 그런 사람들을 양지로 끌어내 엄벌하고, 더 나은 길을 열어 나갈는지도 지켜볼 일이다. 지극히 영리한 얌체족들의 파렴치한 행위로부터 굵직한 직함을 가진 지도층 인사들의 비신사적 행위들까지 사라지기 바라는 마음은 신사라면 누구나 한가지이리라. <논설주간>
 
 
 
 
 선거전-황사 같은 폭로 바람—매일신문 2006. 4. 25
 
 
선거전은 언제나 의식을 흔드는 한차례 요란한 먼지바람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올봄엔 황사(黃砂)가 극성이듯이, 그런 선거바람 때문에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기 난감하다. 서로 ‘죽이기 작전’으로 치닫는 혼탁 양상은 여전히 천박하고 비열하다는 느낌까지 안겨준다. 마치 판단력을 잃게 하려는 듯 ‘선동에 선동’이라면 과장일까.
윈스턴 처칠은 ‘정치란 것은 전쟁 못잖게 사람들을 흥분시키며, 똑같이 위험하다’고 말한 바 있다. 난마(亂麻)처럼 얽혀 소란한 지금 우리의 정치문화는 바로 그런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것 같다. 고대 로마의 디오니소스가 ‘나라를 멸망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선동 정치가에게 권력을 맡기는 일’이라고 한 말이 새삼스러울 정도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의 ‘폭로’가 기승을 떤다. 막판에는 더 심하게 쏟아질는지도 모른다. 청와대 주요 인사의 인사 청탁 관련 수뢰 의혹, 여당 시장․도지사 후보와 관련된 탈세 의혹, 서울시의 개발지구 분양 특혜 의혹, 서울시장 별장 파티 공개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대부분 선거전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다행히 반응이 지난날과 같지는 않은 듯하다. 그 자체에 부정적인 시각마저 없지 않다. ‘경악할 비리’ 폭로에 되레 역풍이 이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편에서조차 ‘경솔’ ‘유감’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근거가 뚜렷하지 않거나 알맹이가 빈약한 데도 과대 포장되고, 발언 수위만 높은 사례가 잦아서가 아닐는지 모를 일이다.
그보다 더한 이유는 지난날 선거 때 터져 나왔던 폭로들이 당사자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준 뒤 허위(虛僞)로 판명돼 ‘속았다’는 경각심을 갖게 된 경험에 비춰지는 데 있지 않을까. 김대업 씨와 얽혔던 ‘병풍’ 조작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폭로한 쪽은 톡톡한 재미를 봤으나 당한 쪽(당시 이회창 대통령 후보)은 거의 치명적이었다.
선거철에 이런 ‘고질병’이 도지는 주요 원인은 우선 상대방을 깎아내리면서 흠집을 내고 보자는 ‘저의(底意)’와 불리하면 일단 뒤흔들어 놓고 그 다음을 생각하자는 ‘전략(戰略)’에 있는 것으로 본다면 비약일까. 하지만 정치권은 그런 의혹을 떨칠 수 없게 하는 일들을 멈추지 않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선거전은 일정 기간만 필요로 하지만, 그 진실 캐기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게 바로 함정이다. 그래서 ‘폭로’가 어김없이 선거철의 단골 메뉴로 뜨며, ‘소기의 목적 달성용’으로 사랑(?)받는 세태이지 않은가. 이기려면 양심은 일단 팽개쳐 두고 ‘가려진 진실’을 그럴듯하게 왜곡 포장해서 퍼뜨리며, 의도했던 목적이 이뤄진 뒤에는 진실이 제대로 밝혀져도 ‘물 건넌 뒤’가 돼 버리기 십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의 선거 풍토를 볼 때, 폭로는 ‘한탕주의’의 효자였다. ‘거짓 진실’을 과감하게 터뜨린 다음 표 몰이를 한 뒤엔 고소를 당하더라도 법적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적잖이 걸리므로 책임은 미미해지곤 했다. 그러나 무책임한 폭로는 이제 사라져야만 한다. 선량한 사람들을 목적에 이용하는 악의적인 선동에는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만 한다.
‘공천 장사’ 등 온갖 추태들도 그렇지만, 폭로의 행태들을 보면서는 선의를 저버린 저질 정치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불신과 무관심과 냉소를 키우며, 어지러워 눈을 가리고, 악취가 나서 코를 막으며, 불순한 폭로에 귀를 막고 싶은 사람들 역시 그럴 게다.
훌륭한 정치는 정직하고 창조적인 국민을 전제로 한다. 앞선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배경에는 훌륭한 정치가 못잖게 창조적인 일에 집중하는 국민과 객관적이고 차분한 사회적 노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번 지방선거는 국민이 그런 명예 회복을 위해서라도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라 했다. 자연의 현상은 하나같이 모순․대립이라는 싸움이나 갈등에 의해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사랑과 화해를 지향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만물의 아버지도 정도가 문제다. 그 한판 승부는 선(善)이 악(惡)을, 이성(理性)이 감성(感性)을 이기고, 진정한 정치철학이 비속한 인신공격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논설주간>
 
 
 
 
 
 ‘바티칸 코드’와 ‘다빈치 코드’—매일신문 2006. 5. 9
 
 
우리는 사실(事實)의 산물인 ‘논픽션’보다는 가상과 상상력이 빚어내는 ‘픽션’에 끌리곤 한다. 사실을 기록한 논픽션의 감동에 비해 있을 법하거나 있을 수 없지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가상현실에 새로운 상상의 날개를 달아 더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 바이런이 ‘사실은 언제나 소설보다 기이하다’고 한 말은 맞기도 하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중진 소설가 박완서 씨의 등단에 읽힌 이야기는 논픽션과 픽션의 이 같은 차이를 방증한다. 오래 전 본인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어느 날 덕수궁을 지나다가 6․25 한국전쟁 무렵 미군부대에서 함께 일했던 화가 박수근의 회고전이 열리는 걸 보고 당시의 기억의 창고를 열어 쓴 소설이 바로 그의 등단작이자 출세작인 ‘나목(裸木)’이다. 하지만 원래 논픽션(수기)로 씌어졌다가 재미있게 꾸민 이야기를 보탠 픽션으로 재구성됐으며, 그래서 그를 소설가로 부각시킨 출세작 노릇을 했다.
미국은 ‘논픽션 천국’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사실과 진실을 바라보는 냉정과 온유와 절제의 미덕이 두드러지는 논픽션이 큰 대접을 받는다. 유명 출판저작상은 물론 퓰리처상에까지 이 부문이 있고,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낳았으며, 여전히 낳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이보다는 격정적인 형식인 픽션이 주는 감명은 농도가 더 짙게 마련이다.
지난 2002년 댄 브라운이 쓴 소설 ‘다빈치 코드’가 전 세계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출판 기적’을 이룬 이후 최근엔 영화화로 이어져 더 큰 파장과 논란을 부르고 있다. 톰 행크스와 오드리 토투가 주연을 맡고, 론 하워드 감독이 연출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다빈치 코드’는 격렬한 바티칸의 저지와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봄부터 촬영돼 근래에 작업이 마무리 된 모양이다. 이런 사정 탓으로 시사회 없이 올해 ‘칸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오는 17일 선보인 다음 18일엔 전 세계에서 동시 개봉될 움직임이다.
‘다빈치 코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고, 자녀를 두었다는 가정에서 나왔다. 여전히 그 후손들이 유럽 어딘가에 살고 있으며, 이들을 지키려는 시온 수도회와 감춰진 진실을 은폐하려는 비밀결사대 오푸스데이의 목숨마저 앗아가는 갈등을 그리고 있는 기상천외(奇想天外)의 픽션이다.
소설로 이미 엄청난 돈을 벌었겠지만, 영화로 제작에 1억 2천500만 달러를 들였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의 국내 개봉에 따른 순수 광고비만도 30억 원이나 책정됐다는 소문이 돈다. 말하자면 ‘진실 뒤집기’의 선풍과 대대적인 물량 공세로 돈을 벌겠다는 전략을 펴고 있는 셈이다.
반면 ‘바티칸 코드’는 “‘다빈치 코드’를 사지도 읽지도 말라”고 당부했었다. ‘읽고 보도록 둔다’는 여론도 바티칸을 향하고 있는 정황이어서 그야말로 예삿일이 아니다.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이 꾸민 이야기(픽션)는 사실로 받아들일 위험성이 없지 않아 문제다. 게다가 발상 자체에도 심각한 ‘저의’가 있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다.
얼마 전엔 예수의 열두 명 제자 가운데 배반한 가롯 유다가 예수의 요구에 따른 배반으로 기술된 ‘유다 복음’이 공개돼 큰 파장을 일으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유다 복음’은 하느님을 악마로 규정해 이단으로 몰린 영지주의(靈知主義)의 한 분파인 ‘카인파’가 1~2세기에 만든 것으로 유다를 영웅시하는 모양이나 허무맹랑하기 이를 데 없다.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영향력이 막대한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정통적 도그마가 곤욕을 치르는 형국이나, 이참에 ‘요란한 빈 수레’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경계돼야 하리라고 본다. 사실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실체와 진실을 직시해야 하고 떨쳐내야 할 ‘환상’이나 ‘거짓’이 얼마나 많은가. 더구나 독버섯처럼 현혹하는 빛깔들이 화려하고, 다분히 선동적이다.
진리(眞理)는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언제까지나 그 자체로 빛나야 한다. ‘진리의 왜곡’은 오래 갈 수 없겠지만, 세상을 어지럽히는 ‘유혹의 독버섯 코드’ 같아 반드시 경계돼야만 하리라.
<논설주간>
 
 
 
 

 풀뿌리 민주주의, 아직도 먼가—매일신문 2006. 5. 23
 
 
선거 때마다 그랬듯이,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의 민원성 부탁과 정책 반영 요구가 빈발하는 모양이다. 정당한 경우도 있겠으나, 입후보자들을 향해 표를 볼모로 집단이기주의를 내세우는 사례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이 때문에 실현 불가능한 사안을 두고 양자 사이에 표를 의식한 이기주의와 이기주의가 맞물리는 모습까지 빚어진다.
이번 선거가 정책 공약 대결로 나아가는 분위기는 일단 고무적이다. ‘참공약’ 검증을 위한 매니페스토 활동이 두드러지는 점도 그렇다. 하지만 그 이면이 문제다. ‘공약(公約)’이란 이름으로 ‘공약(空約)’을 부추기거나 만드는 경우가 많고, 그런 거품엔 이기주의적 무분별이 고개를 들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 약속은 요구하지도, 하지도 말아야 한다.
여․야 모두 이슈가 될 만한 정책을 ‘얼마만큼 내놓고 있는가’도 문제다. 재탕․삼탕이 허다하며, 폭발력 있는 공약은 만나기 어렵다. 문제의식이나 통찰력,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기보다는 ‘백화점’식 나열과 엇비슷한 공약, ‘지당한 말씀’ 되풀이, ‘면피 수준’이 대부분이다.
그보다 더 큰 걱정거리는 상대방 깎아내리기와 상처 입히기, 유권자들의 무관심이다. 사람들이 붐비는 길목과 거리에선 후보자들이 얼굴과 이름 알리기로 북새통이다. 확성기 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하지만 동시에 여러 투표를 해야 하는 유권자들이 후보자를 제대로 알게 되기라도 할까. 이익집단 외에는 관심 밖이고, 표를 모으려는 후보자들의 목소리만 소음처럼 겉돌고 있는 감도 없지 않다.
지난 주말,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피습, 흉기로 큰 상처를 입힌 사건은 충격과 실망감을 넘어 절망감을 안겨줬다. 극단적인 증오의 정치문화가 빚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인신공격과 부풀려진 폭로전이 여전한 가운데 폭력까지 불사하는 선거문화는 ‘추악한 졸전’ 이상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미래지향적으로 꿈과 용기를 안겨주기보다는 ‘무조건 이기고 보자’는 갖가지 술수와 책략, 극단적인 깎아내리기와 폭력으로 얼룩져 천박하고 비열하다는 느낌마저 떨칠 수 없게 한다.
월드컵과의 함수관계 역시 우려되는 대목이다. 벌써 월드컵 열기가 후끈 달아올라 있지만, 상대적으로 지방선거 분위기는 후보들의 ‘일방적 소음’ 수준이라면 지나칠까. 올해부터 새내기 19세 유권자들이 주권을 행사하게 되나 이들을 포함한 20대들의 투표 참여율과 그 향방도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과연 이들이 얼마만큼 선거에 관심을 가지고 제대로 된 주권행사를 하게 될는지….
올해부터의 중선거구제에 따르는 우려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한 선거구에서 복수 당선자를 내고, 기초의원 선거에도 비례대표제가 도입돼 한 사람이 한꺼번에 무려 6표나 찍어야 한다. 이런 와중에 후보와 공약을 제대로 알 턱이 있을까. 또한 한 정당의 후보를 함께 밀어주려 해도 두 당선자를 나란히 내는 데 문제가 없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나눠먹기를 하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성숙하려면, 유권자들이 여론과 표로써 제대로 된 새 길을 틀 수 있어야 한다. 유권자들은 눈앞 집단이기주의를 벗으면서 거기에 영합해 표심을 잡으려는 입후보자들의 행태를 막아야 한다. 증오와 감정의 극단화로 폭력까지 서슴지 않는 구태는 국민을 지칠 대로 지치게 하며, 정치 혐오감과 외면을 부를 따름이다.
썩은 냄새가 여전한 ‘이전투구’식 선거운동의 소음과 그 거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흥분하지 않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성(理性)을 잃지 않고 선거에 참여해야 하며, 눈앞의 이기주의와 극한 대립을 넘어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고 만들어 나가려는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나라가 경제적․문화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역사가 말해준다. 오늘의 경제적 위기 상황은 근시안적이고 잿밥에 눈이 어두운 정치인들이 불렀다. 그러나 그것에 의한 고통과 극복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몫임도 깊이 새겨야 한다. 일찍이 링컨은 ‘선거를 공명하게 치를 수 있는 사람들은 반란도 역시 진압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논설주간>
 
