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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6

박목월과 조지훈——경북신문 2022. 8. 22
아트코리아 | 조회 418

박목월과 조지훈——경북신문 2022. 8. 22
 
 
  요즘 세상이 너무 각박해 ‘소중한 우정’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한다. 오랜 친구도 세속적 이해타산 때문에 등 돌리는 경우를 적잖이 보아왔으며, 여러 번 그런 경험도 해왔다. 나이가 들면서는 가까이 만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어 안타깝고, ‘진정한 친구가 평생에 한 사람만 있어도 다행’이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문학도 시절 조지훈(1920~1969), 박목월(1916~1978) 시인을 우러르며 부러워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도 ‘올곧고 의젓한 지사’풍의 조지훈을 닮고 싶었으며, 빼어난 언어 감각을 지녔던 박목월의 감성을 따르고 싶어 했다. 더구나 이 두 분의 한결같은 우정은 누군가 ‘산과 같은 친구’의 본보기로 꼽았듯이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시인으로 출발할 당시의 이 두 분에 대한 한 일화를 떠올려보더라도 친구 사이의 따뜻한 우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되새기게 된다. 먼저 베푸는 쪽은 조지훈이었던 것 같다. 시인 정지용의 추천으로 1939년 나란히 문예지 ‘문장’으로 등단한 뒤 조지훈은 만난 적도 없는 박목월을 만나러 영양 주실마을에서 경주까지 찾아갔다.
  알려진 바로는, 복사꽃이 활짝 피었는데도 진눈깨비가 흩뿌리는 어느 봄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 우려한 박목월은 이름을 쓴 피켓을 들고 경주역에 나가 마중했다고 한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석굴암으로 가는 도중 불국사에 들르고 그 부근의 나무 그늘에서 술자리를 벌였던 모양이다. 연상인 박목월은 술에 취하자 오한으로 떠는 조지훈에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몸을 감싸 주었다고 한다.
  조지훈은 이 만남을 위해 안강의 옥산서원 독락당에 방을 얻어 머물면서 박목월과 무려 보름 동안이나 교유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겠는가. 고향 주실마을의 집으로 돌아가서는 ‘목월에게’라는 부제를 붙인 시 ‘완화삼(玩花衫)’을 써서 경주로 보냈다.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구름 흘러가는/물길은 칠백 리//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이 밤 자면 저 마을에/꽃은 지리라.//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 하여/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조지훈의 시 ‘완화삼’ 전문

  이 시를 받은 박목월은 조지훈에게 ’나그네‘라는 시를 써서 주실마을로 보냈다. 이 시에는 “술 익는 마을의 저녁노을이여―지훈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화답시였으므로 이미지가 비슷하지만 절제되고 간결해 두 시인의 개성을 읽게 하기도 한다.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남도 삼백 리//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놀//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시 ’나그네‘ 전문
 
  조지훈이 박목월을 만나러 경주에 가지 않았다면 ’완화삼‘이, 그 시를 받지 않았다면 박목월의 대표작으로 널리 사랑받는 ’나그네‘가 빛을 볼 수 있었을까? 두 시인의 각별했던 우정이 이 두 명시를 낳는 계기가 됐다는 사실은 흘려볼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들의 따뜻한 우정은 한국문학사에 시의 금자탑을 세운 ’청록파‘를 탄생시켰다. 정지용 시인의 ’문장‘지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은 이들 두 시인과 박두진, 박남수, 이한직이었다. 조지훈의 주선으로 공동시집을 내기로 했지만 개인 사정으로 박남수, 이한직이 빠지고 박목월의 시 ’청노루‘ 이미지를 입혀 발간한 3인 시집이 당시 시단에 새바람을 일으켰던 ’청록집(靑鹿集)‘이다.
  그 이후 이 두 시인은 깊은 우정을 축으로 한국 시단을 함께 이끌었으며, 각기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쳤다. 조지훈은 한국의 고전적 정서와 민족의식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면서 절제된 이미지와 전통적 운율을 절묘하게 구사했으며, 간결하고 정제된 필치로 토속적 자연 풍경을 윤색 없이 포착하던 박목월은 자연, 일상, 달관에 무게중심을 두는 시적 여정으로 부단히 변모하는 시세계를 열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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