 
 

 역주행, 지금이라도 멈춰야—매일신문 2006. 6. 6
 
 
요즘 우스갯소리는 예사롭지 않다. 세상이나 사람을 비트는 메시지가 날카롭다. 비판의 강도도 높다. 최고 권력자를 향한 농담도 적지 않으며, 그 속에는 어김없이 비수(匕首)가 들어 있다. 불만을 가지거나 성난 사람들에게는 그 농도만큼 입에 거품을 물게 하기도 한다. 연령과 신분을 뛰어넘는 주고받기도 ‘참을 수 없는,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의 귀’다. 하지만 그 뒷맛은 쓰게 마련이다.
최고 권력자에 대한 우스갯소리는 ‘소 한 마리 바치기’ ‘밥솥과 밥 짓기’ ‘자동차 운전’ 등에 빗댄 유머가 대표적인 경우다. 역대 대통령에게 소 한 마리를 바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하는 농담은 분명 야유다. 그 반응은 ‘새마을 현장으로 보내’ ‘모두 불러 잡아먹자’ ‘다른 사람 아나 모르나’ ‘차남에게 보내’ ‘한 마리 더 줘’ 등이다. 오래된 농담이어서 현직 대통령은 빠졌고, 초대 대통령도 제외돼 있다.
‘밥 짓기’에 얽힌 농담은 이렇다. 한 대통령이 큰 솥을 샀다. 그 다음 분은 쌀밥을 한 솥 가득 지었다. 그 뒤의 분은 배가 불렀다. 그 뒤를 이은 분은 밥을 거의 다 먹어 버렸다. 그 다음 분은 누룽지까지 긁다가 솥바닥이 뚫어졌다. 그 다음 분은 가까스로 전기밥솥을 마련했으나 그 뒤의 대통령은 386코드에 잘못 꽂아 탈이 났다는 게 그 골자다.
자동차 운전 버릇에 비유한 유머는 어떤가. 어느 분은 ‘난폭 운전’, 어느 분은 ‘취중 운전’이다. 또 어느 대통령은 ‘무면허 운전’이었으며, 지금은 ‘역주행 운전’이다. 좀 지나치다 싶지만, 많은 사람들이 쑥덕방아를 찧으며 공감대를 이루기도 하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에 이르러 미숙과 독선(獨善)의 정치로 그렇다는 대목에 당사자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아직도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 같지는 않다. 별로 새롭지도 않은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세상이 하도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어 해본 소리쯤으로 봐 주기 바란다.
5․31 지방선거 이후의 정치판은 어디로 가는지 모를 정도로 요동치고 있다. 달라지고 좋아질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를 하는 이상으로 우려되는 점들이 많아 걱정이다. 특히 엇박자를 보이는 정부․여당은 배를 어디로 몰고 가는지, 함께 타고 있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최고 권력자는 더욱 그렇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임을 알고 있기나 한지, 여전히 ‘역발상’ ‘역주행 운전’을 멈출 기미마저 보이지 않는다. 5․31 ‘참패’를 측근까지 ‘탄핵’이라는 극언을 했지만, 민심 이반(離反)엔 아랑곳없이 ‘회군(回軍)은 없다’는 식으로 나아가고 있어 실망과 분노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참여정부가 갈 길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 모두가 더 못살게 됐다고 아우성인 데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국민에게 왜 버림받았는지 뼈저리게 반성하고 책임지려는 ‘궤도 수정’만이 최선의 길이며, 경제 살리기가 발등의 불일 텐데, 그런 움직임은 안 보인다. 경기선행지수가 1년 8개월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경기실사지수도 줄줄이 떨어진다. 이런데도 세금이 다락같이 오르고, 변명에만 급급하다면 앞으로 1년 반 이상 나라 모습이 어떻게 될 것인지….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 하늘의 그물은 넓고도 커서 성글지만 하나도 잃지 않는다)’이라는 노자(老子)의 말이 새삼스럽다. 더구나 이 그물은 덫이 아니라 만물을 있게 하는 둥지다. 그러므로 사소해 보이는 것까지 지나치거나 팽개쳐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하늘을 거스르고, 그 마음을 거스르게 된다. 맹자(孟子)도 ‘인천지존작야 인지안택야(仁天之尊爵也 人之安宅也, 어짊은 하늘이 준 높은 벼슬이며 사람이 편히 사는 집)’라 하지 않았던가.
대통령이 이 진리마저 팽개치고, ‘하늘이 준 벼슬’과 ‘사람이 편히 사는 집’을 그르친다면 천심 같은 민심의 분노를 사고, 혼란과 갈등만 부르게 되지 않을까. 양극화 심화로 갈수록 어려워지는 서민 경제를 일으키고, ‘내 탓’을 들여다보며, 입으로만 외쳐 온 개혁을 치밀하게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이제라도 역주행을 멈추고 정상 주행으로 방향을 바꾸는 대통령을 볼 수는 없을까. 비하 일색의 농담을 넘어 더러는 칭송받는 풍경들을 보고 싶다. <논설주간>
 
 
 
 

 그래도 ‘내 탓’ 불감증인가—매일신문 2006. . 20
 
 
요즘 걸핏하면 ‘내 탓’보다는 ‘남의 탓’ 타령이다. 지체 높은 정치지도자일수록 더 그런 것 같다. 더구나 최고지도자가 백성들이 돌아섰는데도 자신을 겸허하게 들여다보기는커녕 되레 그런 사람들을 탓하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지난 5․31 지방선거 때 ‘자기 편’의 표가 거덜 나 버린 상황에서도 그런 현상은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궤변과 ‘남의 탓’을 서슴지 않는가 하면, 원망마저 자제하지 않았다. 같은 배를 탄 정치인들 역시 별반 다르지는 않으나, 다소 달라지는 조짐들을 보여 그나마 그 추이를 지켜보게 한다.
집권 여당 내부에서도 삐걱대는 소리가 난다. 대통령과 여당 새 의장 사이의 엇박자, 서로 ‘제 길 가기’도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같은 당의 초선의원들이 청와대와 주도세력을 향해 ‘친북․반미․언론법․사학법은 진보․개혁이 아니다’라는 등의 강도 높은 비판을 하면서 주문까지 쏟아냈을까.
대통령은 이번 선거 이후 ‘저항 없는 개혁은 없다’고 했다. 그 ‘심판’을 되레 깎아 내리면서 ‘위험하다’고도 했다. 백성들이 개혁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위험한 상태라는 논리였다. 민심은 말할 것도 없고, 김 의장마저 그저께 독선 가능성을 지적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도 최근 현 정부는 여러 문제를 과거 정권 탓으로 돌리려 할 뿐 별로 한 일이 없다는 쓴소리를 했다.
이런 우려의 와중에 여당의 새 의장과 초선의원들이 대통령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데 일말의 희망을 가져도 좋을는지, 아직은 잘 모를 일이다. 내일로 예정됐던 대통령 국회 연설이 돌연 취소되고, 대통령이 밀고 나가려는 부동산․교육 개혁에 변수가 생길 가능성을 보이는 건 그 조짐의 일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 앞에 진정으로 겸허해지는 대통령의 모습은 여전히 안 보여 안타깝다.
조선조 때도 국가 통치 이념에 차질과 의심이 생기면 직간(直諫)이 들어갔다. 임금은 그런 소리에 귀를 막거나 거스르려 하지는 않고 감싸 안곤 했다. 오늘날로 치면 ‘민주 정치’ ‘옳은 정치’로 돌아가자는 백성의 소리 같은 데 큰 무리가 없는 한, 당시에도 그대로 먹혀들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임금에게는 옳은 정치를 펼치려는 정치인들이 힘을 실어주고 보탰으며, 적극 받들었다.
현군에다 선비다웠던 세종은 7년 가뭄 때 백성과 함께 고생하기 위해 주로 경회루 앞 초가삼간에서 지낸 바 있다. 세금을 결정할 때는 세 번 정도나 전국적인 여론 조사를 했고, 찬성하는 고을부터 세금을 거둘 정도로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였다.
미국 대통령 링컨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한 표를 얻기 위해 짐을 날라주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서슴없이 땀 흘리며 짐을 날라다 주었다. 링컨의 이 같은 자세 낮추기는 백성들을 상전으로 여겼던 탓이었을 게다. 한 표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안다는 건 그만큼 국민의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분이 극과 극인 케네디 대통령도 그를 닮으려 했는지 모른다.
조선조의 임금은 차치하더라도, 재상의 능력을 재는 데도 세 가지 잣대가 있었다. 가장 큰 잣대는 ‘아량’이었다. 둘째가 ‘바른 소리’, 그 다음은 ‘청렴’이었다. 임금은 이런 덕목들을 갖춘 재상들 덕분에 그 시대의 현군(賢君)으로 칭송될 수 있었으며, 여러 일화에도 그런 사실들이 잘 나타나 있다.
세종 때의 황희는 도량이 넓었으며, 노비 아이들까지 친자식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심지어 여자 종이 빈정대도 껄껄 웃어넘길 정도였던 모양이다. 재상 허주도 늘 임금에게 극간해 정도를 밟게 했다. 청백리로 흠모를 받던 유관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세종이 빈소에서 체통도 잊은 채 엉엉 울었다고 한다.
오늘의 정치판을 보면, 독단이나 독선과는 담을 쌓은 채 백성의 소리에 귀를 열고 그들을 감싸 안았던 옛날의 훌륭한 정치지도자들이 아량이 그립다.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는 초선의원들의 주장과 비판만 제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달라지게 되지 않을까. <논설주간>
 
 
 
 
 
 연령별 호칭 되짚어보기—매일신문 2006. 7. 4
 
 
어느 날, 한 지기들의 모임에서 연령별 호칭 문제를 놓고 이야기가 오갔다. 잘 아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대부분이 대여섯 가지 정도의 호칭을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마흔은 불혹(不惑), 쉰은 지천명(知天命) 또는 지명(知命), 예순은 이순(耳順), 예순하나는 환갑(還甲)이나 회갑(回甲), 일흔은 고희(古稀) 또는 종심(從心) 정도가 그것이었다. 마흔은 사물의 이치를 알고 흔들리지 않는 나이, 쉰은 천명을 아는 나이, 예순은 인생의 경륜이 쌓이고 사려와 판단이 성숙해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이는 나이, 예순은 한 갑자를 돌아온 나이, 일흔은 뜻대로 행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나이라는 뜻이다.
지금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데 뜬금없이 ‘케케 낡은 이야기냐’는 핀잔을 듣게 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연령별 호칭이 시사하는 바, 그 뜻들은 오늘에 비춰 봐도 결코 예사롭지 않을 듯하다. 한여름의 한담 삼아 떠올려본다.
그날 그 자리에 모인 지기들 대부분은 앞에서 언급한 수준이었으나, 이 사실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지 않을까. 우리는 확실한 걸 알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게 됐으며, 어렴풋이 알거나 잘 모르던 부분들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열다섯은 지학(志學-학문에 뜻을 둠), 남자에 한해 스물은 약관(弱冠)이다. 서른은 모든 기초를 세우는 나이라고 이립(而立), 마흔여덟은 십(十)이 네 개와 팔(八)이 하나인 글자(桑)로 풀어서 상수(桑壽)다. 일흔일곱은 희(喜)에 칠(七)이 세 번 겹쳤다고 희수(喜壽), 여든은 산(傘)에 팔(八)과 십(十)이 들어 있어 산수(傘壽), 여든여덟은 쌀농사가 여든여덟 번의 과정을 거쳐 쌀이 된다는 데 근거해 미수(米壽)라 한다.
옛날엔 장수하는 경우가 드물었겠지만 아흔이 되면 졸수(卒壽), 거기 한 살이 더해지면 백수를 바라본다는 뜻에서 망백(望百)이다. 아흔아홉은 일백 백(百)에서 한 일(一)을 빼면 흰 백(白)이므로 백수(白壽)이며, 백 살이 되면 최상의 수명을 누렸다는 의미로 상수(上壽)라 했다.
따지고 보면 구구절절 맞는 말이요, 예지 넘치는 의미 부여다. 더구나 이런 말들이 만들어진 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잇값은 여전히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화두로 넉넉하게 값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각박하고 삭막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한다면 ‘어느 때든 안 그런 적이 있었느냐’는 반문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의 세태가 ‘황량해지기 악화 일로’에 있는 것만은 틀림없지 않은가.
일찍 백수(白手)가 된 한 오십대 지기의 한탄처럼, 오십대 이상의 기성세대는 천명을 알고 있더라도 제대로 설 수 있는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형편이다. 인생의 경륜이 쌓이고 사려와 판단이 성숙해졌을 때는 이미 ‘버스가 지나간 뒤’이기 일쑤인 세상이다. 사람의 수명은 점차 길어지는데 ‘폐기 처분’은 빨라져서 나오는 한탄임은 물론이다.
더욱 서글픈 건 ‘한 갑자’를 돌아온 회갑 때 자축은커녕 숨기려 하는 등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으면서도, 그 뒤 해가 갈수록 추억이나 반추하면서 살아가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뜻대로 행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일흔에 이르러서는 시간을 죽이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늘어나고 있는지, 한숨소리가 아프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약관․이립․불혹 또는 그 나이를 넘긴 세대들 역시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등의 신조어들이 사라지지 않듯이, 형편이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 우리 사회는 ‘앞뒤곱사등이’가 돼 버렸다고나 할까. 왜 이리 됐는지 모두 자성해야겠지만, 화살을 잦게 맞는 정치․사회 지도자들부터 뼈를 깎는 각성과 함께 분위기 바꾸기에 나서야 할 것이다.
날씨가 무더워 한담을 한다는 게 무거운 이야기가 돼 버렸다. 우리 모두 연령별 호칭이 뜻하는 자리에서 화해로, 젊은이와 늙은이가 두루 더불어, 그 호칭의 의미를 증폭시키며 살아갈 수 있는 날이 하도 간절해서 해본 넋두리로 봐주기 바란다. <논설주간>
 
 
 
 
 
 권력․금력에 법이 울고 있다—매일신문 2006. 7. 18
 
 
유일한 생존 제헌국회의원인 김인식(93) 옹이 제헌절(制憲節)을 앞둔 그저께 한 일간지 인터뷰를 통해 후배 정치인들을 나무랐다. “제헌의원들은 설렁탕만 먹어 가며 법안을 놓고 열심히 토론했는데 요즘 의원들은 멋만 내려 한다”면서, 대부분이 국정(國政)을 위하기보다 자기 당(黨)만 위한다는 골자의 ‘쓴소리’를 했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패거리 문화’로만 치달아온 게 정치권과 고위 지도층의 숨길 수 없는 현주소다. 더구나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과거사 청산 작업과 과거사법,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등에 관련한 김 옹의 부정적 견해와 개헌(改憲)에 관한 언급들은 깊이 새겨야 할 대목들이 아닐 수 없다.
김 옹의 지적대로 ‘역대 정권이 자기들 입맛대로 헌법을 아홉 번이나 뜯어고치면서 누더기를 만들었’으며, 지금도 같은 논의가 종전과 별 다를 바 없이 대두되고 있는 형국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법이 울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일는지 모른다.
그런가 하면, 제헌절을 앞두고 불거지기 시작한 법조계와 경찰의 가공할 만한 비리(非理)는 실망감을 넘어 절망감을 안겨준다. 높낮이 없이 온통 구석구석 풍기는 ‘썩은 돈 냄새’는 물론, 브로커들이 판치고 날개를 달 수 있는 풍토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 극명하게 말해준다.
정치권은 권력만 잡으면 입맛대로 법을 주무르려 하고, ‘법과 양심’의 보루여야 할 법조계와 경찰이 이를 저버리고 그릇된 판단을 일삼는다면 선량한 서민들은 참담해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행태는 독선(獨善)이요, 스스로 설자리를 허무는 작태가 아니고 뭔가. 이런 풍토에서는 국가와 사회가 질서를 잃게 되고, 골 깊은 불신감만 증폭되지 않고 배길 도리가 없는 노릇이다.
법이 ‘가진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까지 악용되며, 권력과 돈의 힘 앞에 굴절되고 왜곡된다면 ‘못 가진 사람’들만 ‘봉’이 될 것도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 때문에 ‘법이 울고 있다’는 말이 화자(膾炙)되겠지만, 법은 스스로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회한과 탄식의 울음을 안 터뜨리고, 모멸감을 벗어나 제자리에 있을 재간이 있겠는가.
옛날, 대화를 즐기고 중시했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와 논쟁을 벌이면서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트라시마코스는 서슴지 않고 “법은 강자의 이익이다. 법은 또한 거미줄과도 같다. 작은 곤충들은 거미줄에 걸려들지만 큰 짐승들에게 거미줄은 무의미한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런 것 같다. 더욱이 오늘의 우리 사회에선 법이 권력 있고, 돈 있으며, ‘빽’ 있는 소수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있는 것 같은 착각하게 만든다. 아니, 착각이라기보다 ‘법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에 선뜻 동의할 사람이 과연 어느 정도나 될 것인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권력형 비리를 저지르고도 얼마 안 가 버젓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을 다사(茶飯事)로 보고 느끼는 판국에 못 가진 사람들에게 준법정신을 가지라는 건 마치 ‘산에 가서 고기를 구하라’는 격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무리 생각해봐도 요즘 법들은 약한 사람만 걸려들도록 만들어놓은 ‘덫’이 돼 가고 있는 느낌이다.
법을 어겼을 경우 그 집행이 ‘눈 가리고 아옹’이나 ‘깜짝쇼’의 양태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 권력과 금력을 움켜쥔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갖가지 법(특히 헌법)을 ‘누더기’로 만들려 해서는 더더욱 안 될 일이다.
법을 아전인수(我田引水)로 고치려하기보다는 제대로 받들고, 그 적용도 엄격하고 공정하게 한다면 사정은 크게 달라질 수도 있을 게다. 그런 사회 분위기가 고조될 때, 준법정신은 자연히 고양되고, 꼬이던 일들도 순리로 돌아서게 되지 않겠는가.
‘권력과 돈’이라는 세속적 욕망을 초월해 군자(君子)의 덕목인 귀욕(貴慾)을 좇으며, 公心(공심)을 갖고, 청빈(淸貧)의 의미를 보듬어 안는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갔을까. 그런 인사들로 정치권이 물갈이되고, 지도층 인사들 역시 그 길을 가는 모습은 요원하기만 할는지…. <논설주간>
 
 
 
 
 
 ‘따뜻한 카리스마’는 요원한가—매일신문 2006. 8. 1
 
 
우리의 문화는 원래 감성(感性)이 이성(理性)보다 앞서는 ‘따뜻한 문화’다. 냉정하고 개인주의에 기울어진 서구의 문화와는 그 뿌리부터가 다르다. 어찌 보면 좀 허황하고 인정에 끌려 있는 듯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면이 부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따뜻함이 오히려 공동체 문화를 남다르게 키워주는 힘이 되기도 했다.
주위를 돌아보면 세상은 많이 달라졌으며, 달라지고 있다. 서구 문화의 세례를 강하게 받으면서 전통적인 미덕들이 흐려지고, 이 때문에 갈등만 커지는 형국이다. 따뜻함을 밀어낸 자리에 싸늘함이 들어앉고, 인정으로 얽혀 있던 조직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利己主義)가 몸집을 키우고 있는 모습이다.
따뜻함이 중심에 놓인 조직이나 사회는 서로 믿고 도우려는 화해(和解와 친화력이 두드러진다. 평화가 그 안팎을 이루고 감싸기도 한다. 이런 공동체 안에서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힘’이라 할 수 있는 ‘따뜻한 카리스마’가 제 힘을 내고, 아래위 할 것 없이 그런 카리스마를 주고받으면서 따뜻한 울타리가 만들어진다.
‘제3의 물결’의 저자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한국은 한 세대 만에 제1, 2, 3의 물결을 다 이룬 나라”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과 우리 문화에서 받은 인상이 강렬하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모습도, 문화의 특장(特長)들도 날로 이지러지고 허물어지는 양상은 실로 안타깝다.
일단 진화는 됐지만, 얼마 전의 포스코 사태와 현대차 파업이 안겨준 실망감은 너무 컸다. 남에 대한 배려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생각은 뒷전인 채 ‘나’와 ‘우리’만 내세우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는 얼마나 큰 손실과 상처를 안겨줬던가. 우리의 ‘따듯한 문화’도, ‘따뜻한 카리스마’도 온데간데없어져 버린 듯했다.
포스코 사태를 보면서는 이 나라가 정녕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더라도 제어장치마저 마비돼 버렸는지, 암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회가 이같이 ‘너 죽고 나 살자’로 간다면 앞이 보일 리 없다. 특히 연례행사처럼 치러지는 현대차의 파업은 이번에도 역시 ‘놀고, 돈을 더 받게 되는’ 한바탕 ‘놀음판’을 방불케 하지 않았던가. 이제라도 반드시 勞(노)가 바뀌어야 하고, 使(사)도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더욱 절실한 문제는 도덕성 회복을 축으로 ‘윗물’부터 맑아져야 하며, 왜곡된 가치관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약육강식의 저급한 논리에 휘말려 모든 인간관계를 투쟁관계로 인식하는가 하면, 세상은 제자리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렸다.
조선조의 절정기였던 정조(正祖) 시대의 태평성대) ‘군민동락(君民同樂)’과 ‘대동사회(大同社會)’가 키워드였다. 그 전통은 연면히 이어져 오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명분은 핑계로, 의리는 깡패사회의 용어로, 선비의 기개인 사기(士氣)는 군대용어로 전락할 정도로 그 뿌리가 흔들려 왔다. 그러나 그런 전통이 국민 정서에서 완전히 밀려나지는 않았다고 봐야 한다. 오늘의 정치판에 좌절감과 허무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그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의 우리 정치권을 보라. 비일비재(非一非再)인 구체적 사례들을 들지 않더라도, ‘이전투구(泥田鬪狗)’라는 말마저 무색해진다. 철저하게 ‘내 편, 네 편’이며, ‘내 편이 아니면 적다. 특히 힘을 받고 있는 편이나 그 편의 고위층들은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있지 않은가. 오만과 편견과 ‘막무가내 제 길 가기’로 비판이나 쓴소리, 민심(民心)까지도 ‘쇠귀에 경 읽기’가 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복고적인 발상일는지 모르겠으나, 선조들의 ‘덕화(德化)’의 통치술이 그립다. 통치자와 집권층이 휴머니즘 정신으로 백성과 친화적 관계를 강화하면서 사랑과 베풂, 절제의 모범을 보일 수는 없을까. 엄정한 법질서와 그 집행의 자세도 확고히 하고, 보통사람들이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따뜻한 문화’ ‘따뜻한 카리스마’를 회복하는 ‘방향 전환’은 정녕 불가능하기만 한 일일까. <논설주간>
 
 
 
 
 기리고 기다려지는 ‘또 다른 광복’—매일신문 2006. 8. 15

 
큰비, 큰가뭄, 찜통더위 등의 기상 이변(異變)이 빈발하는 이 지구촌도, 우리나라도 재앙(災殃) 앞에 노출돼 있다.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올 들어서도 그 참상은 가히 가공할 만했다. 이 같은 인류 생존의 큰 위협 요인들은 사상 유례없는 이변들을 빚는가 하면, 여전히 공포의 대상으로 우리를 옥죄고 있는 형편이다.
재앙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과연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가’라는 자탄에 빠지곤 했다. 더구나 인간이 바로 그 주범이라는 ‘지구 溫暖化(온난화) 현상’ 앞에서는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한 연구에 따르면, 기상재해로 인한 경제적 피해만도 연간 7천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요즘은 온 나라가 전시작전통제권(戰時作戰統制權) 환수 문제를 싸고 더 이상 시끄러울 수 없을 지경이다. 많은 논의가 있었고, 지금도 한창 논란 중이므로 새삼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스스로 큰 재앙을 부르는’ 것 같아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다는 점은 말하지 않고 넘길 수 없게 한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정부의 희망사항대로 간다면 향후 5년간 151조 원, 자주국방 성취까지는 621조 원이나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뜩이나 民生(민생) 문제로 지칠 대로 지친 우리가 그 돈을 떠올리면 ‘미증유의 재앙’에 진배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있겠는가. 안보(安保) 불안을 넘어 나라의 장래에 대한 위협에서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는 노릇이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최근 북한의 고위층 부패와 위조지폐 제조 등을 겨냥해 ‘도둑체제(kleptocracy)'라는 용어를 동원해 강도 높게 비난하면서 그와의 싸움을 선언했었다. 이 같은 인식의 바탕에는 그 돈들이 테러 자금과 대량 살상무기 개발 자금 조성의 흐름을 돕는 결과를 부른다는 논리가 깔려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향토 출신 젊은 작가 김영하의 신작 소설 ‘빛의 제국’이 강한 조명을 받고 있다. 남파(南派)된 지 20년이 넘은 간첩과 그의 가족들의 긴박한 하루를 그린 작품이다. 자본주의의 소시민으로 바꿔져 버릴 만큼 ‘잊힌 스파이’에게 돌연 귀환 명령이 떨어져 ‘선택의 미로’를 헤매는 기괴한 세상 속의 비루한 인생을 다뤘다.
어쨌든 이 소설은 이제 입에 오르내린 지조차 오랜 ‘간첩’이라는 낱말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돼 버린 현실을 아프도록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한 리뷰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그(소설 ’빛의 제국‘ 주인공)는 운명을 잊고 있었지만 운명은 그를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는 일깨움은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우리는 뜨겁게 달아올랐다가도 쉬이 식어 버린다. 그래서 누군가가 우리 민족성을 ‘은근과 끈기’라고 규정했던 걸 ‘무효’라고 했다. ‘냄비 근성’이라고 비하되는 사례도 보아 왔다. ‘생각한 대로 살려고’ 하기보다는 ‘사는 대로 생각하는’ 데 너무나 쉽게 길들여져 버렸다면 지나친 말일까. 요즘 세상 돌아가는 형국을 보면 좌우익으로 갈라져 아비규환(阿鼻叫喚)을 방불케 했던 ‘해방 공간’이 옛일 같잖다. 어쩌면 그보다 더 두렵다는 느낌까지 안 지워진다.
“국가의 진로에 때로는 그늘이 지고 역풍이 몰아치는 수도 있는데 이런 때일수록 더욱 원칙을 굳게 지켜 민주주의와 헌법을 수호하는 데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며칠 전 법복(法服)을 벗은 권성 헌법재판관이 퇴임 때 한 말이다. 판결 때마다 원칙을 꼿꼿하게 지키는 ‘소수 의견’으로 주목받던 그가 헌재(憲裁)의 역할에 대해 피력한 소신이나, 지금 상황의 우리 모두를 향한 경고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음력 칠월이 두 번인 올해의 무더위는 유난스럽다. 잠을 천장에 매다는 듯한 열대야(熱帶夜)도 그렇다. 나라 돌아가는 모습은 그보다도 훨씬 더한 ‘찜통’ 같다. 광복절을 맞으며 ‘빛의 제국’ 주인공이 받은 메시지와는 사뭇 다르게 희망을 안겨주는 ‘또 다른 광복(光復)’의 메시지들을 간절히 기리고 기다려보게 된다. <논설주간>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나라는—매일신문 2006. 8. 29
 
 
우리는 누군가와 만나면서 살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가정과 일터, 사회와 나라, 나아가서는 이 지구촌도 규모가 다른 공동체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 울타리는 ‘나’만 생각할 때 문제가 생긴다. 예측할 수 없는 불협화음들이 빚어지고, 불상사가 터지게 된다.
특히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져 자기 이익만 챙기면 ‘나’와 ‘너’ 사이를 비인간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대화의 징검다리를 허물 뿐 아니라 서로 헐뜯고 모략하는 ‘무서운 적의(敵意)’를 자초하게 마련이다. 가정에서의 천륜(天倫) 배반, 일터의 불신과 적대행위가 그것이며, 단위가 커질수록 엄청난 비극이 야기될 수도 있다.
‘개미구멍 하나가 못둑 무너뜨린다’는 말이 이르듯이, 이해와 화해 없이 상대를 비판과 비난만 한다면 부정․혐오․증오 등을 증폭시키고, 큰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일찍이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생기게 된 건지도 모른다.
우리 선조들은 이 말이 일컫고 있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 만나면서는 상대의 처지와 형편을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미덕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그럴 때 세상은 대체로 태평성대를 누렸다. 하지만 이 같은 ‘자기 이해’와 ‘타자 이해’의 자세는 갈수록 허물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요즘 나라 사정을 바라보면, ‘더불어 살기의 포기’로 가는 느낌이다. 가장 큰 힘과 영향력을 가진 정부는 그야말로 ‘나쁜 데로 가기’ 작정이라도 한 건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어쩌면 ‘산 넘어 산’이요,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마저 부족할 정도다.
온 나라를 ‘바다이야기’에 빠뜨린 듯한 ‘도박 광풍(狂風)’, 불안과 위기감을 증폭시키는 전시작통권 단독행사(환수) 논란을 비롯한 安保(안보) 문제, ‘코드․낙하산․회전문’으로 불리는 人事(인사)의 연속, 여전히 뒷전으로 밀리는 민생(民生) 문제…. 헤아리기조차 민망스러운 삐걱거림의 끝이 보이기는커녕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국이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정부는 ‘나’만 생각하고 ‘끼리끼리’만 내세우고 있어 질식해 버릴 지경이다.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통보한 대로 전시작통권이 2009년 우리 군에 이양된다면 과연 얻는 게 무엇일까. 동맹을 잃고 기하학적 돈 부담과 국민 불안만 가중되지 않을는지….
자기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남을 이해할 수 없게 돼 있는 게 세상 이치다. 스스로를 준엄하고 냉엄하리만큼 분석하고 비판해 봐야 남들이 드러내는 약점이나 실수도 끌어안을 수 있다. 지금 정부는 그런 관용(寬容)은 물론 민심마저 아랑곳없는 듯하다. 심지어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여당의 소리까지 안 들으려 하는 ‘오기(傲氣)’로 가는지, 이 나라가 어디로 가도 좋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오늘날과 같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관용을 실천으로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정권을 놓고 ‘살기 아니면 죽기’로 여기고 살려고만 한다면 생각해볼 대목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경쟁사회이니까 인정과 이해가 더욱 요구되고, 그것이 잘 구현돼야 번창할 수 있다는 논리 역시 가능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죽기로 힘쓰면 살 수 있다’는, 바로 그 역설적인 미덕이 되레 우리가 사는 길이 되도록 지혜를 모으는 방법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충성심이 무엇보다 중요한 전통적 미덕이었다. 외국 사람들은 이런 마음가짐 때문에 우리나라가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다고 보기도 했다. 따져보면 이런 마음이 허물어져 나라가 더욱 어지러워진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높은 어른에 대한 성실한 순종과 봉사 정신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며, 위와 아래의 상호 이해가 전제되지 않을 경우 불가능해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꼬인 매듭들을 풀어 나가야만 한다.
‘늦다고 생각될 때가 빠르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더불어 더 잘살려면 ‘역지사지’의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더구나 나라가 어지럽고 심하게 꼬여 있어 그 매듭을 만든 쪽부터 풀어 나가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자세가 보태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우랴. 이런 쓴소리로 또 원망만 사게 될까 두렵고 걱정스럽다. <논설주간>
 
 
 
 
 올바른 비판이 나라를 살린다—매일신문 2006. 9. 12
 
 
나라가 불안하고 시끄럽다. 바람 잘 날이 없다. 갈수록 태산이다. 비판이 들끓고, 비판에 대한 비판이나 해명 역시 그렇다. 게다가 공론(公論)과 뒷공론들이 뒤섞이는가 하면, 혼선을 빚어 더욱 그렇다. 대다수 국민, 특히 각계 전문가들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앞만 보고 가거나 안하무인(眼下無人)식 행보를 거듭하는 정치지도자와 정치권의 비판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좀체 제동이 걸리지 않는 형국이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은 핀란드에서의 한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인한 무력적 위협 논란 문제를 두고 또 언론을 탓했다. 북한 미사일 문제를 언론이 더 어렵게 만든다고 비난했다. 언론에 대한 불만 터뜨리기나 탓하기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안 그럴 때가 거의 없었으나, 너무 심했다.
더구나 이 자리에서 할로넨 핀란드 대통령은 그 나라가 ‘세계 1위의 부패 없는 정부로 평가받는 비결’이 ‘언론의 활발한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에 노 대통령은 부끄러워했어야 했다. ‘언론의 자유가 늘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지만 꼭 필요한 것으로 우리를 건강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는 그의 말을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비판의식에는 잣대가 문제다. 시비(是非)를 가리는 게 기준이 돼야 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는 ‘바른 마음’이 따라야 한다. ‘사특한 마음’이 작용해선 안 된다. 그 마음은 공심(公心)이어야지, 사심(私心)이어선 곤란하다. 사심이 앞서면 비판이 비난이나 흉보기요, 아전인수(我田引水)일 따름이다.
강한 사람을 누르고 약한 사람을 도와주느냐, 그 반대이냐는 더 큰 문제다. 지금 세상엔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하게 처신하는 보신법(保身法)이 횡행한다. 그런데도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도 적잖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 대해서도 정치지도자는 책임을 통감하고 모범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헌재(憲裁 소장 후보자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소용돌이만 하더라도 가관이다. 염치가 있다면 당사자가 스스로 물러나든지, 대통령이 지명 철회를 하는 게 옳지 않을는지…. 헌재의 위상을 위해서도, 사법권의 권위를 위해서도 그렇다.
작통원(作統權) 환수 문제에 대한 비판은 또 어떠한가. 대다수 국민은 물론 전직 장관이나 장성들을 비롯해 전문가들이라면 반대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젠 사상 처음으로 전직 외교관들까지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도 이런 경고들이 겉돌고 있으며, 제대로 된 비판이 오히려 무색해지는 느낌이다.
조선시대에는 여론의 진원지가 사림(士林)이었다. 사림사회의 비판은 공개적인 여론화 과정을 거쳐 공론화하는 수순을 밟았다. 백성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는 뒷공론(쑥덕공론)이 재야 지식인들에게 전달되고, 그 여론은 중앙에 전해지곤 했다. 더 적극적으로는 서원이나 성균관이 매개체 역할을 했다. ‘上疏(상소)’라는 제도적 장치를 이용해 직소하는 언로(言路)도 트여 있었다. 말하자면, 여론이 최고 통치권자에게 들어가는 길이 열려 있었다. 그래서 언로가 제 기능을 했고, 여론이 효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한심하다. 언론은 ‘열린 사회’의 소통을 지향하려 애쓰지만, 잘 먹혀드는 것 같지 않다. ‘배 째라’는 식으로 여론을 무시하고, 되레 뒤집어 비난한다면 비극이다. 우리 사회가 온통 막무가내로 개인이나 집단 이기주의로 치달아, 이익만이 비판의식의 잣대가 돼서야 되겠는가. 이런 병이 최고위층부터 중증이라면 절망할 수밖에 없다.
비판 풍토가 제대로 조성되고 먹혀들 때 나라도 백성도 잘살 수 있다. 언론이 비판을 멈추고 가진 사람들의 나팔수나 된다면 이 나라는 과연 어떻게 돼 버릴까. 전문지식을 갖춘 지식인들도 그런 일을 회피한다면 직무 유기요, 자기기만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강도 높은 비판이라도 먹혀들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더구나 비판을 받는 쪽에서 오히려 탓하기만 한다면 희망이 없다. 이제부터라도 달라지는 최고 정치지도자와 추종 세력들을 보고 싶다. 나라를 자주 시끄럽고 불안하게 만들지 않고, 진정 장래를 위해 마음과 귀를 열어 백성을 받드는 세상은 멀기만 할 것인가. <논설주간>
 
 
 
 
시장만능주의, 능사는 아니다—매일신문 2006. 9. 26
 
 
인문학(人文學)이 죽어간다는 자성(自省)과 비판의 소리가 확산되고 있다. 얼마 전,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의 ‘인문학 선언’에 이어 전국 대학 교수들의 연대 서명 바람이 일면서 그 불길이 번지고 있는 모습이다. 오늘은 80여 개 인문대 학장들이 인문학 지원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한국학술진흥재단도 올해를 ‘인문학 부흥의 해’로 정하고, 국가 발전 전략과 연계시키려는 실천 방안들을 내놓았다. 학계와 관련 기관들이 손을 잡고 이번 주를 ‘인문 주간’으로 정했으며, ‘열림과 소통의 인문학’이라는 기치를 내걸기도 했다. 절박한 몸부림으로 보이듯이, 늦은 감이 있으나 국가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늦출 일이 아니다.
그간 대학사회에서조차 인문학의 위기는 피하기 어려운 현실로 여겨졌다. 위기의식마저 무감각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기가 없거나 취업이 잘 안 되는 인문학 분야는 전공자가 계속 줄고, 통폐합․폐지 등 구조조정의 우선 대상 신세가 됐다.
더욱 답답한 건 이 같은 위기에도 그 관리와 극복을 위한 움직임이 거의 가시화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학문의 기초가 무너지고 있다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학과가 없어지거나 다른 학과에 흡수돼 설자리를 잃은 교수들은 허겁지겁 전공을 바꾸는 등 변신(變身)을 시도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교육인적자원부도 2003년 대학 정원 자율화 이후 대학별 정원만 관리하고, 학과별 통계에는 신경을 끄고 있는 판국이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역시 바라보고만 있는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인문학계는 달랐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고 해법을 찾으려는 적극성을 보이지 못했다.
그렇다면 인문학계의 내부적 위기 요인은 무엇인가. 학문적 업적을 공유하려는 열린 자세와 시대적 변화에 둔감한 눈높이, 협소한 전공지식의 반복 전수 등이 위기를 자초하지 않았는지…. 사실 학계에서도 그런 자성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의 위기는 학문 내부적 요인보다는 외부적인 데 더 큰 영향을 받아 왔다고 봐야 한다. 대학의 특성화나 차별화와는 담을 쌓은 채 ‘너도 나도’식으로 인문 분야의 학부나 학과들이 만들어졌으며, 안일한 운영을 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시장만능주의’가 학문의 전당에도 그대로 적용되면서는 경제적 부가가치 생산에 이익이 되는 분야만 중시되고, 학생들이 모여드는 풍토가 돼 버렸다. 그 결과 대학이 ‘시장판’에 다를 바 없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연구 결과(성과)보다는 그 계획에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정부 정책이 인문학의 깊이 있는 성찰에 저해 요인으로 작용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학자들이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한 연구 계획서를 쓰느라 사회와의 소통을 통한 연구를 소홀히 하면서, 스스로 낡고 고고한 성에 갇혀 있었다고나 할까.
요즘 대학에서는 문․사․철(文․史․哲-문학․사학․철학)은 물론 글쓰기 교육이 도외시돼 지식과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자탄이 쏟아진다. 지난날 학자들뿐 아니라 지성인․지식인이라면 인문학적인 바탕 위에서 생각이나 뜻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게 거의 필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과연 어떤가.
대학 교육이 그런 원래의 빛깔을 잃어 간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다. 논리적인 사고나 글쓰기는 인문학적 상상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 같은 바탕이 돼야 응용학문․실용학문도 빛이 나게 마련이다. 달리 말하면, 교양과 문학의 위기, 대학과 고급문화의 위기는 인문학의 쇠퇴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가벼움과 황금만능주의로 흐르는 현상도, 극심한 가치)의 혼란과 윤리․도덕의 붕괴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산업화․정보화 사회의 급속한 진전은 뿌리가 튼튼한 지식보다는 바로 쓸 수 있는 정보만 부추기고, 좇았다.
‘깊은 사고(思考)’를 밀어내고 ‘쉽게 얕게’ 모든 사안을 재단하는 풍조는 경계돼야 한다. 이런 ‘가벼움과 쉬움’ 추구가 사회를 병들게 하고 흔들었으며, 위기에 빠뜨리고 있지 않은가. 인문학이 다시 일어설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긴 말을 필요로 하지 않으리라고 본다. <논설주간>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매일신문 2006. 10. 10

 
북한은 어제 ‘설마’를 ‘경악’으로 만들고 말았다. 국제사회의 거듭된 핵실험 반대 경고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안보(安保)를 뿌리째 뒤흔들면서 ‘핵 폭풍’을 일으켜버렸다. 우리는 이제 6․25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안보 위기에 놓이고, 한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안개 속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전쟁의 공포를 안겨주기도 하는 이 벼랑 끝의 사태는 오만과 독선으로 치닫는 북한이 저질렀지만, 그들의 눈치나 보면서 무턱대고 ‘퍼주기’를 해 왔던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과 안이한 안보의식이 부른 재앙이 아닐 수 없다. 그 답례가 핵실험이란 말인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이은 노무현 대통령의 ‘포용정책’과 외교․안보 라인은 그간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을 해 왔으며, 얼마나 엉뚱한 생각을 해 왔는지 자명해지기도 했다. ‘知彼知己(지피지기)의 슬기’는 온데간데없이 ‘친북 주(親北 自主) 타령’을 하는 사이 북한은 ‘핵 폭풍’을 만들어 왔다면 ‘전면 실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정부는 북한의 ‘물불’을 가리지 않았는지, 눈을 가리고 있었는지 잘은 알 수 없으나 낡은 理念(이념)을 좇으며 허우적거리는 동안 북한은 다른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우리를 비웃어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가 그들의 핵무장을 허용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제 한반도의 비핵화(非核化)는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남북의 평화공존(平和共存)이라는 말조차 허공에 뜰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남과 북이 ‘비핵’과 ‘핵’으로 나뉜 비극적 상황에 놓인 채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 나아가 세계를 소름끼치는 핵 공포의 판국에 몰아넣는 만행이 아닐 수 없다.
어제 북한의 ‘지하 핵실험을 안전하고 성공적으로 진행했다’는 발표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바로 사람 잡는 꼴이어서 국민은 경악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놀라움과 두려움을 넘어 치미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터지는 게 아니냐’ ‘이제 어떻게 되느냐’는 우려와 불안에 휩싸이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핵무기의 사용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것의 보유 자체만으로도 불안과 공포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는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의 가공할만한 위력과 재앙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그 후유증이 어떠했는가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번 핵실험 강행으로 북한은 세계 평화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국제사회의 핵 확산 방지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을 뿐 아니라 유엔에 정면도전한 행위여서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미증유의 불장난을 통해 얻을 건 파멸뿐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알게 해야 한다.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에 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지만, 그들은 정녕 ‘다른 세상’에 살고 싶은 걸까. 물귀신처럼 우리는 물론 세계를 물고 늘어져 엄청난 재앙을 부르게 될까도 두렵다.
북한은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또 더한 만행을 어떻게 일으킬지 알 수가 없다. 추가 핵실험에 나설 개연성이 없지 않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나오는 정황이다. 미국과 일본은 벌써 전면적인 경제 제재에다 그간 유보했던 유엔 헌장 제7장에 근거한 ‘군사적 조치’까지 검토하는 상황이다. 여태 만류만 했던 중국과 러시아도 어떤 모습으로든 대북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며, 그런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기도 하다.
이제 대북정책의 전면 재검토는 불가피해졌다. 늦었더라도 안보정책을 근본적으로 재정비하고, 일방적인 포용정책은 단호하게 버려야 한다. 정부의 뼈저린 반성과 궤도 수정 못잖게 국민도 눈을 바로 뜨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젠 대통령부터 자세를 확 바꿔 명백한 현실로 드러난 북핵(北核)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결연한 각오와 단호한 대처뿐이다. <논설주간>
 
 
 
 
 
 ‘낳고 기른 보답이 외로움․서러움’—매일신문 2006. 10. 24
 
 
옛날 마을 공동체엔 ‘동네 어른’의 말과 지혜, 불호령이 권위의 상징이었다. 질서와 규범, 올바른 정신의 구현은 그런 어른들이 주도했다. 어떤 갈등이나 시비(是非)가 생길 경우 설득력 있는 판단을 내려줬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생기면 상담했고, 부도덕한 행위엔 충고와 경고가 내려졌다. 동네 어른이 ‘전천후(全天候 지도자’였던 셈이다.
동네 어른은 전통적인 경로효친(敬老孝親) 사상과 도덕적 관념의 상징이었으므로 그 권위가 온 마을에 미쳐 질서와 안녕이 지켜지는가 하면, 마을 정신을 구현해 외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런 노인의 판단엔 이설(異說)이 있을 수 없었다.
지난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같이 노인들이 받들어졌다. 특히 농경사회에선 어른의 권위가 거의 절대적이었다. 농사엔 경험이 중시되고, 노인들은 그런 경험이 많았으므로 효용가치가 높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실제적인 능력이 효도 사상과 맞물리면서 노인 중심의 문화가 형성됐으며, 가족이나 마을 공동체엔 노인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국가 차원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연로한 王(왕)과 70세 이상의 문관(文官) 중 정2품 이상 고위관료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우대받았다. 60세 이상의 노인에게만 응시자격을 주는 ‘기로과’라는 과거제도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 같은 국가 정책은 평화로울 땐 ‘충’보다 ‘효’를 중시하며, 효행을 추켜세우던 가치관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노인의 권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혜와 지식은 밀려나고,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시대역행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불합리한 허구(虛構)로까지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도시화와 개인주의화로 치닫는 ‘핵가족사회’에선 지난날과 같은 권위나 설득력의 설자리가 날로 좁아졌다.
효도는 여전히 중요한 미덕이나 시대가 바뀌어 ‘노소공존(老少共存’의 논리가 필요해졌다고 봐야 할는지…. 노인들이 받들어질 수만은 없게 되고, 나름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이게 돼 버렸다. ‘대구 노인 학대 예방 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접수된 상담 건수가 564건, 신고는 158건이며, 올해 상반기엔 상담 233건, 신고 89건이었다. 체면 때문에 침묵을 지키는 노인들을 떠올린다면, 실제로는 그 정황이 훨씬 심각할 것이다.
자식과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노인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무관심과 忽待(홀대)의 정도도 심해지는 세태는 우려된다. 최근에 또 지병을 앓던 70대 노부부가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충남 아산의 한 아파트에서 동반 투신자살했다. 이런 충격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대구․경북에도 65세 이상 노인이 6월 말 현재 각각 20만 1천여 명, 36만 7천여 명으로 전체 인구의 7.9%와 13.7%를 차지하고 있다. 대구의 경우 3만 7천여 명이 ‘홀몸노인’으로 노인 인구의 18%에 이르고, 기초생활수급자 역시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는 형편이다.
노인 복지시설도 열악하기 그지없다. 대구 지역엔 노인복지시설이 노인 1천 명당 7.1곳으로 22곳이 넘는 전남․전북․충북과 20곳의 충남 등에 비해서도 크게 낮은 수준이다. 이 점만 보더라도 대구․경북 지역의 소외된 노인들을 위한 사회적 장치가 다른 어느 곳보다 시급하고 절실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효도와 어른 공경심의 추락 현상이다. 적지 않은 노인들은 자식이 있기 때문에 기초생활 수급 대상자가 되지 못한다고 한탄하기까지 한다. ‘낳고 기른 보답이 외로움과 서러움뿐’이라든가, ‘차라리 자식이 없는 게 나았을 것을’이라고 푸념하는 노인들도 적지 않다. 이는 푸념을 넘어선 절규에 가깝지 않은가.
60대 이상의 ‘황혼 파산’도 2년 새 6.3%에서 11.5%로 급증하고,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10명 중 1명꼴에 근접(9.5%)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노인 1명당 부양 인구도 7.6명으로, 그 사정은 계속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판국이다. 복지부는 노인 일자리를 내년엔 11만 개로, 2010년엔 38만 개로 늘린다고도 발표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닐는지….
지난 한가위 연휴 때도 귀성(歸省) 행렬은 어김없이 전쟁을 방불케 했었다. 조상과 어른을 받들고 찾는 마음자리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반의반’만 같다면 세상은 얼마나 따뜻해질 수 있으랴. <논설주간>
 
 
 
 

 논술-공교육 정상화가 먼저다—매일신문 2006. 11. 7
 
 
글쓰기와 생각하기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둘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좋은 글을 쓰려면 그런 생각을 해야 하고, 좋은 생각을 하지 못하면 그런 글을 쓸 수가 없다. 훌륭한 글은 생각의 줄기를 만들어내는 논리력이 따라야 가능하다.
글쓰기의 중요성은 인문․사회 분야는 물론 자연과학․공학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소통에 기반을 두며, 글을 통해 그 능력을 키우는 일은 어느 영역에서나 중요하기는 매한가지다. 소통 능력은 전문 영역 안에서 뿐 아니라 사회적인 영향력 확보 차원에서도 뒷받침돼야 한다.
글은 또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메시지 이상의 느낌까지 향수할 수 있어야 이상적이다. 전달의 기술보다는 생각과 느낌의 내용이 더 중요하겠지만, 이를 담아내는 그릇과 분위기 연출 역시 그에 못잖게 중요한 건 표현 능력과 깊은 함수관계를 갖고 있는 탓이다. 그 능력은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며 자신의 문제의식으로 엮어내는 기술에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요즘 일선 고등학교들은 대학 입시의 주요 변수(變數)로 떠오르고 있는 ‘논술’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 학생들은 물론 지도해야 할 교사와 조언자가 되는 학부모들도 쩔쩔매는 실정이다. 대학들 역시 서울대가 앞장선 채 다퉈 논술 강화에 나서면서도 정작 가이드라인마저 내놓을 형편이 안 되고 있는 것 같다.
대학 입시에 논술을 요구하는 건 글쓰기가 생각하기의 일환이고, 생각의 깊이와 힘이 논리력과 맞물려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더구나 그 힘은 인간 발달과 대학 수학(修學) 능력을 가늠하는 주요 요소라는 점에 있다. 하지만 우리의 공교육(公敎育)은 여태 그 중요성과는 동떨어진 길을 걸어 왔으므로 지금의 어지러움은 당연한 일일는지 모른다.
대학이 입시 전형에 논술의 비중을 강화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창의적이고 종합적인 사고력(思考力)을 측정하는 데 논술만큼 유용한 방법이 없다는 논리에도 사정은 같다. 게다가 객관식 단답형 모범답안을 찍어내는 ‘붕어빵 교육’의 문제점을 푸는 길트기의 한 방법도 될 수 있을 게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눈앞의 현실이다. 우리의 공교육이 원론적 접근으로는 쉽게 해법(解法)을 찾기 어려운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원칙을 좇으면 다른 하나의 원칙이 흔들리게 돼 버린다. ‘공교육 정상화’와 ‘대학 자율화’는 둘 다 추구해야 할 과제지만 때론 상충(相衝)하며, 이번의 논술 강화는 바로 이 점에서 부딪침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요즘 이 같은 혼란과 갈팡질팡 와중에서도 학원가에서는 새로운 시장이 생겼다고 쾌재(快哉)를 부르는 모습이다. 수험생들과 학부모는 물론 일선 고교와 입시학원에서도 논술에 대한 대비가 ‘안개 속’인데도 논술 교재들이 잘 팔리는 현상도 분명 ‘아이러니’다. 아무 책이나 논술 참고서라고 잔꾀 부려 특수(特需)를 노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논술 교육이 공교육 차원에서도 이뤄져야 하며, 믿을 만한 논술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는 소리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논술이 하나의 과목으로 자리매김할 성질의 공부에 속할 수 있을까. 어떤 과목의 공부라도 제대로 잘하면 저절로 ‘논술력’이 따르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의 공교육이 창의적이고 종합적인 사고력을 키우기보다 객관식 단답형 답안을 요구하는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만 치달아온 데 대한 궤도 수정이 요구된다면 지나친 원론이기만 할는지…. 논술이 어떤 문제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어떤 판단이나 결론에 이르는 생각을 정확한 글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평소 어떤 과목을 공부하더라도 그런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아무튼, 논술이 좋은 전형 방법이라 하더라도 일선 고교와 우리의 공교육 현실이 그런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여서 결국 사교육 시장을 살찌우는 파행으로 치닫게 하지 않을지 우려된다. 공교육의 장래를 생각하면 지금의 혼란을 넘어설 교육의 정상화가 시급하며, 반드시 그렇게 돼야만 하리라고 본다. <논설주간>
 
 
 
 
 
 남은 쌍춘년-오는 황금돼지해의 꿈—매일신문 2006. 11. 21
 
 
우리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그 10여 년 뒤인 지금까지도, 봄이 와도 진정한 봄은 오지 않는 세상에서 허덕이고 있다. 참여정부 들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거의 예외 없이 뒷걸음질이나 제자리걸음을 하는 게 고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 땅을 녹이고 물고기가 얼음장 밑을 헤엄치는’ 입춘과 같은 때를 기다렸으며, 해마다 ‘산천에만 오는 봄’을 아파하기도 했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더욱 그랬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격동기(激動期)를 겪었다. 특히 정치․경제적으로는 적지 않은 상처를 입으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다시 일어서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사정이 전과는 적잖이 다르다. 참다못해 ‘더 버티기보다는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몇 사람만 모이면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들 아우성이기도 하다.
경기가 가라앉은 지 오래인 채 중산층이 몰락한 우리 사회엔 저소득층과 고소득층만 남은 양극화로 치달아 저소득층의 신음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형편이다. 뉴스위크는 지난 1월 ‘한국의 양극화 문제는 한국 사회 전체를 날려버릴 수도 있는 시한폭탄(時限爆彈)'이라고 보도한 바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 시한폭탄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판이다. 올해 개인파산만도 지난해보다 3.6배 늘어난 10만 명이 넘을 전망이다.
현 정부의 거듭돼온 정책 실패에 대해 새삼 입에 올릴 필요조차 없을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이 있기나 한지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어느 정책 하나 제대로 되거나 거꾸로 안 간 게 없다’는 지적이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면 지나친 말일까. 부동산 대책만도 무려 여덟 번 거듭됐지만, 이번 대책 역시 ‘글쎄?’다. 이젠 아무도 정부를 믿으려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정부는 알고 있기나 한지, 답답할 따름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평지풍파(平地風波) 전략’으로 성공했던 참여정부는 여전히, 아니 더욱 극성스럽게, 민심(民心)을 읽고 국민을 진정으로 위하기보다는 이익 계산에 급급한 게 아닌지…. 나라 살림이 어려워도 청와대의 몸집은 날로 커지고, 대통령 주변에서 국록(國祿)을 먹는 사람들이 안으로는 자기 밥그릇이나 챙기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마저 아랑곳없어 보인다.
만에 하나 나라야 어디로 가든 벌써부터 내년 말의 대선(大選)에 유리한 평지풍파 연극을 꾸미고 있다면 이제 국민이 정신을 차려야 할 도리밖에 없다. 실제로는 빈부(貧富)의 양극화를 부추기면서 ‘있는 사람들’을 표적으로 적개심을 증폭시켜 절대다수인 ‘없는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려는 공연에 들어갔다면 그 꿈을 국민이 외면하고 깨뜨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젠 어떤 당근에도 흔들리거나 속아선 안 되리라.
올해는 음력으로 입춘이 두 번이나 들어 있는 ‘쌍춘년(雙春年)’이라 좋은 해가 되리라는 기대감이 유난히 컸으나 이 바람이 결혼하려는 예비부부들의 몫 만이어서는 안 된다. 예식장 주말 예약이 ‘하늘의 별 따기’인 것처럼 국민 모두의 더 나은 세상 만들기에의 꿈도 그러해야 한다. 산천의 봄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봄을 향한 꿈이 어떤 풍파에도 굳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음력으로 올해는 지난 양력 1월 29일부터 내년 2월 17일까지다. 봄에의 바람이 한 차례 지나가 버렸지만, 양력으로 내년 2월 4일 입춘은 아직 음력으론 올해의 몫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내년은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따져 600년 만에 찾아오는 ‘황금돼지띠의 해’다. 남은 한 번의 입춘에다 돼지꿈, 그것도 황금돼지의 꿈을 꿔보게 하니 이참에 우리 사회를 새롭게 바꿀 ‘황금돼지 새 정부 출산’도 꿈꿔봄 직하다.
아직 남아 있는‘쌍춘년’과 다가오는 ‘황금돼지해’는 계속 속도가 붙으며 우려를 증폭시키는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청신호가 되는 건 물론 우리 국가․사회에도 바로 그런 신호가 켜지는 시기가 되면 얼마나 좋으랴. 셰익스피어 연극 속의 맥베스가 읊은 시의 ‘잠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뽐내고 으스대지만 그때가 지나면 영영 사라져버리는 가련한 광대’라는 구절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논설주간>
 
 
 
 
 밑도 끝도 없는 ‘푸념과 말 바꾸기’—매일신문 2006. 12. 5
 
 
나라가 어지럽고 눈앞이 흐려진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화제의 중심에는 요즘 정치 이야기가 들어앉곤 한다. 나라 걱정이 태산(泰山)이며, ‘아직 지겹게도 한 해 넘게 남아 있다니’라든가 ‘이대로 가서는 안 되는데’라는 위기감과 불안감이 넘쳐나기도 한다.
정부와 야당, 여당과 야당은 물론 정부와 여당, 여당이나 야당의 내부에서까지 같은 목소리가 나지 않고, 심한 경우 파열음이 잦게 불거지는 ‘정치 현주소’ 때문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대통령과 청와대의 모습, 청와대와 여당 사이의 불협화음은 비판의 한가운데 놓이게 마련이다.
이미 많은 비난의 화살을 맞았듯이, 참여정부의 독선과 오만, 이념적 편향과 무능은 짜증나게 하며 신뢰감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런데도 자성 기미는 보이지 않고 ‘갈팡질팡’이다. 안보 문제로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정치․경제․교육․주택 문제에 이르기까지 성한 데라고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정책을 내놓기만 하면 혼선과 혼란이요, 실패를 거듭해 갈등과 분노만 커지게 했다는 지적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다.
사정이 이 지경인데도 대통령은 ‘막무가내 거꾸로 달리기’요, 여전히 ‘제멋대로’다. ‘이른 레임덕’에 대처하려는 리더십을 가다듬기는커녕 책임감이나 사명감을 저버린 푸념과 말 바꾸기를 서슴지 않아 딱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국민 ‘열 명 중 한 명’까지도 등을 돌리게 하려는 작정인지 모를 판이다.
‘임기 못 마치는 첫 대통령’ 발언 다음날 ‘임기가 얼마 안 남은 게 아니다’라는 내용의 말을 예사로 한 대통령을 과연 우리가 어떻게 봐야할지 기가 차지만, 이와 비슷한 일들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으므로 더 말하고 싶지 않고, 말을 보탤 필요조차 없을 것 같다.
지난 3일 해외 순방 길에 오르면서도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국정 표류는 야당 탓이며, 통합신당을 추진하는 여당 지도부를 공개 비판하는 등 여․야를 싸잡아 강도 높게 비난했다. 신당 문제를 두고 대통령과 여당 의장 사이의 ‘지역당’ ‘제2의 대연정’ 공방, 대통령 비서실장의 ‘구시대적’ 운운의 맞받아치기에 이은 ‘남의 탓’ 공격이어서 13일 귀국 뒤 정치권의 격돌이 불가피해 보인다. 나라가 어디로 가든, 국민이야 어떻게 보든 ‘막가파’식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어디까지 가고, 어떤 양상으로 번질지 심히 걱정스럽다.
참여정부의 출범과 열린우리당 창당, 그 이후의 과정들을 새삼 떠올리지 않더라도, 정부와 여당은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아량이 없지 않다면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남 탓’도 분수가 따라야 하며, ‘눈 가리고 아웅’ 역시 한가지다.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민생과 동떨어진 ‘헤게모니 잡기’에만 승부수를 띄우는 모습을 더 이상 보여서는 곤란하다.
흔히 ‘지금 우리 사회가 성숙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인가’라고 한탄들을 한다. 이미 자세가 흐트러진 경우뿐 아니라 바르게 살려는 의지와 깨끗한 마음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오염되지 않고 허물어지지 않기 힘든 세상이라 불안과 당혹감으로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만 한다면 분명 불행한 사회다.
대통령을 비롯한 일부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정치가들과 책임의식이 흐려진 고위 관료들이 부조리(不條理)하고 혼탁한 바람을 일으키고, 그런 환경으로 ‘성숙을 지향하는 시민들’까지 이끌어 가고 있다면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정치가들이 반드시 나라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들에 의해 좌우되곤 한다. 그들이 빚어내는 파행적인 분열과 갈등에 휘말리지 않기란 어렵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 국가․사회의 정상화는 그런 혼탁 치유는 고사하고 이해타산에 따라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가들과 관료들부터 먼저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지적은 너무나 당연하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은 지금 불안과 위기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며, 정쟁(政爭) 차원의 이합집산(離合集散)과 갈등․대립이 국민 정서와 나라 장래에 큰 재앙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만 한다. 알고도 잿밥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다면 더더욱 안 될 일이다.
<논설주간>
 
 
 
 벌써 ‘네거티브 공방’ 난무하다니—매일신문 2006. 12. 19
 
 
선거를 앞두면 장점과 강점을 강조하는 ‘긍정적 선거운동(Positive Campaign)’과 단점과 약점을 부각시키는 ‘부정적 선거운동(Negative Campaign)’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그중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는 후자가 기승을 부리곤 한다. 상대에 대한 비난과 인신공격(人身攻擊) 등이 대중을 쉽게 흥분시키고 일시적 효과도 크기 때문이다.
정치후진국일수록 그렇듯이, 우리는 지난날 ‘아니면 그만이고’식의 비방과 폭로전의 폐해(弊害)를 신물 나도록 보아 왔다. 역대 대선(大選)이 거의 예외 없이 정당이나 개인 차원의 폭로전․흑색선전으로 얼룩졌으나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선거가 끝나고 나면 네거티브 공세들이 허위이거나 과장되고 왜곡된 경우가 많았다. 지난번 대선 때도 상대를 깎아내려 판세를 유리하게 조장하면서 이익을 챙긴 선동 효과가 크지 않았던가.
선거에는 으레 후보의 결점이나 전력(前歷)을 검증하는 과정이 따른다. 이 같은 과정은 유권자의 판단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되레 유권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선거판을 저질로 만들어 ‘정치 혐오’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적지 않다. 속이고 속아 결과적으로는 후회할 상황을 부를 수 있다는 데도 문제가 있다.
대선이 오늘로 꼭 1년 남았고, 여야(與野의 대권 주자들이 아직은 암중모색 중인데 벌써부터 네거티브 攻防(공방)이 난무하고 있다. 별 문제가 안 되는 점들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해 상대에게 흠집을 내고 보자는 비방전 극성 양상이다. 없는 일을 꾸며 폄훼하려는 전략이 꿈틀거리는 기미마저 없지 않다. 한 야당 대선 예비후보들은 후보가 되기 위해 일찍부터 각축전을 벌이는가 하면, 여론이 극도로 나빠 갈팡질팡하는 여당엔 뚜렷한 후보가 부각되지 않고 있는 탓이기도 할 것이다.
얼마 전,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향수에 기대고 있다’ ‘퇴행적 성형수술’이라는 등의 공격을 퍼부었다. 고건 전 총리도 ‘깜짝쇼식 토목사업’ 운운하면서 가세했다. 그러자 한나라당은 이 공세를 주도한 민병두 홍보기획위원장을 ‘제2의 김대업’이라며 ‘김대업식 공작정치’ ‘네거티브 공세’라고 받아쳤다.
이어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은 ‘대선 후보 검증 차원의 지적’이라고 했다. 장영달 자문위원장은 ‘박정희 따라 하기’ 양상을 ‘군사독재정부로 돌아가겠다는 것의 방증’이라고 비판했다. 다시 역공(逆攻)에 나선 한나라당은 ‘흑색선전을 동원한 대중 조작, 유력 후보 흠집 내기’(나경원 대변인)이며, ‘지지율 5%를 넘는 변변한 주자가 한 명도 없는 답답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치졸한 전략을 들고 나온 것’이라고 공격했다.
이 공방전이 어디까지 갈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부터라도 자제되길 바란다. 특히 남의 밥상에 재나 뿌리고, 자신이 일어서려 하기보다는 남을 넘어뜨리고 보자는 생각부터 해서야 되겠는가. 유권자의 판단 기준을 특정부분만 주목하게 하는 효과를 노려 재미를 보려 해서도, 재미를 보게 해서도 안 된다.
정치가 더 이상 나라 발전의 발목을 잡지 않아야 한다. 유권자들의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흥미를 유발하는 폭로나 비방으로 일관하는 유치한 선거 기법으로 환심을 사려는 행위를 용납해서도 안 된다. 오로지 잿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선량들이 정치 발전과 나라 발전에 헌신할 리 만무하다는 사실은 뼈가 아프도록 보아오지 않았던가.
이미 ‘2007년 대선 승자는 누구인가’ 등의 책이 나왔다. 한 저자가 내년 대선 투표일까지 정치 일정을 ‘오디세이’의 길고 험난한 모험의 여정에 비유하고 있듯이, 아직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어떤 변수들이 어떻게 생길지 알 수 없으며, 지난번과 같은 ‘네거티브 공세의 득세’로 안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어 불안하다.
이 같은 와중에 최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유력 대선 주자에 대한 언론의 인터뷰를 내년 8월까지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지금까지 문제 삼지 않다가 이런 공문을 보낸 저의(底意)를 이해하기 어렵다. 인터뷰까지 대담 토론으로 보는 건 ‘법 과잉 해석이자 알 권리 침해’라는 비판에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불순한 의도가 개입된 억지 언론 규제와 ‘눈 가리고 아웅’식 변수 만들기가 아니길 바란다. <논설주간>
 
 
 
 
 ‘위는 특히, 아래 역시’ 달라져야 한다—매일신문 2007. 1. 2
 
 
새해가 되면 옛 선비들은 임금에게 국사(國事)에 대한 글을 올렸다. 계곡 장유(張維)의 ‘새해가 시작하는 때 더욱 신명(申命)의 아름다움을 맞으시길 기원합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는 그 한 예다. ‘주역(周易)’이 말하는 ‘신명’은 ‘위에서는 아래의 마음을 따라 명령을 내리고, 아래에서는 위의 뜻을 좇아 따르는 것’을 뜻한다.
‘아래’를 위해 소망의 편지를 보내는 일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군자(君子)는 새해를 맞이하면 반드시 그 마음과 행동을 한 번 새롭게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家門(가문)의 몰락으로 벼슬길이 막힌 자식에게 성인(聖人)․문장가․참선비의 길은 막히지 않았다며, 학문에 정진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옛날에도 그랬겠지만, 오늘의 우리 사회도 ‘위’는 ‘아래’를, ‘아래’는 ‘위’를 제대로 헤아려 다스리고 따른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따스해질까. 막무가내 ‘코드 인사’와 ‘줄서기’, ‘내 편, 네 편’과 ‘아래위의 갈등’ 등으로 얼룩진 지금 우리 사회에 비춰 계곡과 다산의 이 편지는 소중한 일깨움이요, 깊이 새겨야 할 귀감(龜鑑)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새로워지고 싶은 갈망이 더해지는 새해다. 갈등과 反目(반목)을 넘어 위를 향해서도 아래를 보면서도 달라지려는 마음을 다지고,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을까.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으되, 새해의 결심이 ‘으레 깨지는 것으로 여기는 마음’까지 ‘깨져야 할 고정관념’이었으면 좋겠다.
이태 전, 어떤 업체가 사원들의 새해 결심 중간점검을 했더니 아예 결심을 ‘안 한 사람’보다 ‘한 사람’들이 적어도 반걸음 정도는 앞서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크지 않은 공동체 안에서 새 결심 유무(有無)가 이 같은 차이를 빚는다면, 그런 결심이 국가 장래에는 어떤 작용을 하게 될 것인가. 한 사람 한사람의 제대로 된 결심이 모인다면 국가와 사회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젠 달라져야 한다는 말을 쏟아낸다. 지난번 대선 때 과거와 거꾸로 가려는 사회적 반작용이 참여정부를 낳았던 건 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달라져도 너무 잘못 달라져 갈등과 고통이 가중되기만 했다. 그래서 이미 오래 전부터 ‘다시 거꾸로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다.
한 예만 들더라도, 정부 주도의 ‘지나친 반공’에서 ‘지나친 좌편향’으로 바뀌지 않았던가. 이 엄청난 변화 때문에 우리 사회의 나침반이 마비될 지경이라는 비판이 비등했다. 과연 우리가 탄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아졌다.
별로 과장하지 않아도 ‘총체적인 위기’라는 말이 귀에 못 박일 정도다. 어느 모로 봐도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도 실감난다. 그런데도 최고통치자와 추종 세력들이 아래와 주위의 여론엔 아랑곳하지 않고 아전인수의 말, 말, 말이다. 자기변명과 ‘네 탓’만 거듭하면서 오로지 ‘제 길 가기’다.
한참 전부터 각종 여론조사 결과 국가의 복원력이 작용하는 ‘정권의 반대편’에 훨씬 많은 사람들이 서고 있는 것 같다. 주춤거리던 ‘현대판 선비’들과 나라의 장래를 진정으로 우려하는 각계각층의 목소리도 날로 두드러진다. 제 정신과 용기를 되찾는 ‘새 희망의 조짐’들이 점차 가시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가 또 어떤 변수들과 만나게 될지, 어떤 결과와 연결될는지…. 갈수록 불안해지는 건 ‘요동치는 안개 속 정국(政局)’ 탓이다. 위의 이전투구식 정쟁(政爭) 때문이다. 위와 아래의 소통이나 끌어안기와는 상관없이 오는 연말의 대선을 겨냥한 정치적 노림수 속출과 수상한 기미들의 행진이 가속화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전혀 없어 보인다.
올해 우리는 더 나은 길로 나아가느냐, 그 반대의 길을 걷느냐 하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岐路)’에 놓이게 됐다. 민생과 국가 경쟁력에 새로운 힘이 돼줄 경제가 살아나야 하고, 갈등과 반목이 상생과 화해)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 할 수 있는 대선을 치러야 하고, 말기 정권의 레임덕도 최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새해엔 ‘위는 특히, 아래도 역시’ 새롭게 달라져야만 한다. <논설주간>
 
 
 
 
 민심 역행의 ‘위태로운 리더십’—매일신문 2007. 1. 16
 
 
오늘의 우리 사회와 정치 판도를 보면 곤혹스럽다. 언젠가 한 학자가 지적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정치권력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므로 세상은 더욱 시끄럽고 어지러워지는 느낌이다. ‘높은 자리’를 향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들과 추종세력들이 벌이는 권력 지향적 사생결단(死生決斷)은 불안감을 넘어 절망감을 떨치지 못하게 한다.
정치권뿐 아니라 보통사람들도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그 일에 사명감을 갖고 가치 부여를 하고 있는가. 아무리 봐도 지나치게 권력 지향적이다.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정작 해야 할 일이나 국민이 원하는 바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선 나라를 위한 소명감보다 정략(政略)과 노림수들이 판을 칠 게 뻔하다.
국민을 위하고 참여시키는 정치를 천명하면서 출범한 참여정부는 집권 4년 동안 세상과 民心(민심)의 흐름을 줄곧 외면했다. 독선과 아집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국제 문맥에서도 사회주의가 허물어지는 추세와 거리가 멀게 좌파들이 권력을 휘둘렀다. 세상의 흐름과 역행하면서 반목과 갈등을 심화시켜 왔다.
새해 들어서는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과 갈등이 커지고 있다. 벌써부터 연말의 대선을 겨냥한 필사적 정치 술수들이 불거지는가 하면, 앞으로 어떤 기상천외의 사태들이 연출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위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태로운 리더십’을 쏟아내는 가운데 정부․여당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대다수 국민의 생각과 느낌, 고통과 시름엔 눈길마저 주지 않은 채 오로지 ‘제 길 가기’다. 막무가내 정략과 정쟁뿐, 막말과 헌법 파괴적인 발상으로 오락가락이다.
대통령은 뜻이 다른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층의 말은 물론 민심마저 아랑곳하지 않는다. 폭넓은 소통은 고사하고 대통령이 적하장(賊反荷杖) 말귀가 통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는가 하면, 품위와 설득력이 없는 말들만 터뜨리고 있다.
무슨 꼼수요 노림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통령이 과연 이래도 되는 건지…. 문제를 풀어나가는 출발점이어야 할 소통은 남의 말을 듣고 이해하려 하는 게 먼저다. 그런데 아예 귀를 막고 온몸으로 이를 거부하고 있으니 기가 찬다. 앞으로 어떤 ‘돌출 발언’과 노림수로 국민을 현혹하면서 ‘내 고집대로’ 휘젓기만 할 건지,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최소단위의 공동체인 가정만 하더라도 가족을 두루 살피고 존경받을 수 있어야 ‘제대로 된 가장’일 수 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최고통치자가 ‘코흘리개 골목대장’ ‘민맹(民盲)’ ‘고집불통’ ‘오만방자’ 등의 온갖 비난을 받아서야 어디 체통이라도 서겠는가. 또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려고만 들어서야 어느 누가 받들 것인가.
게다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개헌(改憲) 카드로 ‘논쟁만 유발’해 소모적 정쟁으로 치달을 소지를 키우고 있다. ‘헌법이 만화책도 아니’라면 ‘생각이 짧은 것’이며, ‘판을 흔들려고 내놨다면 무책임한’ 지도자라는 비난까지 나오는 건 비판적 시각에서 보지 않더라도 당연지사다.
만약 정권 말기의 레임덕과 거기 쏟아지는 화살들을 피해보려는 꼼수요, 정치권과 국민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정국 뒤집기용 정략’이라면 참 나쁜 도박이다. 국민을 우롱하는 행태다. 아무래도 차기 정권을 결정할 대선을 앞두고 지금의 집권 세력이 서둘러 제기할 사안은 아닌 것 같다.
올해 대선이 국운(國運)과 ‘21세기 한반도호’의 향방을 새롭게 잡아나갈 결정적 전기가 되려면 정말 이래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물론 대선 주자들이 당파적 이해관계 이전에 나라와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라가 새롭게 다시 일어서고,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열려야만 한다.
그런 길을 열려면 야당은 힘을 결집해 집권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강구가 급선무다. 대통령과 여당은 실정(失政)을 뼈저리게 자성하면서 국민의 심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자세여야 한다. 국민 역시 제자리에서 이성을 찾고, 눈을 바로 떠야만 한다.
<논설주간>
 
 

 
 이른 레임덕, 황혼의 몸부림—매일신문 2007. 1. 30
 
 
자신의 뜻을 밀고나갈 힘이나 적(敵)들을 피할 힘이 빠진 오리가 ‘레임덕(lameduck)’이다. 이런 ‘절름발이 오리’는 다른 오리들에게 치이고 뜯기는 표적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엄호나 보호에서 밀려나는 처량한 신세가 되기도 한다. 임기제 권력자의 임기 말에 일어나는 ‘권력누수(權力漏水) 현상’을 그런 오리에 빗대어 레임덕이라 한다.
임기의 끝이 보이는 권력자에겐 측근들마저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손해가 돌아올까 두려워 멀리하는가 하면, 자신의 힘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그 표적을 물어뜯곤 한다. 흠결이 많을수록 그 강도는 더할 수밖에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힘 있는 새 실력자의 편이 되고,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대통령 5년 단임제 이후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은 모두 레임덕에 시달렸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정과 시기가 달랐지만 예외 없이 국정(國政)을 이끌 동력과 장악력이 흔들렸다. 시기가 더 이르거나 늦었을 뿐 하나같이 권력 누수로 소속 정당을 탈당해야 했다. 정치적 상황과 민심, 차기 대선 주자들의 차별화에 못이기는 척 순응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아무래도 이미 오래 전부터 레임덕 신세인 것 같다. 힘이 빠져 말발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 소속 정당과의 관계가 말하듯이 따르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여당의 탈당 국회의원들이 이어지는 추세다. 그 원인은 대통령이 레임덕을 불러들일 정도로 신뢰를 잃고 실패를 거듭해 왔으며, 여당이 ‘타이타닉호’를 방불케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여․야는 물론 국민의 요구나 비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오히려 완강한 목소리다. 무슨 일이 어떻게 얼어날지 더욱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최근에 가진 몇 차례 연설이나 기자회견이 ‘또 그 소리’라는 비판이 쏟아지게 할 만큼 힘을 얻기는커녕 墜落(추락)과 악재만 키우는 ‘거꾸로 가기 말잔치’ 같았지만 도무지 무슨 포석인지 헤아리기 어렵다.
‘차라리 아무 말을 하지 않느니 못하다’는 비판에도 노 대통령은 ‘꿀릴 게 없다’는 투로 공격을 받으면 적극 대응하겠다는 공세적 태도에다 대선 겨냥의 훈수에 나서 비난을 사기도 했다.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여당마저 분열이 가속화되는 상황에 이르자 ‘황혼의 몸부림’으로 마지막까지 권력에 매달리는 저항의 모습이다.
지기 싫어하는 특유의 승부사 기질 탓인지 모르겠으나, 이젠 오직 권력만 의식하는 정치놀음보다는 민생을 돌보고 국정 운영에 대한 국민의 심판을 기다리면서 마지막 정리 작업을 하는 게 옳지 않을는지. 신뢰가 깨질 대로 깨진 상황에서 강공책만 쓰려는 건 어떤 분의 표현대로 ‘죽어도 좋다’는 의미 이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미국 등 선진국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남미에서도 임기 말의 대통령들은 대개 레임덕 상황에선 조용해지곤 했다. 국민의 여론을 개의치 않고 돌발적인 중대발표를 하거나 권력만 지향하지는 않았다. 뿌린 씨앗들을 수확하는 데 주력하면서 마무리 작업에 최선을 다하게 마련이었다. 노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한다.
눈을 더 크게 떠보면, 우리의 정치가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노 대통령뿐 아니라 여․야 모두 집권에 혈안이며, 대선에 모든 걸 걸면서 당장의 국정 과제들과 현안에는 큰 힘을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아 하는 소리다.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 여당과 야당의 현실 인식과 주장이 너무 달라 어지러울 지경이라면 어느 쪽이 더 틀렸든 ‘잿밥’이 최우선 지향점이라는 방증이 아닐는지….
국민은 나라가 바로 일어서길 간절히 원한다. 민생과 상생, 비전과 꿈의 제시를 목말라한다. 그러나 어제의 동지마저 적이 되기도 하는 ‘철새 정치인’들의 이동과 ‘양지 좇기 이합집산’ 등 고질병이 벌써 도지는 모습이다. 대통령의 권력 누수 피하기와 그 확대를 위한 전략이 어떻게 벌어지고, 정치권의 집권을 겨냥한 돌출 정쟁들이 어떤 진흙탕을 빚게 될지 ‘커지는 우려’가 기우(杞憂)이길 바랄 따름이다. <논설주간>

 
 
 
 폴리페서들부터 달라지기를—매일신문 2007. 2. 13
 
 
대학(大學)은 문화의 산실이며, 미래의 문을 여는 실험실이다.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곳이다. 대학교수의 본령은 학문 탐구지만 인재 키우기도 그에 못잖게 중요하다. 개인의 지적 자유 존중, 객관성과 보편타당성은 학문이 지향하는 가치임도 말할 나위가 없다.
더구나 교수들은 우리 사회의 지성을 대표하며,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인 사회의 리더 계층이다. 교육으로 내일의 국가경쟁력을 창출하는 주역들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가진 정치권력이 대학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기거나 스스로 대학을 낮춰본다면 나라의 장래는 어두워진다.
교수가 제자리를 벗어나 세속적인 출세욕에 빠지면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권위와 신뢰성을 이용해서 개인 이익을 챙기거나 대학의 학사 운영에 차질을 빚게 하면서 권력에 줄을 대면 더욱 그렇다. 이 경우 정치적 영달만 꾀한다고 해서 ‘몰지성적(沒知性的)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는 건 당연하다.
선거 때가 가까워지면 정치권에 줄을 서는 교수들이 적잖았듯이, 올해도 그런 움직임들이 벌써부터 극성이라 한다. 물론 교수도 정치현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정치적 이상(理想)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 자유를 막을 근거도 없다. 그러나 대학과 정치판에 양다리를 걸치고 오락가락하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
‘본령 벗어나기’는 차치하더라도 동료 교수와 학생들에게 부담과 피해를 주는 점부터 문제다. 법적으로 보장돼 있는 교수들의 정치 참여를 특히 나무라고 싶은 대목은 교수직을 정계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 있는 행태다. 정치 지향의 野心(야심)을 감추거나 위장한 채 강단에 서서 줄잡기에 연연하는 일부 교수들에 대해선 자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날 정치권은 ‘지적 콤플렉스’나 ‘정권의 정당성 결여’ 때문에 교수들을 적잖이 끌어들였다. 이를 이용해 그 대열에 끼어들고 학자로서 객관성을 잃을 정도로 정파(政派)의 이해에 개입하는 교수들도 허다했다. 실력자와 관계를 맺은 뒤 집권에 성공하면 당당하게 ‘주주’ 행세를 하기도 했다.
이 바람에 ‘폴리페서(poli-fessor)’라는 조어가 낯익어진 지 오래다. ‘정치(politics)’와 ‘교수(professor)’의 합성어인 이 조어는 정치에 참여하거나 참여를 위해 줄을 대는 교수를 가리키지 않는가. 민주화․다원화 사회에 접어든 이후 이런 교수들은 ‘정․관계 진출=어용(御用)’이라는 등식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탓인지, 부쩍 늘어온 것도 사실이다.
정치 활동을 연구․교육과 더불어 사회봉사의 한 형태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다. 정치인 혐오나 관료주의의 폐해에 대한 대안(代案)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정권 창출 이후의 대가를 노리거나 ‘한자리’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면 이 견해에 동의할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실제 강단 지식(학문)의 정책 접목이 현실을 왜곡하고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폐단을 이 정부 들어서도 절감해온 터다. 줄을 잘 서고 충성하는 교수들이 ‘대박’을 터뜨려 떵떵거리며 정권의 전면(前面)에서 큰소리치는 사례를 적잖이 보아 왔지만, 그 결과는 과연 어떠했던가. 학문엔 성숙해도 정치에는 미숙해 실패할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폐해를 끼치고 자신도 ‘망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벌써 대선 주자 캠프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교수들도 많다는 보도가 있었다. 포럼이나 연구모임을 통해 대선 주자 캠프에 줄을 대려하거나 ‘지근거리’를 만들어보려고 그 문턱을 기웃거리는 ‘꼴불견 행태’를 보이는 이들도 상당수라 한다. 심지어 불러주기를 바라며 ‘볼멘소리’까지 합창을 방불케 하고 있다니 그야말로 가관이다.
조금은 느닷없이 폴리페서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세상이 너무 어지럽고 잘못 돌아가는 데가 많은 것 같아서다. 우리 사회의 지성을 대표하는 리더 계층, 대표적인 지성인들부터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아래위 할 것 없이 모두 제자리에서 성실하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바른 마음’을 가진다면 정치가 제자리를 찾고, ‘어떤 정치적 노림수나 꼼수도 설자리가 없어지지 않을까’해서이기도 하다. <논설주간>
 
 
 
 
 악의 신 모모스가 남긴 교훈—매일신문 2007. 2. 27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神) 모모스는 남을 경멸하고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언제나 남의 험담에만 소리를 높였다. ‘인간의 가슴에 창을 만들어 속마음을 알 수 없게 했다’고 말한 신을 비난했다가 결국은 하늘에서 쫓겨나게 된 ‘죄악의 신’이었다. 이 모모스 이야기가 비유하는 핵심은 남을 헐뜯고 비난하지 말라는 경고다.
‘검으면 희다 하고 희면 검다 하네/ 검거나 희거나 옳다 할 이 없다/ 차라리 귀 막고 눈 감아 듣도 보도 말리라’라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해동가요’도 비슷한 일깨움을 안겨준다. 中宗(중종) 때는 당파 싸움이 서로 모함하고 비방하는 유언비어(流言蜚語) 난무 양상으로 치달아 나라를 온통 혼란에 빠져들게 했다.
요즘 세상이 바로 그 짝이라 해도 지나치지만은 않을 듯하다. 정치판은 물론 어디를 둘러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어떤 문인이 요즘 우리 사회를 ‘인간은 외출하고 없는 공간’이라고 심하게 말했지만, 그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실보다는 위선과 잔꾀로 득세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은 세태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서로 편협한 이기심을 앞세우고, 위선적인 인격을 성실한 듯한 표정으로 가장하는가 하면, 남을 생각하는 척 기실은 해치려고 하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 들여다봐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관계는 비인간화로 가게 되고,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려고만 하는 발버둥과 술수), 남 헐뜯기와 비난으로 인해 ‘역지사지(易地思之)’와는 거꾸로 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결과는 갈등과 反目(반목), 불신과 불행, 종국에 가선 자기 파괴로 이어지지 않기 어렵다.
이 같은 비인간적 행태는 가정에서의 天倫(천륜) 배반, 직장에서의 불신과 적대행위(敵對行爲)를 낳고 키우게 되기도 한다. 국가와 사회는 그런 악재들이 모여들어 아수라장이 안 되고 베길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 피해는 모두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게 될 수도 있다.
어떤 학자는 지금 우리 사회에선 신의와 의리, 약속과 믿음 등이 파편처럼 부서지고 있다고 한탄했다. 게다가 이 지진 현상은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치지도자들 사이에 가장 먼저 일어나 ‘도미노 현상’을 부른 나머지 온 나라를 혼란과 갈등, 걷잡기 어려운 분열에 빠뜨리고 있다고 우려했다.
사실 정치지도자들은 약속 파기와 거짓말을 얼마나 많이 해 왔던가. 권력을 향한 목적 좇기에 혈안이 돼 토사구팽을 스스럼없이 자행했었다. 선거 때만 되면 이용과 배반으로 무리지어 나는 ‘철새 정치인’들이 이동과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올해도 벌써부터 그런 낌새들이 속속 불거지고 있는 형국이다.
열린우리당의 의원 집단 탈당 행렬→통합신당 시도의 간판 바꿔 달기 움직임→대통령의 탈당→집권당 소멸과 야당행 등을 지켜보는 심정은 어지럽기만 하다. 뭐가 뭔지 도무지 그 속셈을 알 수 없다. 또 속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든다.
특히 어떤 깜짝쇼를 연출해 국민의 넋을 빼거나 기상천외의 음해성 전략을 구사해서라도 다시 집권해보겠다는 ‘현혹의 노림수’가 불거질지도 알 수 없다. 실제 국민이나 민생, 나라 발전은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권력에만 집착하는 경우는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
이런 와중에 제1당이 된 한나라당은 어떤 모습인가. 가장 앞서 달리는 두 경선 주자 간의 ‘제살 뜯기’식 검증 공방,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분열과 자중지란(自中之亂) 조짐 등은 어느 모로 봐도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헐뜯기 진흙탕 싸움으로 갈등과 분열을 가져온다면 당을 위해서도, 집권을 위해서도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다.
어느 당을 막론하고 네거티브 전략으로 정권을 창출하려 한다면 큰 잘못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절대로 그래서도 안 된다. 공자(孔子)는 ‘어진 자는 그 말 한 마디도 가벼이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정치인이라면 공자의 이 말을 깊이 새기고, 모모스가 남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민도 ‘세 번째 속았을 때는 속은 자가 더 나쁘다’는 속담 대목을 명심해야만 한다.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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